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진리를 이해하고 전하는 방법..

모로나이 2010. 5. 20. 09:19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 4,10,11,13)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진리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인해 밝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진리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영적인 방법이 아니고서는 이해할 수가 없겠죠. 제가 이 현재 이 교회를 다니게 된 것도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하거나 특정 신학을 공부해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들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나 “성령의 음성”을 인식했고 그 음성에 순종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요한 14:26에 나오는 것처럼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인도를 간구했고 실제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길에서 신앙을 하고 있는 겁니다.


물론 이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속임을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특정한 분위기에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감정을 종종 성령의 은사나 속삭임으로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은 부흥회와 같은 곳에서 비트있는 음악의 반복과 감정적인 설교,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흐느낌으로 인해 자신이 받게 되는 감정을 성령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있지요. 의미 없는 소리의 반복인 소위 “방언”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희 교회에서는 그런 것이 없고 오직 조용한 가운데 임하시는 성신의 음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저 역시 그 음성에 순종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분명 속임을 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뢰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었습니다. (사도 17:11) 그런 가운데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고, 다른 종파의 사람들과도 부지런히 토론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때론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 싶을 정도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대다수의 후기성도와 달리 단순한 것에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뭔가 복잡하고 더욱 세부적인 것들에 추점을 맞출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저의 단점입니다.


아무튼 저는 우리가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인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체계도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기는 하지만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기도 하시지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한 14:26)


아무리 성령이라 하여도 전혀 배운 적이 없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을 생각나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한 것을 성령께서 바르게 이해하고 기억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렇게 발견한 진리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실 적에 하신 말씀처럼 “전해야 합니다.” 전하고 그것이 참된 것인지 알 수 있도록 기도하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설명이 그럴듯 해도, 스스로 알려하지 않고 기도로 인도를 구하지 않으면 그 진가를 알 수가 없지요.


하지만 그렇게 전하는 과정 중에는 분명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이치를 논할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사도 바울이 그렇게 선교사업을 했습니다.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도 9:29)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격분하여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사도 17:16018)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사도 18:19)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만나는 사람마다 변론(옳고 그름을 밝혀 말하는 것,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두란노 비전성경사전 참조)하여 많은 이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말쟁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부질없는 토론이나 감정적 논쟁, 자기의 것만 옳고 다른 것들은 전부 그릇되다는 식의 편견이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들에 대한 분별이며 복음을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바울이라는 이 사람이 에베소에서 뿐만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 걸쳐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신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 서 마음을 돌려 놓았습니다.” (사도 19:26, 표준새번역)


사람을 설득하는 과정 중에 논증과 변론이 빠지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소망에 관한 이

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는 권고 (벧전 3:15)가 주어졌고 실제로 그러한 소망을 이야기하려는데, 그것을 단순히 특정 종파에 대한 옹호로만 치부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