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교회에서는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가 십자가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예수의 대속 희생을 믿지 않으며, 의로운 생활과 규율에 순종해야만 구원을 얻는 ‘행위구원자’라고 비판을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 교회는 속죄의 범위를 더 넓혀줄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삶 속에 권능으로 임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경전 안내서 148쪽을 보면 “속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의 속죄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인류의 죄를 위한 그의 고난, 그의 피흘리심, 그리고 그의 사망과 그에 따른 무덤으로부터의 부활이 포함된다.”
경전 안내서(속죄)
예수께서 우리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기 위해 치루신 속죄희생은 단지 십자가 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고난과 피흘리심부터 시작하여 부활까지의 전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침례 받기 전에 몰몬경을 비롯한 4대 경전을 다 읽어야 하는 목표를 가지고 열독을 하던 시절 다음 구절들을 보고 벌컥 눈물이 쏟아질 뻔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고난은 만유 가운데 가장 큰 자 곧 하나님인 나 자신을 고통으로 말미암아 떨게 하였고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하였으며, 육체와 영이 모두 고난을 겪게 하여 - 내가 그 쓴 잔을 마시지 않고 물러서려 하게 하였느니라” (교성 19:18)
“또 보라, 그는 죽음에 이르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과 육신의 고통, 주림, 갈증과 피로를 겪으리니, 이는 보라, 피가 모든 땀구멍에서 나옴이라,그의 백성의 사악함과 가증함으로 인한 그의 고뇌가 그처럼 크리라.” (모사 3:7)
우리 죄를 위한 그 고통이 얼마나 크셨으면, 만물을 창조하신 그 분이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할 정도로 힘드셨으며, 심지어 그 자리에서 물러서려고 까지 하셨을까...내 감히 그 고난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물러서려고 하셨다’는 그 말씀에 가슴이 조마조마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그 구절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 온 것은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게 했다”, “피가 모든 땀구멍에서 나옴이라”는 표현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누가복음 22:44)
성경에는 예수께서 흘리신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다고 직유법을 사용하는데 교리와 성약에는 직설적으로 “피를 쏟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몰몬경이나 교리와 성약에 그 구절은 정확성을 상실했다는 식으로 비판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의학적으로 “혈한증(hematidrosis)”이라 불리는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데 사람이 심하게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아주 심하게 받으면 땀샘에 있는 모세 혈관을 파괴하는 화학 성분이 몸에서 나와 땀샘으로 피가 들어오게 되어 땀을 흘릴 때 피가 섞여서 나오는 현상입니다.
이렇게 교리와 성약과 몰몬경에서는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나오는 피가 받으신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묘사해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혈한증이 일어나게 되면 피부가 약해진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 예수께서 로마 군인들에게 채찍을 맞으실 적에 피부가 얼마나 민감해져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채찍은 땋은 가죽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에 쇠구슬이 박혀 있어서 한 번 휘두르면 구슬 때문에 깊은 상처나 멍이 생기고 채찍질이 계속 되면 상처난 곳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이 박혀 있어서 살이 심하게 찢겨서 나가고 척추의 일부가 드러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태형을 당하게 되면 저혈상 쇼크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많은 양의 피를 흘리고 나서 고통을 겪게 되는 현상인데 협압이 떨어지고 사람의 정신이 멍혀져 기절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신장은 피의 양을 유지하기 위해 소변을 만드는 일을 중지하고 몸은 흘린 피를 보충하기 위해 액체를 요구하기 때문에 매우 목이 마르는 현상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모사이야서 3:7에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과 육신의 고통, 주림, 갈증과 피로를 겪으리니,”라고 말했으며 십자가에 못 막히실 때도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요한 19:28)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손과 발이 못박히기 전에 이미 위독한 상태에 빠지셨습니다. 즉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당하신 그 속죄는 겟세마네 동산에부터 시작되었으며 십자가로 이동하시면서 겪으신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이어졌고 부활에 이르는 전 과정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베드로전서 2:24)
예수께서 채찍에 맞으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얻었노라고, 다시 말해 흠정역에는 이를 ye were healed 라고 하여 치유함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고대와 현대 경전을 통해서 속죄의 과정과 그 의미가 분명해 졌으며, 감히 인간의 말로 묘사할 수 없지만 속죄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히 알게 되었기에 사도 바울의 다음 고백처럼 우리 스스로를 위하여 살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 죽었다고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 살아야 겠다는 목표가 분명하게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