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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 정통한 자란...

모로나이 2017. 10. 12. 01:40

 

 

몇 년 전에 장로교 전도사라는 분과 토론을 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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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면서 자신은 성령을 통해 성경을 통달했다고 자부하던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유투브를 통해서 이단 강의를 하면서 자신의 성경 실력을 뽐내고 있던데 상당히 독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은 성경에 대해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 사람이 이단으로 생각하는 모든 단체나 사람들에 대해 상당히 비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를 들먹이면서 그것도 이해 못한다면서 무슨 신앙을 하느냐며 혀를 차면서 자신의 수준과 맞지 않는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먹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과연 이 사람은 각 영혼에 대한 사랑과 걱정이 있는 것일까? 아님 자신의 지식을 드높이려는 것일까??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너무나 강하게 느꼈던 것은 성경에 대해 아무리 정통한다 한들 그 안에 사랑이 없고(고전 13:1,2) 성령의 열매(5:22,23)를 맺지 않으면 그가 갖고 있다는 그 지식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 8:1에 나온 것처럼 오히려 그런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사탄은 얼마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정통했겠습니까? 금식하신 이후의 예수님을 유혹할 때도 그는 성경을 사용할 정도로 경전에 해박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갖고 있던 영광과 지식을 너무나 신뢰한 나머지 아버지의 계획이 아닌 자신이 세운 독선적인 계획대로 하려 했으며 아버지의 영광마저 요구한 나머지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받게 된 것 아닙니까? 야곱서에 나온 시렘(야곱서 7:3,4)의 경우도 유식하여 백성들의 언어를 완전히 알았고그것을 근거로 백성들의 마음을 이끌어 내었지만 결국 그 결과는 비극으로 맺었습니다. 이처럼 경전은 지속적으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8)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경전에 정통하다는 이들이 이러한 교만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서로 대조하여 설명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니” (누가 18:11,12)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철저한 자였으며 경전에 해박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위에 기도장면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자신이 지키는 하나님의 계명과 그분에 대한 지식이 결국 자신을 다른 이들과 구분 짓게 만들고 오히려 자신의 의를 세우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데 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이런 식으로 점차 자신을 드높이게 되며 그런 표준에 이르지 못한 이들에 대해 자신이 그와 다름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까지 드리게 됩니다.

 

이와 달리 세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 18:13)

 

그는 자신의 의가 보잘 것 없음을 인식하여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14)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아무리 철저하게 계명을 지키고 경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의롭다고 여겨주지 않으십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과연 이 비유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진실로 경전에 정통한 사람이 누구일까하고 말입니다. 누구나 이 질문에 대해 당연히 바리새인이 경전에 정통하지 않겠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경전에 대해 정확한 의미에서 정통한 이는 과연 누구일까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면 바리새인보다는 오히려 세리가 더욱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세서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가 사는 세상을 보고 그 세상의 종말과 현재 지음 받고 또 지음을 받았던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보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모세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직접 보고 통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 모세가 느꼈던 것은 나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너희들과 달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0절에서 그는 이제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사람이 아무것도 아님을 아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깊은 비밀을 알게 된 그는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마치 예수께서 말씀하신 세리처럼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달라고 탄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이더서에도 나옵니다.

 

만일 사람들이 내게로 오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일 것이라.” (이더서 12:27)

 

경전을 통해서건, 기도를 통해서건 진실된 의미에서 예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처절하게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모세처럼 나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며 세리처럼 저를 불쌍히 여겨줍소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실로 경전에 정통한 자란 경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것이 아니라 경전을 통해 자신이 무익한 종임을 깨닫고 더욱더 겸손해 지는 자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드높이기 위한 경전 지식은 영적인 의미에서 독이 될 뿐입니다. 그런 독에 중독된 자들은 빨리 그 독을 빼내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 경전을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1:21)

 

예언이 담겨 있는 경전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은 영의 감동을 입은 경전에 정통한 자들은 영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22,23)

 

그렇기에 저는 아무리 경전에 정통했다고 하여 신학적인 용어를 남발하고 성경의 이 구절 저 구절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도 그 속에 한 영혼에 대한 사랑이 없고 오래 참음이나 충성, 절제와 같은 영의 열매를 맺지 않은 이들을 볼 때면 성경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이 과연 그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을까 생각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