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와 교리/사후세계

죽은 자들에게도 의식이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들.

모로나이 2010. 5. 26. 08:30

죽은 사람과 잠들어 있는 상태의 유사성 때문에 몇몇 문화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고대 유대인들 역시 다를 것이 없었고 심지어 예수께서도 이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 이에 그분의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그가 잠들었으면 좋아지리이다, 하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으되 그들은 그분께서 잠들어 쉬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줄로 생각하니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분명하게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요한 11:11-14)


그래서 몇몇 이들은 “봐라 죽는 것을 잠에 비유하지 않았냐? 잠을 자면 의식이 없듯이 죽은 자들에게도 의식이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두가지 다른 사물이나 생각, 혹은 상태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드러낼 때 사용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잠이 아니긴 하지만 분명 유사성이 존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은 지상을 떠난 영과 잠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떠난 육신과 잠든 상태 사이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었을 때 몸은 눕게 됩니다. 눈은 감기며 심장과 호흡이 멈춥니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잠이 들 때 몸은 눕고 눈을 감으며 심장 박동과 호흡은 느려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든 상태의 모습과 실제 죽은 사람의 모습이 유사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잠을 자면서 무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죽은 자의 몸 역시 무의식의 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잠으로 비유하는 사례가 인간의 육신과 관련하여 사용된 경우가 여러 군데가 됩니다. 예를 들어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잠자는 자들 중” (다니엘 12:2) “다윗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의 도시에 묻히니라” (열상 2:10), “자기 세대를 섬기다가 잠들어 자기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보았으나” (사도 13:36)“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태 27:52)와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잘 보면 알겠지만 “잠자는 것”과 관련하여, 땅의 티끌, 묻히다, 썩음을 보다, 무덤...등 육신과 관련한 표현과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잠과 관련된 표현은 육신을 떠난 영과 관련해서는 단 한 차례도 사용된 바가 없습니다. 다시금 기억하십시오.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육신이지 영이 아닙니다. (창 3:19, 전도서 12:7 참조)


그럼 사람이 죽으면 계속 삶을 이어갈까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들을 설명하겠습니다.


1. 사람이 죽으면 우리가 날아간다.


“우리의 햇수의 날들이 칠십 년이요, 강건하면 팔십 년이라도 그 햇수의 위력은 수고와 슬픔뿐이니 그 위력이 곧 끊어지매 우리가 날아가 버리나이다.” (시편 90:10)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우리의 육신에 거했던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는 우리(고후 5:1-6)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죽자마자 우리의 영은 육신을 떠나 “날아가 버리게” 됩니다. (전도서 12:7 참조)


2. 바벨론 왕의 죽음


“밑에서 나온 지옥이 네가 오기 때문에 너를 맞이하려고 너로 인해 움직였으며 지옥이 너로 인해 죽은 자들 곧 땅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일으켜 세우며 민족들의 모든 왕들을 그들의 왕좌에서부터 일어서게 하였으므로 그들이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처럼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네 영화가 무덤으로 내려갔으며 네 현악기 소리도 그러하도다. 벌레가 네 밑에 퍼져 있고 벌레들이 너를 덮는도다.” (이사야 14:9-11)


죽은 사람의 육신에는 의식이 없고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구절에 나오는 땅의 모든 우두머리들은 곧 육신을 떠난 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 바벨론의 왕은 곧 이들처럼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영은 지옥에 모일 것이며 육신은 무덤 속에서 벌레들에 의해 덮혀 있게 될 것입니다.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누가 16:19-31)


죽은 자의 육신과는 달리 이 비유에서는 몸을 떠난 영이 생각하고 느끼며, 심지어 필멸에서의 삶을 기억하는 등 감정적이고 지적인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의 영이 죽음 이후에도 살아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죽음 이후의 삶을 살아있고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들은 이 비유가 특정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사용된 비유(허구)라는 이유를 들어 죽음 이후의 삶 교리가 거짓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전도서 9:5,6,10절와 시편 146:4를 언급하며 “죽은 자들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며, 생각을 하거나 느낄 수 없다”는 그들의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 자체는 그릇된 전제를 기초로 한 것입니다. 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전도서 9:5,6,10절와 시편 146:4는 죽은 자의 육신을 말하는 것이지 이 비유에서 나오는 죽은 자의 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죽은 자의 영이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언급한 구절은 없습니다. 게다가 이 비유가 말 그대로 허구일지라도 예수의 모든 비유들은 실제 일어났거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왜 이 비유는 실제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지도 않은, 사탄의 가르침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믿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그릇된 교리를 근본으로 하여 어떤 가르침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만에 하나 예수께서 거짓된 교리를 근간으로 가르침을 주어 사람들에게 혼란과 기만을 초래할 경우

이는 그분의 신성한 성품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 (벧전 2:22)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 (고전 14:33)


예수님은 그 입에 교활함이 없으시며 혼란을 일으키는 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사용하신 비유가 거짓된 사상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주장하는 것은 그분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 자체는 비유이며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것은 아니지만 근본 배경인 죽음 이후의 삶을 명확하게 드러낸 비유라고 봐야 합니다.


4. 강도에게 주신 예수님의 약속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누가 23:43)


같은 날에 예수님과 강도는 죽었으며 그 날에 낙원, 즉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의 몸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영혼 불멸 사상을 끝까지 사탄의 것으로 몰길 원하는 몇몇 단체에서는 구두점을 바꾸어 “오늘 내게 네게 이르노니,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또 어떤 단체에서는 여기서 말하는 ‘낙원’을 지상 낙원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성경 곳곳에서 등장하는 죽음 이후의 삶을 지지하는 다른 성구들에 비추어 별다른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5.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로운 자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것은 그분께서 육체 안에서 죽임을 당하셨으되 영으로 말미암아 살아나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가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또한 영으로 말미암아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사 선포하셨는데 이 영들은 노아의 날들에 방주를 예비하는 동안 곧 [하나님]께서 한 번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불순종하던 자들이라. 방주 안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자가 몇 안 되니 곧 여덟 혼이라.” (벧전 3:18-20)


그리스도께서 영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이 구절만을 봐도 죽은 자들에게는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같은 장에서 몇 구절이 지난 다음 사도 베드로는 이 구절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죽어 있는 자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나니 이것은 그들이 육신으로는 사람들을 따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벧전 4:6)


죽은 자들에게 의식이 없다면 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것일까요?? 복음을 전했다는 말에는 그것을 듣는 자들에게 의식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6.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할진대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침례를 받느냐?” (고전 15:29)


바울은 부활에 대한 그의 논증을 지지하기 위해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를 소개했기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울 역시 이를 분명한 의식으로 보았다고 봐야 합니다. 죽은 자들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회개할 기회가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대신 침례를 받았던 것이지요.


7.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이 가지고 있는 소망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거짓 증인으로 드러나리니 이는 우리가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다고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였기 때문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분께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지 아니하셨느니라. 만일 죽은 자들이 일어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느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고전 15:16-19)


혹자들은 “멸망하였다”는 구절을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고 있는 자들이 무존재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멸망하였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apollumi “잃어버리다”는 의미로 해석이 됩니다. 이 동일한 단어가 다른 구절에서는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가 그 중의 한 마리를 잃어버리면(apollumi)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남겨 두고 잃어버린(apollumi)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15:4)

“또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개가 있는데 그녀가 한 개를 잃어버리면(apollumi) 등잔불을 켜고 집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그녀가 그것을 찾은즉 자기 친구와 이웃들을 함께 불러 이르되, 나와 함께 기뻐하자. 내가 잃어버린(apollumi)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 15:8,9)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과 은전은 잠시 동안 잃어버린 바(apollumi) 되었습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바가 되었다 하여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였지요.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 안에서 잠자고 있는 이들 역시 잃어버린 바 되지 무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였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들어 있는 자”에 대해 언급한 다음 “만일 우리가 이 세상 삶을 사는 동안에만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갖는다면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가장 비참한 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문장에서 보시면 아시겠지나 바울은 부활 이후의 삶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에 대해 언급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삶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활 하기 전, 다시 말해 죽은 다음의 세상에서도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진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 모두는 가장 비참한 자가 되는 것이지요.


8. 의로운 자의 영혼



“오직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와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총회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교회와 모든 것의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 (히브리 12:22-24)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이란 표현에 집중해 보십시오. 여기서 표현된 “영들”이란 복수형으로 단순히 생명력이나 에너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들은 죽음 이후에도 개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운 영이란 말 제체에서도 우리는 그들만이 가진 특성을 염두에 둘 수 있으며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도 의로울 수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영들은 다른 인격체, 즉 천사들과 하늘의 교회,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언급되어 있습니다.


9. 바울의 시현


바울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확히 기록하였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빌립보 1:23,24)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고후 5:8)


게다가 바울은 우리 몸을 떠난 인격적이고 의식적인 존재가 있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경험을 기록하였습니다.


“자랑하는 것이 물론 내게 유익하지 아니하나 내가 [주]의 환상들과 계시들로 나아가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러한 사람을 알았노니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 (고후 12:1-4)


정말 죽은 이후의 아무런 것도 없다면, 그리고 바울이 그것을 알았다면 셋째 하늘과 낙원으로 올라간 사람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몸 밖에 있었는지 안에 있었는지 말할 수 없다”고 표현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몸에 의식적인 존재가 없다면 애초부터 이런 표현을 사용할 리가 없습니다. 이런 경험이 환상이거나 실제이거나, 혹은 꿈일 수도 있다 쳐도 바울은 몸 밖으로 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듣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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