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패컴 변호사의 글을 읽어 보고 개인적인 느낌을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과연 교회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했는지, 그것이 제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1. 아무 생각 없이, 의심 없이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로봇이 되게 만드는가…
의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지요? 방법론적인 의심과 병적인 의심. 방법론적인 의심은 말 그대로 진실을 추구하는 방법 중에 하나로 건전하고 인생을 보다 확고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요.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으로 시작하는 것이 모든 진리 추구의 시작단계입니다. 의심을 통해서 결국에는 확고한 진리를 발견하고 처음의 의심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의심이 없다고 한다면 저 역시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방황할 이유도 없었고 이 교회에서 신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적인 의심은 어떠한가요? 무턱대고 의심부터 하는 겁니다. 의처증처럼 조그마한 행동에도 자신의 상상과 덧붙여서 의심부터 하지요. 증거가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지 않으면 무조건 조작론입니다. 자기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사실을 근거로 전체가 거짓이라고 의심부터 합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에 거짓이라고 의심합니다. 의처증이 어떻습니까? 아내의 조그마한 행동에도 전부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고 모든 행동거지가 다른 남자와 놀아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다가는 극단적인 방법도 행하게 되지요. 욕설과 구타. 의심이 결국에는 지나친 감정의 폭발로 진행되어 갑니다. 과연 어떠한 의심을 가져야 할까요.
이러한 병적인 의심을 갖지 않고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것이 과연 로봇과 같은 것일까요? 길을 지나가다가 건설장에 “접근금지. 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라는 글을 보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고 다가가지 않는 것이 현명하겠습니까 아님 “저건 다 수작이야…안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나 감추는 것이 있어서 하는거야” 라고 의심하면서 다가가는 것이 현명할까요? 이러한 선택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로봇은 그런 선택을 할 수가 없지요.
어떤 분들의 지적처럼 모든 의심은 잘못된 것이며 그저 위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아멘아멘 하면서 받아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
2. 성적인 죄
성적인 죄에 대하여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요? 우리 몸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며 생식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성한 것으로 단순히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즐기도록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잣대가 그 어떤 이론을 들먹여 정당화한다고 하여도 이 부분만큼은 확고 불변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러한 죄를 저지르거나 유사한 행동을 했을 적에는 무조건 정죄부터 하고 죄책감을 느끼도록 유발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로 잘못된 것임을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합니다.
저는 교회를 다니기 전부터 이러한 순결의 법에 대하여 높은 가치를 두고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교회에 다니면서 몸이 참으로 신성한 것임을 바르게 배우고 생명의 귀중함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3. 침례의 필요성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전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교회에 와서 바르게 배울 수 있었고 침례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약속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맺은 침례 성약은 제 인생의 지침이 될 것이고 약속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금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약속의 소중함에 대해서 배울 수 있고, 특별한 의식을 통해 제 자신을 보다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4. 신성한 결혼
저는 예전 결혼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고 가족을 꾸민다는 것은 부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유롭게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었겠지요. 그러나 교회를 통해서 결혼의 소중함을 배우고 가족이 지상의 천국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욱 행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어떻게 행해야 할 지를 배울 수 있는 훌륭한 기회가 되었습니다. 성전에서의 결혼이란….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결혼 개념으로서 아내를 사랑함에 있어 영원의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죽어서도 영원히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개념은 가족의 유대를 더욱 돈독하게 만듭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가족을 그 어느 누구보다도 사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이 교회의 가르침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요? 저희 부모님은 교회 회원이 아니고 우리 교회를 적대시하지만 그분들을 존경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게 만든 것이 바로 교회의 도움입니다.
4.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저는 교회에서 인종 차별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 인종과 정치적인 차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배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의 자녀라는 사실은 모든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게 만드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세에서 누가 용감했고 비겁했는지….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결국 지상에 내려온 자들은 모두 전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정한 선택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지도자들의 발언은 그대로 시대를 반영한 개인적인 의견일 뿐입니다. 그들의 발언은 내 신앙과, 내가 그 동안 배워온 것들과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배워온 것들은 경전에 기록된 “원리”들이며 그것은 내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원리를 몰랐다면 아마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종이나 종교, 국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 편협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음에 감사 드립니다.
5. 십일조
십일조가 하나님의 계명이건 그것을 떠나서 십일조를 낼 때 돈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으며 내가 사랑하는 단체를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이 특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렇게 낼 돈이 있다면 가난한 아프리카 난민을 도와주겠다고….그러나 저는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여…그대들은 과연 수입의 얼마나 되는 돈을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하고 있는가?? 그대가 버는 수입 한도 내에서 얼마나 되는 돈이 세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가…그것을 서로 비교해 봤을 때 상대방을 향하여 불평의 소리를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솔직하게 자신을 평가해 보라…고 말입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이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세상적인 논리로 이해될 수 없는 진리를 배울 수 있으며 자원하는 마음이 풍부해 집니다. 그 돈의 일부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십일조로 운영된다고 생각하고, 가난한 국가들을 비밀리에 돕고 있는 것은 그 중에 극히 일부만 생색을 내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 이러한 편협한 시각을 갖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도 십일조의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난한 상태에서 돈을 내는 것….실제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바치고 너무나도 힘들어 한다면 교회에서 지원을 해줍니다. 십일조는 돈의 문제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단순한 의무감에 가족들 고생시켜가면서 십일조를 낸다면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다른 교회나 단체처럼 툭하면 돈을 요구하지 않고 수입의 십분의 일만 다시금 주님께 돌려 드리는 십일조가 제게 있어 얼마나 큰 특권이며 기쁨인지 모릅니다. 결국 그 돈이 내게로 돌아오니까요…교회를 지원함과 동시에 자신에게 유익이 되니…..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저를 보다 나은 사람이 되도록 끝임 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약과 같은 것일 지도 모르지요. 현실과는 무관한 환상. 그런데 마약과 같이 그것은 저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를 세워주고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기쁨을 줍니다. 내가 맛본 것이 너무나 달콤하기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내가 맛본 것들이 다른 사람들 입맛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나의 입맛을 상대방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즐기는 입맛이 있을 테니까요.
이와 마찬가지로 특정 원리들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기쁨과 행복을 주나 다른 사람에게는 고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그 원리 자체를 독약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지요. 나에게 맞지 않으면 독약이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환상을 유도하는 마약이라 규정하는 것. 이것이 객관적인 시각인가요??
그저 입맛의 차이라고 합시다. 그것은 실제 음식과는 무관한 내용입니다. 정말 맛있고 건강한 음식이라 해도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먹으면 독이 될 수 있겠지요. 제겐 정말 살이 되고 뼈가 되는 진귀한 만찬입니다
'개인적인 글 > 개인적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회를 떠난 자들을 볼 때... (0) | 2007.07.07 |
---|---|
몰몬(후기성도)이 교만하다고 하시는 분께... (0) | 2007.06.29 |
박노자 교수의 글 중에... (0) | 2007.06.23 |
복음의 원리를 가르치라.. (0) | 2007.06.15 |
몰몬교 선교사가 가르치지 않는 것...을 읽고서... (0) | 2007.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