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종교 사이에 갈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 속에서는 그러한 갈등이 없지만 때로 인간의 마음 속에는 발생하곤 합니다.”
(헨리 아이어링 박사,20세기 화학 발견 중 가장 중요한 이론 중 하나인 절대반응속도론(the Absolute Rate Theory)의 발견자)
많은 사람들은 후기성도의 가르침과 과학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모순적인 관계로 단정을 내리곤 한다. 다시 말해 후기성도의 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요소들은 현대 과학적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조론이라던지 몰몬경의 DNA문제, 성신의 느낌을 통한 진리의 인식 등 현대 과학이 밝혀낸 이론이나 방법론과는 서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기성도들에게 있어 과학적 사고란 교회 지도자들이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경우 “악”으로 단정하며 무시하거나 거짓된 이론으로 폐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뭐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인식할 수도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고 가르침 받아온 바에 따르면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실 많은 부분에 있어 후기성도들의 과학에 대한 개념들은 다른 개신교회의 주장보다 더욱 열려 있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떤 “특정한 법”에 따라서 만물을 운영하신다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하늘에서는 변경할 수 없이 정해진 율법이 있어서 그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 “특정한 법”을 과학적 원리와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고와 모순되이 보이는 것들도 결국은 우리 현재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과학적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과학적 이론은 계속 변하고 있다. 19세기에 “참”으로 여겨졌던 과학적 이론들이 21세기에 이르러 “참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 경우를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참”으로 여겨지는 과학적 이론들도 시간이 지나고 추가적인 정보가 발견됨에 따라 충분히 수정될 수 있다고 예상하는 것은 지극이 당연하다. 물론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봐라 과학은 불완전하다고 깍아 내리면서 종교적 이론은 변함없다고 우기는 것 아닌가?”라는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말길 바란다. 다른 과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기 보다는 현재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니까. 후기성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가적인 정보가 계속 발견됨에 따라 이해의 틀도 넓어지고 지적인 의미에서 보다 성숙해 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 밝혀질 것임을 말씀하셨다.
“그러하도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가 오는 그 날에 그는 그 모든 일을 드러내리니 지나간 일들이나,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였던 감추어진 일들이나, 땅의 일들, 무엇으로 땅을 만들었는지와 그 의도와 목적을 지극히 귀한 일, 위에 있는 일과 아래에 있는 일, 땅 속과 땅 위와 하늘에 있는 일들을 드러내리라.” (교성 101:32-34)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는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이나 무엇으로 땅을 만들었는지와 같이 명확하지 않았던 것들이 온전히 밝혀질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 알지 못하는 것들로 인해 조급해 하거나 불편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역사를 보면 교회 지도자들이 계시로서, 혹은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을 임의적으로 판단해서 주장한 경우가 있긴 하다. 과학적 견해에 대해 그들 각자의 생각을 근거로 말한 경우가 몇차례 있긴 한데 불행하게도 그러한 발언들이 참된 선지자를 구분하는 근거로 사용되어 몇몇 의문을 낳기도 하였다.
우리는 과학과 복음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의 목적은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 즉 물리적 세계를 연구해서 현상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데 있다. 이와는 달리 복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들을 다루며 신앙을 통한 구원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때로 과학적 지식은 하나님의 질서와 그분의 지혜를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풀어놓은 것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더 돈독하게 하기도 하나 때로는 과학적 지식이 신앙을 파괴하는데 작용하기도 한다.
사실 신앙이란 때로는 물리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모순되어 보이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렇기에 신앙을 명확한 근거, 증거를 근거로 한 확신이 아니라 단순한 이론에 매달려 있는 나약하고도 처절한 몸짓으로 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은 과학과 신앙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과학적 지식을 넘어선, 어떤 실체를 행하도록 우리에게 격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앙을 행사한 이후에 우리는 분명한 증거를 얻게 되고, 그것은 곧 사실에 근거를 둔 지식이 된다.
“또 이제 나 모로나이는 이 일에 관하여 얼마간 말하고자 하노라. 내가 세상에 보이고자 하거니와 신앙이란 비록 보이지 아니하나 바라는 것임이라. 그러므로 너희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이를 논박하지 말지니, 너희의 신앙이 시련을 겪기까지는 너희가 증거를 받지 못함이니라.” (이더서 12:6)
이 구절에서는 분명 신앙이 시련을 겪고 나서야 “증거”를 받게 되는데 그 증거는 바로 하나의 명확한 지식으로 자리잡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야렛의 동생의 경험을 살펴보자.
“또 이 사람의 지식으로 인하여 저에게는 휘장 안을 바라볼 수 없도록 금할 수 없었나니, 이에 저가 예수의 손가락을 보았으며, 이를 저가 보았을 때 저가 두려움으로 엎드러졌으니, 이는 그것이 주의 손가락인 줄을 저가 알았음이라. 이에 저가 더 이상 신앙에서 그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알았고 아무것도 의심하지 아니함이었더라.” (이더서 3:19)
야렛의 동생이 충분히 신앙을 행사하고 나서 그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곧 의심할 필요가 없는 “지식”으로 발전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는 그는 “알았다”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다시금 정리해 보자. 후기성도들은 종교를 위해 과학을 버리도록 요청받지 않았다. 많은 후기성도들은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신앙을 잃어버릴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과학적 지식이 계속해서 업데이트될 것을 알고 있으며 복음에 대한 지식도 계속 발전할 것임을 믿는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발전한다는 말에 대해 오해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이에 대해선 나중에 언급하도록 한다.)
이는 신앙개조 9항에서 알려주는 바와 같다.
9.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계시하신 모든 것과, 현재 계시하시는 모든 것을 믿으며, 앞으로도 그분이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많은 위대하고도 중대한 것들을 계시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하신 방법에 대해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만 계시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언젠가 이 모든 것들이 명확하게 알려질 것임을 믿는다. 그 때까지 우리는 계속 과학적 지식을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명확히 알게 될 그 때”를 위해 신앙을 가지고 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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