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와 교리/몰몬경

몰몬경 번역 과정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들..

모로나이 2013. 8. 1. 23:09

 

 

 

 

 

 

 

 

후기성도들은 조셉 스미스가 몰몬경을 하나님의 권세와 은사로 번역하여 이 세상에 내놓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권세와 은사로 번역했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인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에 대해 많은 추측들을 해왔다.

 

실제 1831년 연차대회에서 조셉의 형인 하이럼 스미스는 조셉을 초대하여 몰몬경이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는지 더 많이 알려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 때 조셉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몰몬경이 어떻게 출현했는지 그 모든 세부점들에 대해 세상에 알리려고 의도된 바가 없습니다.” (교회사 1:220)

 

사실 그는 몰몬경의 번역 과정보다는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그래왔던 것처럼 사람들은 어두운 하늘을 밝히는 달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가 갖는 의미보다는 그가 매달린 십자가 형상을 마치 부적이나 신성한 사물인 것처럼 사용하지 않나 심지어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왔을 때 덮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토리노의 성의에 마치 성스러운 힘이 담긴 것처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이와 같이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본질보다는 그 본질과는 별 관련이 없는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극대화하거나 마치 그것이 본질의 참된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인 양 굴어왔다. 이는 몰몬경에도 적용되는 부분이다. 몰몬경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그 책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 보다는 그 몰몬경이 번역되었다는 금판의 재질 여부를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떠들기에 급급하다. 또는 몰몬경이 번역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급 관심을 가지고 또 이래저래 말이 많다. 아마도 조셉 스미스 시대에도 이와 비슷한 논의가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하이럼 스미스가 조셉에게 직접 몰몬경이 번역되는 과정을 보다 상세하게 알려주어 성도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셉은 이에 대해 그저 몰몬경 출현에 대한 세부점들을 세상에 알리려고 의도가 없다.”는 말로서 종지부를 찍어 버렸다. 혹자는 이에 대해 조셉이 무슨 꿍꿍이가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곤란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도들이 자꾸만 몰몬경 속에 담긴 구원의 메시지보다는 그 외부적인 점들, 즉 번역 과정이나 금판과 같은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열의를 보여 애초에 그 부분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셉은 그저 몰몬경을 번역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해석기에 대해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사와 권세로 작동한다라고 만 언급했 (타임즈 엔 시즌스,184231)을 뿐 구체적인 작동 방법에 대해서 언급한 바가 없다.

 

실제 교리와 성약에서도 몰몬경 번역과정에 대해 단지 다음과 같이 언급할 뿐이다.

 

또 니파이인의 기록을 받은 후에, 참으로 나의 종 조셉 스미스 이세가 하나님의 자비를 통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써 몰몬경을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하려 함이요,” (교성 1:29)

그리고 하나님이 네게 시력과 능력을 주사 번역하게 하신 것을 네가 넘겨주었을 때, 너는 성스러운 것을 사악한 사람의 손에 넘겨 준 것이니," (교성 3:12)

미리 준비된 방편으로 높은 곳에서 그에게 능력을 주어 몰몬경을 번역하게 하셨으니,” (교성 20:8)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몰몬경이 하늘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으로 번역된 것임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 구체적인 과정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 은사로 번역된 몰몬경에 기록된 것들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그 속에 담긴 가르침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미 여러 통로를 통해 알려졌겠지만 몰몬경을 번역하는 과정을 비교적 상세하게 묘사한 몇몇 이들의 증언들이 있다. 예를 들어 조셉의 아내였던 에머 스미스는 1879년 자신의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네 아버지를 위해 글을 쓸 때 나는 종종 날마다 글을 (받아) 썼지. 나는 자주 네 아버지 옆에 있는 탁자 앞에 앉고 네 아버지는 돌멩이가 들어 있는 모자 속에 얼굴을 묻고 수 시간을 받아 적게 했지. 우리[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에머 비다몬 스미스 인터뷰, 1879, VogelEarly Mormon Documents, 1541)

 

즉 에머 스미스의 묘사에 의하면 몰몬경 번역은 조셉 스미스가 돌멩이를 모자 속에 넣고 빛을 차단한 상태에서 그 모자에 얼굴을 묻고 보이는 것들을 서기를 통해 받아 적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틴 해리스, 올리버 카우드리, 데이비드 휘트머 역시 비슷한 증언들을 해왔다. http://blog.daum.net/ldsbae/10756126

 

 

 

 

 

 

내가 처음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번역하는 모습의 낯섦과 기이함에 놀라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와 능력으로 번역되는 과정일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해봤다.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특정한 일을 하실 적에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세가 애굽의 파라오 대왕을 설득하기 위해 막대기를 사용하여 뱀을 만든 것이나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의 에봇 위에 겹쳐 입은 겉옷인 휼패 주머니에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두 보석을 넣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대답하기도 했었다. 또한 요한 계시록을 보면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신(요한계시록 1:6) 하나님께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계시록 2:17)라고 하셔서 흰 돌을 통해서 받는 자 밖에 알 수 없는 특별한 지식을 알려 주실 것임을 약속했다. 이처럼 조셉 스미스가 모자 속에 넣은 돌이 선견자의 돌이건 우림과 둠밈으로 불리는 니파이의 번역기이건, 아니면 몇몇 이들이 말하는 당시 점칠 때 사용하는 이건 간에 하나님의 권세로 인해 그분의 뜻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마태 16:18에서 말하는 교회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반석역시 베드로가 아닌 계시를 뜻하는 것을 보면 돌을 사용하여 그분의 뜻을 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일치성이 있어 보이지 않던가? 그렇기에 나는 돌을 모자에 넣고 사용하건 어떻게 하건 간에 몰몬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권세가 임할 때 얻게 된 그 결과물(몰몬경)에 초점을 맞출 때 사실 이런 낯선 번역 과정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교회에서 이런 사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며 마치 이런 모습이 몰몬경의 거짓을 증명하는 것인 양 떠들어 왔다. 사실 교회는 몰몬경 번역 과정에 대해 그림을 사용할 때 마치 그가 직접 금판을 보고 번역하는 과정처럼 그려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가지고 교회가 성도들을 기만한 것이라고 봐야 하나 아니면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사용된 삽화라고 봐야하는가에 따른 이해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본다. 사실 몰몬경 번역 과정에 대해 초반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는 그저 조셉 스미스가 니파이의 번역기(혹은 하나님의 권세)를 사용하여 몰몬경을 번역했다.”말이 핵심이었기 때문에 그에 따라 화가들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삽화를 그렸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번역이라고 하면 글자 대 글자를 생각하기 쉽기 때문에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실제 조셉이 금판 보고 몰몬경을 번역하는 그림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교회의 삽화 사용을 근거로 교회가 철저하게 회원들을 기만했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실제 교회는 몰몬경의 내용을 여러 그림을 통해 소개해왔는데 사실 그 그림은 화가의 상상력이 동원된 것일 뿐 실제 정확한 역사적 자료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실제로 우리는 올리버 카우드리가 세목격자의 증인으로 금판을 보기 전에는 몰몬경 번역할 때 금판을 실제 보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교회의 여러 출판물에서는 마치 올리버 카우드리가 조셉과 함께 금판을 직접 보는 것처럼 표현하는 그림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또 어떤 그림에서는 조셉과 올리버 사이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올리버가 금판을 못 본 것처럼 그린 것도 있다.

 

 

 

 

그럼 과연 어떤 것이 사실이란 말인가? 통일성도 없어 보이는 이런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는 몰몬경이 거짓이라고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아니면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할까?

 

 

이에 대해 예전에 어떤 분과 토론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은 삽화의 특징( 내용 이해 돕거나 보충 설명 위해 이나 신문, 잡지 등에 끼워 넣는 그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조건 역사적인 고증을

철저하게 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지 그렇지 않으면 전부 사기라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씁쓸하지 않은가? 그러면 과거 역사적 상황에 대해 그리면서 철저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은 전부 그림(혹은 조각)으로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예수님을 그린 성화를 보면서 저건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 아니야. 예수님의 모습은 당시 유대인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투박하고 검은 피부색을 가진 거친 목수여야만 해!”라면서 전부 부인하고 일반 성화들은 사람들을 기만하는 것으로만 봐야 할까? 아니 실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애초에 그림을 그리지 말았어야 했던가?? 그리고 과거 위대한 화가들이 그린 성화들 역시 철저하게 거부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요즘처럼 정확한 정보를 우선시한 정보화 사회에서 그림조차 역사적으로 철저한 고증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건 정말 삭막하지 않던가? 작가의 예술적 상상력은 전부 매장되어야 한다는 소리와 뭐가 다른가?

 

그렇기에 나는 교회에서 사용한 여러 그림들은 비록 철저하게 사실에 근거한 것은 아닐지라도 작가의 상상력과 회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특정한 부분을 강조해서 그린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림을 가지고 교회가 우리를 속였어!!”라면서 호들갑 떨면서 놀랄 이유는 없다. 오히려 나는 작은 돌멩이를 사용하여 그처럼 위대한 경전을 번역하게 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교훈을 배울 뿐이다.

 

나의 복음의 충만함이 연약한 자들과 단순한 자들에 의하여 세상 끝까지 그리고 왕들과 통치자들 앞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니라.” (교성 1:23)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7)

 

길거리에 널려 있을 흔하고 흔한 작은 돌멩이라 하여도 그분의 손에 쓰일 때 위대한 일들을 이룩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즉 이 복음은 연약하고 단순한 자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통해 전세계에 퍼지게 된다. 배운 것 없고 나이 어린 소년 조셉 스미스가 부름 받아 쓰인 것처럼, 경험 없는 어린 선교사들을 통해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처럼, 그리고 나와 같이 미약한 자가 그분의 사랑과 복음을 깨닫고 그분의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분의 지혜와 사랑에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몰몬경을 번역할 때 사용했던 그 돌멩이가 아무리 작고 사소해 보여도 하나님의 권세가 함께 했을 때 그 놀라운 기록들을 이 세상에 내놓는 도구가 되었던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서도 어떤 이들은 왜곡과 기만의 증거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사랑을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 같이 물을 마시는데 소는 우유를 내면서 독사는 독을 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