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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회의의 원인

모로나이 2013. 8. 11. 22:38

 

 

 

 

하나님을 믿되 열정도 없고 고뇌도 없고 불확실함도 없고 회의도 없고 때로 절망조차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믿는 것이다.”(매들린 렝글,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회의도 없고 절망조차 없는 이들을 우러러 보거나 절대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떻게 저런 믿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 나는 도무지 내 신앙에 확신할 수 없고 끝임 없이 회의가 드는데...난 정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일까? 누군가에게 깊은 속내를 드러낼 수도 없고 자신의 의문을 드러내면 다른 회원들에게 믿음 없는 자로 비추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하여 속으로만 묻어 두다가 결국에는 곪아 터져서 믿음을 버리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세계적인 연설가이며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부끄러운 것은 회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회의를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두 마음에서’, 1971년판 61페이지)

 

회의가 위험할 수 있지만 부끄러운 일이 아님을 그들은 모른다.”(‘회의하는 용기’ 27페이지)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용기 있게 자신의 회의를 드러냈을 때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질책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진짜 불신에는 절대로 반응하지 않으시지만 이런 아버지의 회의는 인정하시고 기도에 대한 응답과 아들의 치유를 통해서 그분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마가복음 9:14-27)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회의란 불신과는 다소 다른 개념임을 알게 된다. 굳이 구별을 하자면 회의란 두 세계 사이에 끼어서 긍정하려는 욕구와 부정하려는 욕구 사이에 걸려 갈등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회의란 회의가 아니라 불신일 뿐이다. 불신은 고민할 것도 없다. 그냥 이것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예수를 불신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침묵이나 질책을 하셨던 주님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 애원하는 아버지의 회의에 대해서는 귀를 기울이로 응답해 주셨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과연 이것은 사실일까...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회의에 빠진다면 그것을 남들에게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병든 아들을 둔 아버지치럼 자신의 믿음 없음을 도와달라고 주님께 간구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글에서 표현하듯이 신앙생활하면서 회의 한 번 안하면서 신앙하는 이들은 하나님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관념을 믿는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을 보면 상당수가 한 번쯤은 신앙적인 회의에 힘들어한 것을 볼 수 있다. 믿음의 조상이라 알려진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의 자손이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으면서도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지 않았던가. 조셉 스미스도 그처럼 놀라운 시현과 넘쳐흐르는 계시를 통해 축복을 받아왔음에도 리버티 감옥에서는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숨으신 곳은 어디입니까?”(교성 121:1)라고 기도하지 않았던가. 구약 성경 시편의 60% 이상은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부르짖음을 담은 탄식이다. 정말 진실로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르려는 자들에게는 회의가 찾아오고 그것은 더 굳건한 신앙을 위한 도약이 된다. 정말 하나님이라는 개념만 믿거나 그저 말로만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회의할 이유가 없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데 왜 굳이 그에 대해 고민하고 힘들어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있건 말건, 조셉 스미스가 참된 선지자건 거짓 선지자건 그냥 사람들 좋아서, 프로그램이 좋아서 교회에 다니는 이들이라면 이런 것들은 별 문제가 안되니 말이다.

 

나 역시 천성자체가 의심도 많고 하나둘씩 따지고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가 선택한 이 신앙에 대해서도 한 두 번 의심해 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갖고 있는 이 회의를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것 자체를 부끄러워한 적도 없다. 그래서 몇몇 이들은 내가 참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고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회의가 건강한 신앙생활의 징조라고 생각되었을 뿐 그렇게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왔던 것 같다. 몸에 문제가 있으면 당연히 그 사실을 알려주는 증상이 있어야 한다. 한센병(문둥병)이 왜 그토록 무서운 병이냐면 단순히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증상이 없기 때문에 불에 손을 대어도 뜨거운 줄 몰라 그냥 마냥 내벼려 두다 손에 심한 화상을 입고 결국은 병균으로 인해 썩어 들어가는 것이다. 정말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체라면 특정한 상황에 접했을 때 증상이나 그에 따르는 고통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이 나는 것이고, 음식을 잘못 먹었으면 배가 아픈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감기에 걸려도 기침이 안 나고 열도 안 나서 증상을 모르고 있다가 결국 치료하지 못해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이라면 특정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 회의라는 증상이 나타나게 된다. 음식을 잘못 먹어서 배가 아프다고 하는데 이게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니 만약 신앙생활을 하다가 회의에 빠지게 된다면 그냥 이를 속에 담아둘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요청하면서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신앙을 하다가 회의에 빠지게 되는 몇가지 원인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일반적인 경우는 다음 몇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개념

 

회의에 빠지기 쉬운 상태의 첫 번째 원인은 교리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는 선지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흔히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는 자들이니까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은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해라고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개념이다. 선지자는 선지자의 역할을 할 때만 선지자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불완전한 사람들로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울 수 있고 편견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선지자에 대하여 잘못된 개념을 갖고 있는 이들이라면 어느 날 인터넷에서 어떤 선지자가 이러이러한 말을 했다더라...그런데 이런 주장들은 훗날 거짓된 것으로 판명되었다..따라서 이 선지자라는 이는 거짓말쟁이다...라는 사실을 접하고는 충격을 받고 신앙적인 회의에 빠지게 된다.

또 다른 예가 있다. 십일조를 내면 하늘에서 축복이 쏟아진다고 배웠다..그렇다면 십일조를 충분히 내면 물질적으로 부유해 지겠구나...이런 생각을 가진 이가 십일조를 충실하게 내었는데 부자는커녕 물질적으로 힘들어진다..아 그렇다면 이 계명은 참되지 않구나...이런 식으로 회의에 빠지게 된다. 십일조를 통해 주어진다는 축복은 다만 물질적인 축복이 아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런 회의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교리에 대한 부정확한 이해가 결국에 신앙적 회의로 이어진다.

 

2. 감정적인 신앙

 

몰몬경이 참됨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 마음이 따스해지는데 이것이 성신의 느낌이다...성찬식 때 어떤 분이 눈물 흘려가면서 말씀을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나도 눈물이 났다. 이것은 교회가 참되다는 증거다. 태버나클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는데 그 위대하고 압도적인 장면과 음악에 압도되어 가슴이 찡해졌다...역시 교회는 참되다...어떻게 보면 이 모든 말들은 맞다. 실제로 성신이 임할 때 가슴 속에 깊은 감동이나 영향을 끼치니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모든 말들은 틀리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나 느끼는 따스하고 찡해지는 감정들은 단순한 감정 이입이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동화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찡해지는 모든 것들을 성신의 느낌이라 봐야 한다면 감동적인 영화나 음악회에 참석했을 때 느끼는 감정들 모두다 성신의 느낌이라 봐야 한다.

 

(몰몬경의 경우 읽고 기도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모로나이서 10:3절에 보면 너희는 아담이 창조된 때로부터 너희가 이 기록을 받게 될 때까지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셨던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너희 마음에 깊이 생각하라는 구절이 있다. 즉 주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셨는지를 기억하고 마음 속 깊이 생각(묵상, 연구 포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가운데 기도했을 때 응답을 받는 것이지 무턱대고 몰몬경 읽고 기도했을 때 느낌이 좋았다고 이를 성신의 느낌이라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교리와 성약 9편에서도 그저 간구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연구와 기도를 통한 간증과 단순한 종교적인 흥분(감정) 상태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현상의 문제점은 무엇이냐면 눈물을 동반한 감정이나 찡한 느낌 들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데 나중에 사람들은 이런 감정이 사라지면 자신의 신앙도 사라진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침례 받았을 때는 참으로 기뻤고, 말씀을 들을 때면 눈물도 나고 감동도 받았는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런 감정이 별로 일지 않았을 때 나는 간증을 잃어가고 있는가?”는 회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예배 시간 때 온갖 화려한 음악과 율동으로 차지하는 특정 교단에서 자주 보인다. 흔히 부흥회라고 부르는 곳을 가보면 비트 빠른 음악이 계속 나오고 여기저기서 주여주여 외치는 소리와 울부짖는 기도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동화되어 눈물 흘려가면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을 성령의 은혜를 받았다고 단정해 버린다. 나도 어린 시절 이런 모임들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 그 당시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형상과 비슷한 것을 보았고 며칠간은 기도할 때마다 입에서 알 수 없는 방언 기도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이러한 모습들이 참으로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으며 내가 분위기에 동화되어 이런 일들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실제 그런 황홀경에 빠진 이후에는 더욱 회의감과 허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주기적으로 부흥회를 열어 광적 분위기를 만들고 헌금을 걷는가 보다. 황홀경에 빠진 신도들은 평상시보다 더 많은 돈을 낸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에서 간증을 단순한 종교적 감정과 동일시할 경우 회의에 빠질 날이 온다.

 

 

3. 이면에 담긴 것을 감추기 위한 회의

 

실제 몇몇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 다른 이유를 들어 교회에 회의가 든다고 말한다. 즉 교회에 대해 연구를 해보니 도무지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자신의 양심상 이 모든 것들을 따르고 믿을 수 없다고...그래서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물론 이런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과거 이런 경험을 통해서 실제 회의에 빠져 교회를 떠나고 싶은 생각도 강했었으니...하지만...나의 경험이나 내가 겪은 몇몇 이들의 사례를 보면 인간이란 더 깊은 동기를 들키지 않기 위해 회의를 교묘한 형태의 방패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난 정말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판단하는 이들 모두를 싸잡아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이런 이들도 있고 나 역시 회의에 빠지던 당시를 정말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이런 증상이 종종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이런 형태의 회의의 가장 기본적인 예는 이렇다. 난 정말 지혜의 말씀을 지키기 힘들다. 사회생활하다 보면 술도 마실 수 있고 담배도 피울 수 있는데 이렇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황 때문에 괴롭다. 이 괴로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화를 시도한다. 이런 것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과거 구닥다리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왜 구시대적인 주장으로 인해 이렇게 힘들어 해야 하지? 교회의 주장은 단지 19세기에 주어진 것일 뿐 현재와는 관계가 없지 않을까? 그럼 뭐야...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표현은 시대착오적인 발상 아닌가?? 이런 식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는 과정 중에 교회에 대한 회의가 시작되는 것이다. 실제 이런 이유로 교회를 떠난 이들은 자기가 술, 담배 하고 싶어서 교회를 의심하고 떠난다는 말은 절대 안한다. 자신의 속내를 감추기 위해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표현은 현 포스트모더니즘과 맞지 않다는 식으로 그 이유를 댄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종종 그랬던 것 같다. 가끔씩 드는 회의의 원인 중에 아 이건 나와 맞지 않는데...”라는 순간의 갈등이 들 때가 있는데 그걸 내 자신의 감정적 원인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정말 교회의 이 가르침은 바른 것일까?”라는 식으로 연막을 피워 실제 원인에서 도망가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어 왔으니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분은 교회의 몇몇 역사적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교회를 떠난 이가 있었다. 도무지 이를 믿을 수 없고 혼란스럽다면서...그런데 조금씩 대화를 시도해 보면서 그 본질적인 원인을 찾아봤는데 교회를 비판하게 된 실제 원인이 교회의 이해할 수 없는 역사나 교리가 아니라 한 때 교회에서 사귀다가 깨진 여자 친구와의 갈등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교회 자매로 인해 상처를 받고 심한 분노에 사로잡힌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이란 그녀가 속해 있는 이 교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 중에 인터넷에 떠도는 몇가지 사항들을 마치 자신이 교회를 비판하는 원인인양 속내를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온다. 처음에는 교회의 이런 역사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더 깊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교회 회원들에 대한 험담으로 이어지면서 그들로 인해 자기가 받았던 상처들이 얼마나 큰지를 늘어놓게 된다. 처음에 교회의 역사로 인해 교회를 떠났다는 그분도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준 교회 자매들에 대한 험담과 막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자신의 속내가 뻔히 드러나고 있는 것도 모르면서...

 

이런 사례는 정말 많다. 교회 지도자나 회원들과의 의견의 차이로 인해 다투고 심적인 상처를 입게 되면서 교회를 점차 멀리하게 된 계기를 꼭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외적인 것들로 든다. 놀랍게도 대부분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 회원과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감추기 위한 또 다른 형태의 문제점들을 제시하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이 합리적인 이유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있다.

 

이처럼 자신의 개인적인 동기를 감추기 위해 합리적인 판단이란 미명의 또 다른 형태의 가면을 쓰고자 했을 때 회의가 든다.

 

 

이 외에도 몇가지 회의의 원인들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몇 가지들을 꼽아 보았다. 만약 자신 빠진 회의의 원인이 이 세가지에 포함되어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충분히 고칠 수가 있다.

    

 

   

 

(1) 교회의 교리나 가르침을 자신의 판단이 아닌 정확한 개념으로 배울 것

(2) 단순한 감정에 사로잡히는 신앙이 아니라 경전과 살아 계신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신앙생활을 할 것.

(3) 자신이 진정 회의하는 이유 이면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여 해결 할 것. 회원 간의 갈등인지 아니면 특정 계명에 대한 부담인지 분명히 하여 해결책을 찾을 것.

(4)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 주소서라고 부르짖었던 아버지의 모습처럼 간절하게 주님께 (혹은 주변 회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

 

 

이 외에 다른 문제점으로 인해 신앙적 회의를 하고 있다면 믿음의 도약을 위한 과감한 도전을 해보기를 권유한다. 우리가 간증할 때 말하는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단순한 입 발린 소리나 개념적 동의가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근거로 할 때 진정으로 나의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행하라 명하신 것들을 직접 행동을 함으로 진정한 지식을 얻으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요한 7:17)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시편 34:8)

 

하나님의 뜻을 직접 행할 때, 그렇게 해서 그분의 선하심을 맛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알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된다. 자신이 갖고 있는 회의가 혹시 그분의 뜻을 행함으로 그 기쁨을 맛보지 못해 나오는 영적 영양실조가 원인이 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