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질문을 가지고 있고 그 대답을 알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조셉 스미스가 첫번째 시현이라 불리는 영화로운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도 “무엇이 참된 교회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많은 계시들 역시 어떤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주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하면 주시리라”고 분명히 약속하였으며 몰몬경 마지막에 나오는 모로나이의 약속조차 “우리가 참 마음 참 뜻을 가지고 구하면” 성신의 권세에 의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의문에 대한 답변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현재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의 문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 이해하지 못하거나 불분명한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현재 우리가 보는 것은 희미한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하는 특별한 때가 올 때에는 분명히 “온전히 알리라” 는 것이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다. 아무리 선지자라고 하여도 하나님 알려주시지 않는다면 모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정직한 것이며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나름대로 선지자의 정의를 내리고서는 “선지자가 이것도 모르냐??? 왜 이것은 못하느냐??” 면서 자신이 내린 정의와 맞지 않는 선지자의 개념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경전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선지자들은 뭐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도 실수하고 어리석은 일을 하기도 하는 평범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뜻에 순종했고 그런 불완전한 자들을 주님은 사용하신 것이다. (고전
교회의 특별한 교리나 정책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아니 질문이 있다는 것은 그만한 애정과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애초부터 무관심하다면 질문조차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일부 반몰몬 사람들은 말하기를 후기성도가 진지한 질문을 던지면 대다수의 회원들과 지도자들이 그러한 질문을 불필요하고 사탄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비난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진지한 질문을 했을 때 그렇게 매몰차게 대응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물론 일부 회원들의 지나친 열정 때문에 그렇게 대응하는 경우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일반적인 후기성도들의 특징이라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전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건설적인 토론은 후기성도들의 특권이다. 물론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모를지 모르나 경전 전체에서 다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와 속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리고 각기 시대적인 차이와 역사에 대한 이해 측면을 다르게 해보았을 때 대부분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가능하다. 설령 그것이 교회 공식 주장은 아닐지 모르나 개개인에게 주어진 이해의 한도 내에서는 충분히 받아들여지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받고 있지만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은 바로 성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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