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따끔한 일침

적극적으로 토론을 했으면...

모로나이 2009. 7. 18. 02:29

우리 교회에서는 (물론 내가 보기에) 적극적 의미에서의 토론을 ‘논쟁’이란 누명을 씌워 놓고는 기피하는 현상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토론은 와드 평의회처럼 교회의 행정적인 면을 두고 토론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우리와 믿음을 달리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우리의 것들을 왜곡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과의 적극적인 토론을 의미한다. 물론 선교사업을 할 때를 보면 알겠지만 그저 비판만을 위한 비판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이 있긴 하다. 물론 그런 분과와는 더 이상 적극적인 토론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그냥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하나 무조건 침묵부터 지키고, 이건 논쟁이니 옳지 않아하면서 가만히 팔짱 끼고서 관망부터 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이방 사람 예배자들과 더불어 토론을 벌였고, 또한 광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날마다 토론하였다.” (사도 17:17)

“바울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을 벌이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을 설득하려 하였다” (사도 18:4)


사도 바울은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유대사람이나 이방 사람들, 그리고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토론을 하면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앨마서 11,12장을 보자. 그곳에는 앰율레크와 앨마가 “가장 노련한 자”(앨마 10:31)인 지에즈롬을 대상으로 토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에즈롬이라면 당시에 언변에 능한 자로서 온갖 궤변을 다 사용했을이였다. 그런 이에게 “논쟁하면 안돼”라는 이유를 들어 무조건 침묵으로만 일관했다면 과연 그가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 왔을까?


경전에 등장한 인물들이나 교회 초기 선교사들을 보면 담대하게 복음에 대해 토론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특히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가 부활하실 것임을 경전을 통해 “증명” (17:3)했을 때에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실제 신사적인 베레아 사람들은 바울이 말한 것이 참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 경전을 참조하고 실제 그 중에서 믿는 자가 많이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1절)

그럼 정말 우리들 역시 초기 선진들과 같은 태도로 적극적으로 경전을 사용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고 옹호하면서, 우리 시대에 팽배한 궤변으로부터 왜곡되고 폄하되는 복음의 원리를 수호해야 하지 않을까?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 3:15)


왜 그것을 믿느냐?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온유와 두려움으로 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경전을 사용하여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복음 원리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이들은 얼마나 될까?


교회를 반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수많은 자료들에 대해 “그런 것은 위험하니 보지 마라.” “의심하지 말고 기도해라.”와 같은 무심한 답변만을 줄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이미 복음을 옹호할 자로서의 태도가 상실된 것이라 본다. 나눈 우리 회원들이 안일한 태도로, 그냥 성도들 앞에서만 “복음이 참됩니다.”를 외치기 보다는 세상에 팽배한 무신론적 사상과 세상적인 사고방식들, 그리고 교회를 왜곡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폄하하는 이 적대적인 세상에 굳센 믿음의 방패를 들고 말씀의 검을 힘차게 휘둘 수 있는 그런 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