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따끔한 일침

이런 교회가 되었으면...

모로나이 2010. 7. 19. 00:18

난 요즘 들어 와드 내에 청소년, 독신 성인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이젠 청남 회장에서도 해임되고 독신도 곧 졸업할 때이니 괜한 관심을 가진다고 볼 수 있으나 교회의 미래를 책임질 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때로는 든든함과 함께, 답답함, 안타까움을 넘어서 가슴 속에 피멍까지 일기도 한다.


뭐 청소년들이야 스스로의 선택이 아닌 순전히 부모님의 결정에 따르는 신앙 생활인지라 그렇다고 쳐도, 이제 성인이 되고 스스로의 미래를 책임질 독신들의 영적 상태는 참으로 아쉽다. 물론 훌륭한 독신들도 많다. 그들의 열정과 헌신을 볼 때마다 큰 감사함과 함께 기쁨을 느끼며, 실로 그들로 인해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자극받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많이 배우고 성장해야 할 몇몇 이들의 모습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성찬식 모임은 가장 영적이며 경건한 시간이며, 모두가 영적으로 배불리 먹어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성찬식 시간에 주변을 둘러보자. 청소년의 경우를 보면 어떤 이는 잠자고 있고, 핸드폰으로 부지런히 문자(혹은 게임)를 날리거나, 심지어 MP3를 듣거나 소설 책을 읽는 경우가 있다. 오늘 같은 경우 2명의 독신 형제는 성찬식 말씀 중에 활동실로 나가 떠들고 있었으며, 또 어떤 형제는 밖으로 나가 어슬렁거리다가 폐회기도 할 때까지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연사는 부지런히 계명을 지켜야 하며,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전하고 있다.


나는 그러한 모습 속에서 왜 자꾸 성찬식은 교회의 젊은이들에 의해 외면당해야 하는 것인지 끝임없이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청년들의 영적 미성숙으로 그 원인으로 돌려야만 할까? 인간의 선택의지이니 그들이 하는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말을 잘못했다가는 상처받고 저활동 될 수 있으니 그냥 바라만 보고 시간이 다 해결해 주겠지, 선교사업 다녀오면 정신 차리겠지...라면서 방관만 하고 있을까?? 실제 상당수는 “관계가 원칙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따라 원칙에 따르는 강조보다는 그저 인간 관계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날카롭게 꾸짖고 그에 더하여 더 큰 사랑을 보이기 보다는 그저 오냐오냐, 부드럽게 하자..는 식으로만 일관하기 때문이 아닐까 본다.


물 론 나 역시 그저 지침서에 나와 있는대로 원리원칙대로만 하고, 융통성이라고는 전혀 없이 원칙만 따르는 방식은 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그저 청년들의 문제를 볼 때마나 무슨 무슨 교회의 프로그램만 만들기 위해 독신 성인들을 바쁘게 만들거나, 이런 저런 회의만 하면서 탁상공론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수십 시간 동안 회의를 한다고 해서 청년들이 변화하겠는가?? 천만에 말씀이다!!


우 습게도 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다양한 서적들을 찾아 읽어 보았다. 특히 “이 시대 청년들의 부흥은 힘들다”는 패배주의를 과감하게 도전하여 청년들이 주님께 헌신할 수 있도록 인도한 삼일교회의 전병욱 목사님의 서적을 즐겨 읽는다. 뭐 개신교회니까 사람도 많고 프로그램도 다양하고, 우리보다 개방적이라 청년들에게 더욱 호감이 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변명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실제 그 목사가 강조하는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원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즉 영혼에 대한 사랑의 눈물이 있는 강력한 말씀 선포, 목표 있는 열정적인 기도, 선교사업의 강조. 전병욱 목사는 항상 이 세가지를 강조하면서 예배에 목숨을 걸 때 청년들이 변화된다고 가르치며, 실제로 많은 청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고 열정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청년들을 가르치려고만 하지 말고 자극하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극은 말씀을 통해 그들의 상태를 지적하고, 그들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하여 헌신케 하라는 것을 말한다.


뭐 그것은 개신교회의 모습이고 우리는 다르니까......과연 이렇게만 볼 수 있을까?


최 근에 앨마서를 읽다가 앞선 언급한 원리와 동일한 것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 자신 그의 백성 가운데, 곧 니파이 백성 가운데 나아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여, 그들을 각성시켜 그들의 의무를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교만과 간교함과 그의 백성 중에 있는 모든 다툼을 끌어내리고자 함이었으니, 순수한 간증으로 그들을 압도하지 아니하고는 그들을 돌이키게 할 방도를 알지 못하였음이라.” (앨마 4:19)


죄 악이 교회에 들어와 교회의 발전이 방해받았을 때 앨마가 내린 선택은 간단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각성시켜서 그들의 의무를 기억케 하는 것이었으며, 순수한 간증으로 그들을 “압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난 이 압도라는 표현을 곰곰이 음미해 보았다. 우리는 보통 압도라는 단어를 “기세에 압도되다” “분위기에 압도되다”는 식으로 사용하는데 이는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에 눌려서, 어떻게 해야 할 바를 모를 지경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다시 말해서 순수한 간증으로 압도한다는 것은, 간증을 전할 때 임하시는 성신의 권능이 너무나 강해, 그 간증을 듣는 각 사람의 마음 속에 큰 자극이 일어나 스스로 헌신하게끔 만들 때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리고 앨마서 5장에 나오는 각 질문들을 개인들이 마음 속으로 해보고, 결단하게끔 인도하는 것도 그 과정의 하나라고 본다.


난 경전을 읽어보고, 많은 이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헌신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인간이 만든 특정 프로그램이나, 많은 회의가 결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물론 충분한 회의와 그로 인해 생긴 프로그램을 통해 많은 이들을 교육하고 자극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 핵심은 명확하지 않던가? 복음의 기본 원리대로 하는 것이며,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단순한 가르침의 차원에서 강조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무엇을 해야 합니다...무엇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그건 이미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씀이다....그것을 행동하게끔 강력한 간증과 호소력 있게 좀 전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아무리 부드러운 교회 회원들이라 하지만, 때로는 개신교회의 목사님과 같은 카리스마와 열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야곱의 고백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 “과제의 막중함”이 요구되지만 때로는 회원들의 나태함과 무관심에 대해 날카롭게 고할 필요도 있다. (야곱서 2:10) 주님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에 대한 첫사랑에서 벗어난 그들의 모습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릴 수만 있다면 분명 많은 이들이 자신의 위치를 기억하고 헌신할 것이다.


난 이러한 분위기가 교회 내에서 조성된다면, 비단 청소년들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회원들이 성찬식 모임에서 온전히 주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중요성을 기억하며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변화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시록 3: 15,16)


주 님께서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고 미지근한 이들은 입에서 토해 낸다고 하셨다. 그저 습관적으로, 의무적으로 교회에 와서 주어진 시간만 때우다 가도 주님의 승인을 받을 것이라 자위하는 이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