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업/위대한 선교사들

(몰몬교) 히버 시 킴볼의 선교사업

모로나이 2009. 9. 18. 01:43



                                                 히버 시 킴볼

당시 십이사도 정원회 회원이었던 히버 시 킴볼 장로는 1837년 영국에서 회복된 복음을 전파하는 최초의 선교사로 부름받았다. 그는 후일에 대서양 건너편에 세워진 최초의 해외 선교부에서 봉사하기 위해 오하이오주 커틀랜드에 있는 가족 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부름과 고향을 떠난 것, 그리고 영국 도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유럽의 해변에서 영원히 지속될 복음을 전파하도록 최초로 임명된 사람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친구들에게도 느닷없이 교회 제일회장단 일원인 하이럼 스미스 형제로부터 내가 영에 의해 부름 받았으며, 교회 총관리 역원 대회에서 대영제국에서 선교 사업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지명 받았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그러한 중요한 직책과 임무에 지명되었다는 생각은 나를 거의 견딜 수 없게 했다. 나는 약하며 합당치 않다고 느꼈고, 내게 놓여진 과제로 인해 거의 압도될 지경이 되어 다음과 같이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오, 주님. 저는‘더듬는 입술’을 가진 사람이며 그러한 일에 적합치 않습니다. 어떻게 제가 빛과, 지식과, 경건과, 종교의 본 고장이며 기독교 세계에 너무나 잘 알려진 그 나라에, 그리고 많은 지식으로 유명한 사람들에게 전파하러 갈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그 나라에서 선교 사업을 하자면 반드시 요구되는 것들, 즉 그토록 오랜 동안 가족을 떠나 있어야 하고 많은 축복과 행복한 세월을 함께 누려온 사랑하는 친구들과 떨어지게 되며 고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들 가운데 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그러나 이 모든 생각들도 나를 의무의 길에서 돌아 서게 하지는 못했다. 나는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는 순간, 그분께서 전능하신 권능으로 나를 보호하시고 내게 필요한 모든 자질들을 허락해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어떠한 위험이 있더라도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비록 나에게 가족이 소중하고, 그리고 그들을 거의 절망적인 상황에 내버려 두고 떠나야만 한다 해도 나는 진리, 곧 그리스도의 복음의 대업이 다른 모든 걱정거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참새들을 돌보시고’또한‘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하나님께서 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리라는 믿음으로 기꺼이 그들을 떠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며칠 동안 개인적인 일과 업무를 처리 하고 난 후 1837년 6월 13일에 나는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커틀랜드에 작별 인사를 했다.”  약 한 달이 지난 7월 18일에 히버 시 킴볼 장로와 그의 선교 동반자들은 영국 리버풀에 도착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배가 정박한 직후, 작은 배가 옆으로 다가왔으며 하이드, 리차즈, 굿선 및 나를 위시한 몇몇 승객이 그 배를 타고 해안으로 갔다. 부두에서 2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나는 해변으로 뛰어내려 난생 처음으로 영국 땅을 밟고서는 예절과 풍습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낯선 사람들 가운데 섰다. 당시 나는 독특한 느낌을 받았는데 특히 내 사명과 내가 임명되고 이제 조만간 시작하게 될 일의 목적, 중요성 및 범위를 깨달았을 때 더욱 그러했다.”(Journal of Heber C. Kimball, R. B. Thompson 편집 [1840], 9~11, 5쪽;(원문(영어)의 구두점 및 대문자 사용은 현대화됨; 문구 일부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