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업/위대한 선교사들

(몰몬교) 위대한 선교사 댄 존스

모로나이 2009. 9. 18. 01:57








회복의 위대한 선교사 중 또 다른 한 사람은 댄 존스라고 하는 개종자였다. 고든 비 힝클리 회장은 댄 존스가 고국인 웨일즈에서 선교 사업을 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댄 존스는 1810년 8월 4일 웨일즈 플린트샤이어의 홀킨에서 태어났습니다. 열일곱 살에 선원이 된 그는 거센 바람에 소금 물보라를 쏟아 부어 대는 높은 파도와 무서운 폭풍우 속에서 배가 전복되지 않게 하는 일 등 배와 선원의 일들을 배웠습니다. 그러다가 1840년 미국으로 가서 미시시피강을 오르내리는 작은 배를 구입하여 직접 운항하였습니다. …


“댄은 해운 사업에 종사하는 동안 몰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그 동안 몰몬들은 미주리주에서 쫓겨나 일리노이 주 퀸시에 잠시 피난처를 정했다가 다시“아름다운 나부”를 정착지로 삼았습니다. 나부는 강이 넓게 구부러져서 땅이 반도 모양을 이룬 곳에 있었습니다. 댄 존스는 당시 신문과 정기 간행물에 실린 반몰몬 기사들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러한 기사를 읽을 때마다 몰몬에 대한 그의 호기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는 이 사람들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하다 마침내 그들을 만나게 되어 가르침을 받고 진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댄은 1843년 1월에 미시시피강의 차가운 물에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


“댄 존스는 웨일즈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아 아내 제인과 함께 그곳으로 갔습니다. 존스 부부는 윌포드 우드럽 및 기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영국 제도로 향했습니다. 존스 장로는 웨일즈 북부에서 봉사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는 웨일즈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그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웨일즈어를 못하는 윌리엄 헨쇼는 남부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년 후 헨쇼 형제가 해임되자 존스 장로는 웨일즈 전체를 관리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는 선교본부를 웨일즈 남동부에 위치한 메르시어 티드필에 세우고, 몇 명 되지 않는 선교사를 이끌고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845년부터 1848년까지 약 3,600명에게 침례를 주었는데, 이 숫자는 인구비로 볼 때 당시 웨일즈에 살던 사람 278명 중 한 명 꼴로 침례를 주어 후기 성도 교회로 데려온 셈입니다.


“교회를 적대하는 사람들은 신문과 기타 출판물을 이용해서 몰몬 선교사들을 공격했는데 이들 대중 매체들은 존스 장로에게는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직접 출판물을 내어 답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당시 신교도 목사이며 인쇄업을 겸하고 있던 그의 친형제 존 존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존은 주중에는 댄의 출판물을 인쇄해 주고 일요일에는 연단에서 그를 공격했다고 합니다.


“당시 댄 존스가 간행한 출판물은 영어 이외의 언어로 출판된 최초의 몰몬 정기 간행물이었습니다. …


“… 그는 아무도 두려워 하지 않고 매우 대담하게 움직였습니다. 그의 방법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가끔 어느 마을에서 수주일 동안 그 도시 전체를“개종”시키기 위해 올 것이라고 광고를 했다. 그는시장과 시 평의원, 성직자들 및 경찰 관서에 그의 의사를 알리기도 했다. 또한 지역 교회 회원들을 통해 도시 전체에 걸쳐 수천 부의 소책자를 배부했다. 그가 기차역에 도착하면 종종 그 도시에 있는 모든 행정 관리들과 열광적인 수많은 시민들이 나와 그를 맞이했다.’[Rex LeRoy Christensen, “The Life and Contributions of Captain Dan Jones,” Master’s thesis, Utah State University, 1977년, 39~40쪽]


“다른 교회 목사들이 그에게 심한 비난을 퍼부어 댔습니다. 그들은 연단에서나 대중 매체를 사용해 그를 공격했습니다. 그러한 적대 행위에 대해 댄 존스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미대륙에 있었던 가엾은 조셉 형제에 관해 항간에 난무하고 있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캡틴 존스에 관한 이야기를 모태로 하고 있는데, 그러한 이야기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작은 사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면서 그를“이 국가에 내려진 저주”라고 서슴없이 비난하고 있다.”’[Christensen,“ Life and Contributions,”27쪽]


“대중의 여론은 이리 저리 들끓고 있었지만 댄 존스는 그런 것에 위축되기는커녕 논쟁의 목소리를 기회로 이용했습니다. 그는 대중의 주의를 그처럼 강력하게 끌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몰몬 교리가 참된지의 여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몰몬 전체와 특히 존스 장로에 대해 일고 있는 눈에 띄는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개종해 들어 오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여론은 존스 장로를 비난했으며, 길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욕설을 해댔고,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


“… [1852년에] 그는 다시 고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다시 한번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 부름에 응했습니다. …


“웨일즈로 돌아온 존스 장로는 또 다시 이 사업에 온 정열을 쏟았습니다. 그의 두 번째 선교 사업 기간 동안 약 2천 명이 침례를 받았는데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숫자입니다. …

“존스 장로와 그의 동료들이 가르치고 침례를 준 사람들의 후손인 회원들만도 오늘날 수만 명입니다. 개종자 수로 볼 때 댄 존스는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이 침례를 준 선교사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입니다. 그는 의를 가르치고 신앙을 세우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성도의 벗, 1994년 3월호, 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