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따끔한 일침

모든 것 잘되리??

모로나이 2011. 8. 9. 11:41

 

 

 

 

시온에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도다, 참으로 시온은 번성하나니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도다 할 것이라....” (니후 28:21)

 

윗 구절은 누가 한 말 같은가?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는 찬송가에서 나오듯이 “모든 것 잘 되리”라는 초기 개척자들의 신앙을 나타내는 구절인가? 아니면 "듣기 좋거나 칭찬할 만한 일이 있으면“ 구하여 마지 않는다는 신앙개조 13조에 따른 긍정적인 태도를 표현한 말인가?

 

미안하지만 그렇지 않다.....동일한 구절을 계속 읽어 보면 놀랍게도 그 주장의 근원지가 누군지가 밝혀진다.

 

“..... 이같이 악마가 그들의 영혼을 속여, 조심스럽게 그들을 인도하여 지옥으로 내려가느니라.” (니후 28:21)

 

즉, 시온에서 모든 것이 잘되고 있고, 번성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속삭이는 자는 악마(사탄)라는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사탄은 “시온에서 모든 것이 잘못 되고 있다”는 식의 부정적인 영향력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식처럼 보이는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성도들을 미혹하고 있는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 참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정작 그 행간에 숨겨진 뜻을 발견한다면 사탄이 얼마나 교묘하게 성도들을 속이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게 된다.

 

모든 경륜의 시기 초반에는 사탄이 “박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교회를 억압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1세기 당시 성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포함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더 나아가 로마 제국의 극심한 반대가 있어 왔으며, 조셉 스미스 당시에도 주변 사람들의 박해가 심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탄이 이러한 박해를 부채질 할 때는 그만큼 성도가 더욱 영적이고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사탄은 이제 너무나도 교묘해져서 사람들을 이용한 박해가 그의 목적을 성취하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는 다른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편안함”과 “안도감”을 성도들에게 심어주는 것이었다. 신앙생활과 관련하여 이러한 편안함과 안도감을 단지 하나님에게 주어지는 축복으로만 간주할 수가 없는 것이 본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누가 14:27) 즉 끝임 없는 자기 희생과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삶,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갈기갈기 쪼개는 아픔과 슬픔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삶을 살 적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빌립보 4:7)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평강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요한 14:27)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우리는 정말 현실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깨어 살피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뭐 시온 안에서 모든 것이 잘되고 있으니까...”라는 만족감에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생활하고 있는가?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요한계시록3:16)

 

만에 우리의 신앙 생활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것이라면 예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토하여 버리겠다고 하셨다. 대충 일요일 성찬식만 참여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승영에 이르러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리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라고 만족해 하는 것은 아닌가? 마치 “참으로 시온은 번성하나니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도다”는 말처럼.....왜 성찬식 참석수는 늘어날 생각이 없고 침례 받는 자의 대다수가 활동을 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선택된 세대입니다..”라면서 근엄하게 청소년들을 부추기면서 왜 상당수의 청소년들이 교회 모임 중에 핸드폰 게임이나 합당하지 않은 복장하고, 안식일에 걸맞지 않은 활동을 교회 내에서 하고 있어도 왜 회원들은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교회 모임을 봐도 생각보다 많은 회원들이 신권회나 주일학교는 그냥 선택 사항으로 보거나 모임 중 다른 곳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데 왜 그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이 없는 걸까?? 그 외에도 지적할 만한 것은 너무 많다..

 

물론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고, 올바른 말이라 해도 회원들에게 상처가 줄 수 있기에 잘못을 그냥 모른 척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한다. 또한 기껏 잘 살고 있는데 이건 잘못되었고 저건 또 이래서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할 경우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으로 보일 우려가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하는데..너나 잘하세요..’라는 식으로 뒷담화의 소재가 될 수도 있다. (무섭다...회원들의 뒷담화는...^^;;)

 

하지만 상대방에 대한 지나친 배려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쳐다볼 것인가에 대한 우려로 인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없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몰몬경에 나오는 선지자 야곱도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증거해야 하는 일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부끄럽게 하지만, 과제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담대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참으로 내가 너희 마음의 간악함에 관하여 너희에게 증거해야만 하는 일은 나의 영혼을 슬프게 하며, 나로 하여금 나를 지으신 이의 면전에서 부끄러움으로 움츠러들게 하는도다....이토록 많은 담대함을 사용하여 말해야만 하는 일은 나를 슬프게 하는도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쁜 말씀, 곧 상한 영혼을 치료하시는 말씀을 듣고자 이리로 올라왔도다.그런즉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엄격한 명령으로 말미암아, 불가불 너희의 범죄를 따라 너희를 훈계하여, 이미 상처를 입은 이들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대신, 그들의 상처를 더 크게 하며, 상처를 입지 아니한 이들은, 하나님의 기쁜 말씀을 흡족히 취하며 즐거워하는 대신, 단검을 맞아 그들의 영혼이 찔림을 받고 그들의 섬세한 마음이 상처를 입게 하여야 함이,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도다.그러나 과제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엄격하신 명대로 행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들과 상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면전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꿰뚫어 보시는 눈길 아래서, 너희의 간악함과 가증함에 관하여 너희에게 고해야만 하느니라.” (야곱서 2:6-10)

 

이 구절을 잘 보면 알겠지만 하나님의 기쁜 말씀을 듣기 위해 올라온 성도들에게도 때로는 상처를 더 크게 하고, 단검을 맞아 영혼의 찔림을 받게 해야 하는 야곱의 고뇌를 읽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본래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히브리 4:12)한다는 것을 유념해 본다면 야곱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다.

 

이제는 “시온에서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습니다...”라는 자기 만족의 말보다는 “우리는 회개해야 하며 우리의 삶을 조절해야 합니다.”라는 따끔한 말들이 연단에서 선포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날카로운 말을 들을 때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았던(사도 7:54) 사람들이 아니라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사도 2:37) 라고 외쳤던 겸손한 성도들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