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복음의 정수란 무엇인가...?

모로나이 2007. 11. 3. 16:13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성을 믿는 것이나 그가 부활해서 아버지 곁으로 갔고 우리 인류의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개념일까? 물론 이러한 개념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등장하셨던 실제적인 분이며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간증은 신앙의 제 1원칙이 될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는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처럼 더럽고 부정하며 불완전한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여 용서함받고 깨끗하지 않은 것이 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왕국에서 승영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복음의 제 1원리이다.

 

"나는 승영할 수가 없을 것 같아....나는 너무 죄가 많아서 구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흔히 우리들은 이러한 탄식을 발하곤 한다. 나 역시 인간적인 나약함에 굴복당할 경우 이러한 자책에 힘들어한 적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생각했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육신의 나약함과 완전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율법 사이에서의 갈등과 번민들. 이런 과정 속에서 종종 교회를 떠나 세상과 어울려볼까 하는 생각도 하곤 했었다. 술에 취해 보고 싶기도 하고 진탕하게 놀아보고도 싶었구.....

 

하지만 최근들어 다시금 깨닫는다..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고민과 방황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을...오랜 세월 진리를 찾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믿고 있었다 생각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복음의 원칙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것은 바로....나와 같은 죄인들조차 하나님 왕좌에 앉혀주실 수 있노로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세로부터 예임되어 이 지상에 내려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은 단순한 예임에 따른 과정이 아니라 바로 나와 같은 부족한 죄인들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데려가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찬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그러한 약속을 확신하지도 않으면서 백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간증한들 그것이 의미있을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사야 1:18)

 

여기서 변론으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reason이다. 이 단어가 동사로 사용될 경우 주로 논리적으로 따지고 이치를 따지거나 설득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된다. 주님께서는 죄로 고민하고 신음하는 이들에게 "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는 그러한 죄의 문제에 대하여 변론, 즉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져보자고 권고를 하신다. 왜 전세로부터 예수님이 예정되어야 했고 지상에 내려와 십자가 형에 못박혀 죽어야 했는지...그 이치를 따져보자고 권고를 하신다. 그리고 나서 하신 약속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우리들의 죄가 주홍색이라 하여도 눈처럼 희게 만들것이며 양털처럼 변화시키겠다는 약속이다. 우리가 의로워서도 아니고 잘나서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계명을 100% 지킬 수가 없고 하나님 표준에 이르지도 못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의 죄가 양털처럼 희게 된다 한다. 무슨 근거를 둔 약속인가?

 

"인간은 이미 타락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얻지 못하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신앙과 회개등을 바탕으로 저들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앨마 22:14)

 

우리는 스스로 의롭게 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라는 역사적인 상황들이 우리의 신앙(하나님이 하신 약속들을 확신하는 것)과 회개(죄로 향한 우리의 진로를 하나님께 맞추는 것) 등을 통해 속죄의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며 그것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하나님의 왕국에서 승영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복음이란 말 그대로 복된 소리이다. 우리가 아무런 의미없이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죄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면전에 돌아갈 수 있다는 그 소식 자체만으로도 복되고 기쁘기 때문에 당당하게 복된 소리, 복음이라 외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복음의 참 맛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들을 사용하시기도 한다.

 

"만일 사람이 내 앞에 이를진대 내가 저들의 연약함을 보이리라. 내가 사람을 연약하게 하였음은 저들로 겸손해지게 하려 함이라..." (이더서 12:27)

 

위대한 사도였던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다가가시자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 5:8)

 

라고 외쳤던 것도 주님 앞에 다가갈 때 베드로의 연약함과 죄악들이 명확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한순간의 쾌락을 위한 수단들이 죄로 인식되지 않기 마련이고 그에 대한 죄책감도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일수록 그들의 잘못들이 깨달아지고 자신이 죄인임이 인식되면서 겸손해지는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주께서는 "오라...우리가 서로 변론하자...."라는 초청이 발해지는 것이며 그러한 초청에 응하고 약속을 확신하는 자들에게 "주홍과 같은 죄들이 눈처럼 양털처럼 하얗게 변하는 것이다." 그런 체험을 하는 자들이야 말로 우리가 믿고 있는 복음의 진수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복음.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기쁜 소식을 확신하지 않고 그 능력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지 않은 자들은 복음을 모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없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