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찾을 수가 있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라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오늘날 수많은 개신교회와 가톨릭 교회, 그리고 그 외 종파들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성령이 없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가 없다고 말입니다. (고전 12:3) 성령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작용하여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요16:13) 예를 들어 사도행전을 보면 오순절에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침례를 받은 경우가 나오는데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거나 철학, 논리적 사고를 통해 개종한 경우가 아니라 그들에게 증거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통해 진정한 개종의 길로 인도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간증과 그 간증을 통해 전해지는 성령의 인도! 그것이 모여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전 이 구절을 볼 때마다 뭔가 강한 전율을 느낍니다. 베드로의 간증이 얼마나 강하였기에, 그 간증을 듣는 이들의 마음을 찔리게 하여 무엇을 해야 할 지 간절하게 간구하게 되는 것일까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히브리 4:12)
하나님의 말씀은 날이 선 칼과 같아서 우리의 마음을 쑤시고 쪼개어 마음의 “찔림”을 받게 하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더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께 다가올수록 말씀의 검으로 인해 찔림을 당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겸손하게 되어 비로소 주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며 진정한 개종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또 만일 사람들이 내게로 오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일 것이라. 내가 사람들에게 연약함을 주는 것은 그들로 겸손하게 하려 함이요, 내 은혜가 내 앞에 스스로 겸손하여진 모든 자에게는 족하니, 이는 만일 그들이 내 앞에 스스로 겸손하여 나를 믿는 신앙을 가지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연약한 것들을 강하게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더 12:27)
이러한 영의 인도하심을 입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개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겠지만 주님의 영을 느낄 때 그 느낌은 단순한 편안함이 아니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와 가슴 속으로 깊이 흘러 들어오는 순수한 지식, 지혜를 동반하게 됩니다. 아 이래서 복음은 참된 것이로구나...하는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기쁨의 소리....이걸 어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분들, 물론 그 중에 일부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노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은 후기성도가 단순한 감정에 너무나 쉽게 의지한다고 비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물론 교리와 성약 9:8에 언급되어 있는 “네 가슴을 네 속에서 뜨겁게 할 것”이란 사실에만 집중한다고 하면 그런 비판이 이해할 만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비판하는 분들의 주장처럼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영화가 잘 만들어져서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마음을 뜨겁게 한다 한들, 그것이 곧 영화의 내용이 참됨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리와 성약 9편 구절 중 “너는 네 생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만 하느니라”라는 표현과 “너는 그것이 옳은 줄 느끼게 되리라”는 구절이 “가슴을 뜨겁게 하는” 현상의 필수적인 전제와 결과로 강조되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의 참됨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것을 “연구”해야 하며 기도를 하고 특별한 느낌을 받은 뒤에 “그것이 참되리라”는 결론이 나올 순수한 예지, 지혜의 동반이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개종으로 인도가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후기성도가 말하는 “뜨거운 가슴”을 단순히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난 뒤에 느끼는 “진한 감동” 수준으로만 여기는 분들은 개종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단 한가지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선을 행하도록 인도하는 영 - 참으로 공의롭게 행하도록, 겸손히 걷도록, 의롭게 판단하도록 인도하는 그 영을 신뢰하라. 이것이 나의 영이니라.” (교성 11:!2)
가슴을 뜨겁게 한다는 영은 단순히 어떤 현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을 받은 사람들이 선을 행하도록 하고, 겸손하고 의롭게 판단하도록 인도합니다. 또한 그 동일한 영은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온유와 절제”라는 달콤하고도 훌륭한 열매를 동반합니다. (갈 5:22,23) 영이 함께 한다면 이러한 성품들과 특성들은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태도 속에 배어들게 됩니다.
이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의 모습 속에서 사랑과 희락 화평과 충성, 온유와 같은 성품들이 없고 질투와 비판, 노여움이 가득하다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주님의 영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영은 거룩한 성전에만 거하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 속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영이 떠났는지를 바르게 찾아봐야만 합니다. 저 역시 종종 주님의 영을 느끼지 못하기에 비판하고 싶고 세상적으로 살고 싶은 충동도 느끼고 때론 우울한 감정에 휩싸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 봅니다. 그러면 그 원인을 금세 찾아내고 말죠. 바로 제가 주님이 원하시는 바에 따라 살지 않거나 마음 가짐이 되어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정말 선하게 살고 싶은데 가슴 한 구석에서는 자꾸 잘못된 길로 가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럴 때면 니파이의 다음과 같은 절규가 제 것처럼 되어 마음 속에서 울부짓게 됩니다.
“오 그러면 내가 그토록 큰 일을 보았을진대,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낮추어 내려오사 그토록 많은 자비로 사람들을 찾아 주셨을진대, 어찌하여 나의 고난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울며, 내 영혼이 슬픔의 골짜기에서 머뭇거리며, 내 육신이 소진되며, 내 힘이 풀려야 하느냐?” (니후 4:26)
그리고는 다윗의 간절한 기도는 제 기도가 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편 51:11)
주의 영을 느끼지 못할 때 찾아오는 고통과 절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이러한 고통과 절규가 우리의 마음을 찔리게 하고 계속 주의 길로 인도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다 나중에는 감각이 무디어 지고...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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