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토론내용

성경의 변개?

모로나이 2010. 7. 24. 00:58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손에 의해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고 나서, 너는 저 크고 가증한 교회가 형성됨을 보나니, 이는 다른 모든 교회보다 가장 가증한 것이니라. 이는 보라 그들이 어린 양의 복음에서 명백하고 극히 귀한 많은 부분들을 제하여 버렸음이요, 주의 많은 성약을 또한 제하여 버렸음이라......그러한즉 그 책이 크고 가증한 교회의 손을 거쳐 나아간 후, 하나님의 어린 양의 책인 그 책에서, 많은 명백하고 귀한 것들이 제하여진 것을 네가 보느니라” (몰몬경 니파이전서 13:26,28)


“나는 원저자들의 손에서 직접 기록된 성경만을 믿습니다. 무지한 번역자, 부주의한 서기 또는 고의로 부패한 성직자들이 많은 잘못을 범했습니다.”(선지자 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310쪽)


몰몬경이나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조셉 스미스가 말한 것처럼 후기성도들은 성경 66권이 완벽하지 않으며 무지한 번역자나 부주의한 서기, 그리고 고의적으로 부패한 성직자들로 인해 변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몰몬경의 표현에 의하면 “많은 명백하고 귀한 것들”이 제하여져 버렸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한 권이지만 명백한 표현들이 제하여졌기로 그것을 이해하는 틀과 방법이 다양해질 수밖에 없으며, 결국 현재와 같이 많은 교파와 교단, 교리로 난립하게 된 것이라 보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현재 남아 있는 성경이 너무나 불완전하고, 변개가 심해서 도무지 그 핵심이 무엇인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오염되었다고 보진 않습니다.


니고데모님께서는 “성서의 양보다 이문의 양이 많다”고 하셨고, 마치 그것이 성경이 후대에 덧붙여졌기 때문에 양이 늘어난 것이라는 식으로 말씀을 하시더군요. 에르만이라는 학자가 밝힌 것처럼 성경 사본들 사이에 20만개에서 40만개의 이문이 있는데 헬라어 신약 성경을 이루는 단어가 13만 8,162개라는 점을 감안해 보면 니고데모님의 주장이 맞습니다. 하지만 사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이문들의 특성들을 찾아보면 핵심을 변경시킬 만한 요소가 거의 없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특정 성구에 “주”라고 번역된 부분을 다른 사본에서 “예수”라고 한다면 그것을 이문으로 칩니다. 관사의 사용 여부나 고유명사를 표기할 때 사용하는 철자의 다양성의 경우도 전부 이문으로 칩니다. 이런 식으로 계산을 해보면 40만개 정도로 추정되는 이문 중에 28만에서 32만개 정도는 중요하지 않는 철자상의 차이가 될 것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위에서 조셉 스미스의 말처럼 “부주의한 서기”들의 실수로 이문이 발생할 수 있는데 이는 쉽게 알아보고 올바른 단어로 재구성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스미소니안 연구소의 한 사본을 보면 “주”라고 써야 할 부분에 “그리고”라는 단어를 썼지요. 헬라어에서 이 두 단어가 “카이”와 “퀴리오스” 조금 비슷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리고”라는 단어가 문맥에 맞지 않기 때문에 서기의 실수라는 사실 정도는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또한 헬라어의 경우는 영어와 달리 고유명사에 정관사를 붙이는 헬라어의 용례와 관련하여 나타나는데 의미상으로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이 모두를 이문으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The Mary나 그냥 Mary나 의미상 차이는 없으나 학자들은 이조차도 이문으로 본다는 거죠.)


그리고 헬라어는 굴절이 심한 언어이기 때문에 다른 언어처럼 어순이 중요하지가 않기에 번역 과정에서 다양한 표현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는 의미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핵심 내용이 변질될 만큼 심한 것도 아닙니다.


이런 과정으로 진행을 시켜보면 1%정도의 이문만이 본문의 의미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원문까지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을 합니다. (사실 그 이문조차도 기독교의 핵심을 부인할 만한 역할은 하지 못하더군요.)


그러면 니고데모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성경이 후대에 덧붙여졌기 때문에 양이 늘어난 것”이라는 말은 어떤가요? 어떻게 보면 맞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필사자들의 경우 본문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고 싶은 마음에 구체화하는 과정 중에 내용이 첨가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어 교회는 수세기에 걸쳐 낭송 성구집이라고, 성경의 일부분을 매일 읽을 수 있도록 편집해서 사용했습니다. 헬라어 사본으로 남아있는 것 중에 2,200여 종이 바로 이러한 낭송 성구집인데 1년 동안 매일, 매주 읽을 성구들이 적혀 있습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89절에 걸쳐서 예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고 그저 대명사인 “그”로만 표현한 경우가 있는데 일일 낭송 성구집에 쓸 글을 발췌하려면 “그가 어딘가로 가실 때”라는 식으로 시작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독자들이 그가 누구를 의미하는지 쉽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를 “예수”로 첨가하여 구체화 시킨 것이지요. (이것 역시 학자들은 이문으로 취급합니다.) 이처럼 문맥을 따라 본문의 의미가 분명히 하도록 이름을 첨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봅니다. 이것을 일러 뭐 필사자들이 후대에 성경을 덧붙였다고 표현한다면야 할 말은 없겠지만 핵심적인 교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물론 그 외에도 여러 이문들이 존재하며, 원문에는 없지만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들, 예를 들어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이나 뱀을 집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는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이미 성경 주석에서 “원래 사본에는 없다”는 식으로 표현을 했기 때문에 그리 문제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현재가 우리가 읽을 수 있는 66권의 성경이 완벽하다거나, 그것만이 유일한 영감의 근원이라는 식의 극단적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으나  전 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 속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속을 강하게 느끼며,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그 말씀과 그 성경을 보전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했던 믿음의 조상들께 깊은 감사를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