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토론내용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내용으로 진행 중인 토론 내용.

모로나이 2010. 9. 24. 00:36

님이 인용하신 성구를 다시금 살펴보지요.

 

(1)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계속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전해집니다.[요한 1서 4:12]


밑 에서 다시금 설명하겠지만 성경 상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님께서는 하나님을 보았다는 몇몇 구절들이 단순히 환상을 체험한 것이나 천사들을 본 것이라 하지만 “하나님을 보았다”는 말이 환상이나, 천사들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이라면 이 성구에서도 굳이 그러한 표현을 쓸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구절은 무조건 환상으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는 구절은 무조건 문자 그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특정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해석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권세의 개입 없이”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지만 우리가 계속 사랑하면 누구나 그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2) 누구든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본 일이 없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4:20]

 

이 구절은 형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비교하여 설명한 것으로 ‘본 일이 없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우리 주변에 있는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이 중요함을 표현하기 위해 대조, 강조한 설명일 뿐, 하나님은 애초에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다는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 구절이 아닙니다.


(3) 어느 때에도 하느님을 본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자리에 계신 독생한 신이 그분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요한 1:18]


 이 구절도 (1)번 성구와 같은 의미를 가집니다.


(4) 누군가가 아버지를 보았다는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 사람만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요한 6:46]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하나님에게서 부름 받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자들도 일부 포함된다고 봅니다.  


(5) 모든 것을 아버지께서 내게 넘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아들과 또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마태 11:27]

 

그 렇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자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과정이란 단순히 성경을 연구해서는 얻어질 수가 없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분으로부터 권세를 받은 소수만이 하나님을 직접 목격하고, 그분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에 진정한 의미에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6) 예언자들의 글에 ‘그리고 그들은 모두 여호와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서 듣고 배운 사람은누구나 내게로 옵니다. [요한 6:45]


이 구절은 왜 인용하셨는지 모르겠군요.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가르침 받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 있다는 말에 대해 이견이 없습니다. 


(7) 사랑하는 이들이여,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든지그분이 나타나실 때에는,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1서 3:2]


 예수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부활되신 몸과 뼈의 몸을 가진 상태에서 승천하셨으며 그분은 그러한 모습으로 다시금 오실 겁니다. (누가 24:39) 바로 그러한 재림의 날, 우리의 영화롭게 된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된 모습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8) 그분이 덧붙여 말씀하셨다. “너는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나를 보고도 살 사람은 아무도 없기때문이다.” [출애굽기 33:20]

 

이 구절 역시 하나님의 권세가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face to face: 얼굴을 맞대는 것)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신명기 34:10)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출애굽기 33: 11)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출애굽기 33:22,23)


모 세는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여호와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주님이 손을 거두었을 때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 모세가 주님을 볼 수 있는 때란 주님이 손길을 거두지 않을 때, 즉 주님의 개입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레니우스의 설명.


“이 구절(요한 1:18)은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그분을 밝히 드러내지 않으신다면 어느 때에도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읽어야 한다” (이레니우스,"이단에 반박하여" 6장, 속사도시대의 교부들 1:427)


이 구절을 왜 인용하셨는지 의문이 드신다 했나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그분을 드러내지 않을 경우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이 그분을 밝히 드러내실 경우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이를 단순히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이 육체적인 눈을 의미한다고 보진 말길 바랍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열하 6:17)


잘 아시는 구절이죠. 이 구절에서 주님께서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니 엘리사 주변에 있는 불말과 불병거를 보았다는 내용입니다. 님은 여기서 말하는 “눈”이 우리의 육신의 눈이라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 사환은 단순히 환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주께서 열어주신 눈을 가지고 주위에 있는 천사들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육신의 눈에 주님의 권세가 임할 때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화롭고 신비한 것들을 목격할 수가 있는 것이죠. 바로 모세를 비롯한 조셉 스미스가 경험한 그러한 것들입니다.


하 지만 님의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을 보았다”는 구절을 이러한 영안이 깨어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단순한 상징으로만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표현한 내용을 정말 문자 그대로 누구나, 우리의 두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영어 표현


Not that any man hath seen the Father, save he which is of God, he hath seen the Father.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요한 6:46)


간 단합니다. 하나님에서 온 사람만이 하나님을 보았다는 구절이,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보냄을 받은, 즉 그분의 권세가 함께 한 이들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 론 님의 지적처럼 문자에 치중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성경 전체에서 볼 수 있는 다른 가르침과 연관해서 이해를 했을 경우, 이 구절도 마태 11:27과 비슷한 개념으로 풀이할 수 있다는 것이죠. 즉 아버지를 온전히 알 수 있는 자는 아들과 그 아들의 계시를 받는 자들에 한한다는 구절과 비슷한 의미라고 보시면 됩니다. 뭐 이는 제가 이해하는 바이니 그리 신경을 쓰진 않으셔도 됩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님 은 마태복음의 구절, 즉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 5: 8)의 구절이 미래형이기 때문에 과거나 현재로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님의 논리대로 한다면 마태 5장에 나와 있는 축복들, 예를 들어 애통한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르게 된다는, 내용이 전부 과거에는 일어나지 않는 미래의 사건이라는 것이 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구약 시대에는 애통한 자가 위로를 받을 수 없었고, 영적으로 굶주린 이는 채움을 입지 못했습니까??


또한 마태 7장에는 다음 구절이 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태 7:7)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이 말씀도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님의 논리대로만 한다면, 구약 시대에는 그 어떤 누구도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 없어야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미래형은 단순히 미래에 벌어질 사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나 축복과 관련해서도 사용되는 표현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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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단 “신성한 성임”이라 부를 수 있는 개념, 즉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이나 선지자를 통해 그분을 드러내신다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개념은 이와 다릅니다. 그럼 님이 분석하신 성구를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탈 출기 3:6) 그분이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아버지의 하느님,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그러자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렸는데, 참 하느님을 쳐다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 모세가 하느님 얼굴을 보았나요? 보지 못했습니다.


보 지 못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말길 바랍니다. 애초부터 모세가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영적 존재로만 인식했다면 ‘하나님을 보기가 무서웠다’고 표현할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부터 볼 수 없는 존재를 일러 ‘보기가 두려웠다’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합당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면 큰 일이 날 것을 알았던 모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 하나님을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탈출기 19:11) 그들은 셋째 날을 위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날에 여호와가 모든 백성의 눈앞에서 시나이 산 위로 내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 백성들이 봤나요? 한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는 내려가고 올라갈 수 있는 그런 존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가 인용한 구절의 핵심은 ‘백성들이 이 구절에서 여호와를 봤다’가 아니라 단순히 편재하는 그러한 무형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탈출기 24:10-11)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보게 되었다. 그분의 발 아래에는 사파이어 포석을 깔아 놓은 듯한 것, 그 순수함이 꼭 하늘 같아 보이는 것이 있었다. 11 그 분은 손을 뻗어 이스라엘 자손의 뛰어난 사람들을 치지 않으셨으므로, 그들은 참 하느님의 환상을 보고 먹고 마셨다. --> 이 성구역시 하느님을 직접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1절부터 보시면,70명의 연로자들은 산 아래에 있었고 멀찌감치서 하느님의 영광만 체험했을 뿐입니다. 그영광만 체험한 것을 '하느님을 보았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잘 보길 바랍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9,10절)


그 앞 구절들을 자세하게 읽어보면 산 아래에서는 모세가 소의 번제물을 바친 다음 그 피를 사람들에게 뿌린다음 말씀을 선포합니다. 그 이후에 모세와 아론, 나답을 비롯한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 그분을 보게 된 겁니다. 님의 설명처럼 산 아래에서, 멀찌감치 하나님의 영광만 본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11절을 다시금 볼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11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목격한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실 수가 있었던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허락한 상태에서 몇몇 존귀한 자들은 하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탈 출기 33:11) 여호와께서는 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대면하여말씀하셨다. 그가 진영으로 돌아갈 때에도, 그의 봉사자인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수종으로서 천막 가운데서 떠나지 않았다. --> 역시 천사와 대면하여 이야기했다고봐야 합니다. 이런 표현이 정말 많습니다. 아래에 몇가지예를 더 설명해 놓았습니다.


다 른 구절에서는 천사가 여호와를 대변한 경우도 있으나 이 구절 역시 천사를 만난 것이라고 볼 만한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특히 “자기 동료에게 이야기하듯”이란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단순한 대변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를 표현하면서 직접 당신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천사를 통한” 대변인의 역할은 공식적인 업무에 해당할지 모르나 친구처럼 친밀하게 하시는 과정에서조차 대변인을 사용했을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탈출기 33:22-23) 나의 영광이 지나가는 동안, 내가 반드시 너를 바윗굴에두고,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나의 손바닥으로 막처럼 네 위를 가릴 것이다. 23 그 후에 내가 정녕 나의 손바닥을 치울 것이니, 네가 참으로 나의 등을 볼 것이다. 그러나 나의 얼굴은 볼 수 없을것이다.” --> 여기에서 말하는 "등"은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지나간 자리' 정도의뉘앙스? '등'을 사람의 등과 같이 생각한다면.... 음.... 성구 자체에서 여호와 하느님의 손은 보았다는 의미? 손은 보아도 살고, 얼굴만 보면 죽는다는 의미? 얼굴에서만 빛이 나시는 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전 에도 이 구절을 살펴봤지만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손이 거두어 졌을 때 그분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증명할 따름입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면, 여호와의 손이 함께 할 때는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탈출기의 이 부분에 대해스데반이 죽기 전에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설명을 보면, 모세가 만난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의 명을 받은 천사임을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님 께서 인용하신 사도행전 7장의 내용은 모세가 처음 떨기 나무에 임하신 여호와와 대화했을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 때 천사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변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사건에서도 여호와께서 단지 천사를 사용하셔서 말씀을 전하셨다고 볼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또 한 님이 인용하신 아브라함의 사례, 야곱이 씨름한 경우 역시 여호와를 대변한 천사를 만났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분명하게 여호와를 목격한 경우를 단순히 천사를 만난 것이라고 단정지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없습니다. 그런 논리라면 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후대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도, 그 모든 경우가 단지 천사를 만나는 것일 수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