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반박문

선지자에 대한 글 계속..

모로나이 2011. 1. 26. 09:55

 

 

님께 한가지 되묻죠. 회의론자라고 자처하는 분이신 님께서는 선지자라는 사람은 말에 포스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그럼 님은 말에 강한 포스가 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통일교회의 문선명 총재나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을선지자로 지지해야 한다는 겁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왜 자꾸 선지자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끝임없이 만들어 내어 그 틀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을 합니까? 객관적 증거가 아닌, 님의 편견을 근간으로 하는 비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잘 모르시죠?

 

님이 회의론자이기 때문에 성경을 조작된 것으로 본다는 것은 잘 압니다만 워낙 선지자에 대한 것부터 해서 교회의 모든 가르침들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경전과 계시를 근거로 한 것이기 때문에 부득이 성경의 내용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고, 믿을 수 없다 외친다 한들 님이 비판하기위해 사용하는 "편견"보다는 더욱 신뢰심 가는 자료들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부름 받은 선지자들이라면 모름지기 말에 강한 포스가 담겨야 하며, 만인을 설득시킬 만한 화술을 구비해야만 할까요? 물론 경전이나 초대 교회 역사를 보면 그런 분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지도자의 위치에 서 있는 분에게 그런 기대를 할 수는 있겠죠. 하지만 선지자로서의 자격은 그가 받은 부름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지 각 개인의 언변이나 카리스마를 기준으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일례로 모세의 경우는 일종의 말 더듬이였기 때문에 말 잘하는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하여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시작했죠. 그렇다면 그가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선지자로 볼 수 없단 말일까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 2:3-5)

 

그렇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 바울도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함을 느끼며 두려워 떨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자신이 전하는 말은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온갖 철학자들과 궤변론자들이 존재하면서 다양한 말솜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마음을 끌기 위해선 세상적인 지식과 말솜씨가 분명 큰 역할을 했을 것이며 실제도 많은 이들이 카리스마스를 풍기는 자들을 따라 다니기도 했지요.

 

몰몬경 시대에도 유식하여 많은 언변의 능력을 구사했던 시렘이라는 사람이 등장하여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야곱서 7:4) 앨마서 30장을 봐도 코리호어가 등장하여 많은 궤변을 동원하여 많은 이들을 그의 편으로 이끈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선지자가 말을 잘 하고 대형 교회의 목사님처럼 사람들을 잘 웃기고 카리스마를 발휘한다면야 사람들이 모여들고 좋긴 하겠지만 그렇다 하여 그 속에 하나님의 권능이 있다고 단정 지을 근거는 전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복음의 능력은 유려한 말이나 재미있는 농담, 설득력 있는 논거처럼 세상 사람들의 지혜에 의존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의론자들이야 콧방귀나 뀌면서 비웃겠지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복음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만 의존한다면 (연차대회와는 달리) 한국을 방문해서 성도들 모아놓고 하는 사도들의 말씀은 하나같이 무미건조하고 시덥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리고 개인적 취향을 들먹이자면 전 그런거 별로 안좋아합니다. 대형교회의 인기있는 목사님처럼 굵직굵직한 목소리에 때로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불쑥 불쑥 던지면서 카리스마있는 언변으로 말씀을 전하면 얼마나 좋겠나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램입니다. (물론 몇몇 사도들 중에는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에게 강한 포스가 없다고 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부름 받은 지도자로 지지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또 그 속에서 영을 느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들을 선지자로 지지하는 것은, 그들의 포스 있는 언변의 유무 때문이 아니라 조셉 스미스 때부터 이어지는 신권 열쇠와 경전의 말씀, 그리고 그것이 참됨을 알려주는 성신의 권능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도 님은 님만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드러내었습니다. 즉 님의 기준에 따르면 선지자란 마땅히 기적을 행해야만 하며,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전부 거짓이나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외에 것들은 전부 거짓을 위한 그럴듯한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뭐 개인이 그런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해서 제가 뭐라고 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우려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인정해 주지도 않은 그런 주관적 기준을 근거로 해서 상대방을 비판하면서, 또 그것을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호소를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지요. 거짓을 포장한다고 단정내린 성경이야 워낙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판단 기준으로 한다 치지만, 홀로 만들어 낸 근거를 가지고 아무리 떠들어 댄들 그냥 한 개인의 푸념으로 들릴 뿐 이지요.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 바울을 비교한 것은 선지자로서 역할의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지 각 세부점들을 모두 비교함이 아님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님이 잘 모르겠지만 성경에서는 위대한 일을 했으나 기적을 행한 적이 없는 선지자들도 여럿 나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자 중에 가장 위대하다는 칭찬을 받은 침례 요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약 성경에서 선지자로 지칭되는 유다와 실라(사도 15:32)의 경우도 기적을 행한 일 없이 형제를 권면했다는 말만 등장하고 구약 시대의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했다는 수많은 선지자들도 어떤 기적을 행했다는 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말일이 되면 거짓 선지자들이 등장하여 큰 기적과 기사를 보여 택함 받은 자도 미혹하리라는 말씀이 있는데 (마태 24:24) 기적이 선지자를 구분하는 유일한 특징이라면 우리는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분할 근거가 없어지고 맙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성경 내에서 나타나는 기적은 모든 선지자를 구분하기 위한 근거가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 기적들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과지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할 때 나타났으며 (출애굽기 4:1-9) 예수님의 경우는 관찰자들이 예수가 성경에 예언된 분임을 식별하게 도와주었습니다. (요한 6:14) 또한 1세기 당시 나타난 기적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떠나시고 새롭게 교회를 통해 그분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죠. (히브리 2:3,4)교회가 다시 회복될 당시에도 많은 기적과 예언이 있었던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배도로 인해 사라졌던 권세가 다시금 지상에 회복되고 하늘 문이 다시금 열렸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 사명이 다해 기초가 구비되었을 때에는 자연스레 그 기적이나 예언의 빈도가 줄어들 수밖에 없지요.

 

물론 현재에도 기적은 있으며 제가 교회 잡지나 회원들을 통해 들은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실제 죽었던 자가 살아난 경우도 있으며, 천사를 목격하거나 특별한 시현을 보는 경우도 있었지요. 뭐 성경의 내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기적적인 방법으로 도움을 받은 개인적인 경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러한 기적 자체가 복음의 핵심보다 더 강조될 것이 우려되어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지 기적이란 완전히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가 사모해야 할 은사는 그러한 기적의 은사가 아니라 갈라디아서 5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비판하는 자체가 이미 개인의 편견을 기준으로 한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주며, 성경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 12:4-6)

 

은사, 즉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은 다양합니다. 이 선지자에는 이런 능력을, 저 선지자에게는 저런 능력을 주는 것이며, 우리 각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능력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그러한 능력을 주시는 성령은 동일하며, 사역이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도 동일하십니다. 시간을 내셔서 고린도 전서 12장 전체를 읽어 보길 바랍니다. 우리의 신체를 비유하여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지가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님의 논리대로 한다면 우리 신체의 일부인 손을 일러 너에게는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없고,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신체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현대의 선지자들에게 너는 번역도 못하고 기적도 못하기 때문에 선지자라고 불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님께서는 현재는 사라져 버린 기록을 근거로 하여 왜 현대 선지자들이 번역을 못하는가라고 되물으셨는데...그 기록을 다시금 이 지상에 회복하고, 또 그것을 선지자로 하여금 번역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분의 권능 하에 있는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능력 운운하는 것은 (위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선지자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라는 직책은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이 덧입혀지고 조명되어야 하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전부 배제한 채로 너는 왜 그것을 못하냐?”며 비판하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비판일까요?

 

 

 

 

전에도 언급했지만 자신의 논리를 전부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전부 조악한 논리라고 단정짓는 그 모습 자체에 저 역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습니다. 이미 수 년 동안 이 글의 필자와 논의를 해보았지만, 그 논리의 조악함과 지나친 감정의 굴곡에 예전부터 안쓰럽게 보아왔지만, 아직 젊은 나이고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성숙할 나이가 충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변한 모습이 보이지 않다는 점에 더 안쓰러울 따름입니다.

 

 

 

 

문맥과 상황을 무시한 성구 적용이 얼마나 우스운 일임은 다음 예로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외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니후 28:25)

성도들아 두려울 것 없다...모든 것 잘되리..” (찬송가 16)

 

니파이후서에서는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다고 외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지만, 실제 성도들은 모든 것 잘되리..라고 찬송가를 부릅니다. 그럼 정말 모든 것 잘되리라고 노래 부르는 성도들에게 화가 있는 것일까요?? 문맥을 무시하면 이런 해석이 나오지요. 실제 몰몬경의 내용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 잘 되리라 외치는 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며, 찬송가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내용인데 말입니다.

 

힝클리 회장이 말한 것은 현대에도 조셉 스미스와 같은 분량의 계시가 주어지고 있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몰몬경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언급한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의 교훈에 귀 기울이며 하나님의 권능과 성신의 은사를 부인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참으로 우리는 받았으니 우리는 더 필요하지 않다 말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니후 28:26,27)

 

즉 사람의 교훈에 이미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더 이상 하늘에서 주어지는 가르침이 필요치 않다는 내용이지 그것을 힝클리 회장이 말한 계시의 분량과 비교하는 것은, 정말 실소를 금할 수밖에 없는 왜곡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