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모로나이 2011. 7. 28. 00:43

 

 

 

교회에 대한 많은 비판들이 있지만 특히 몇몇 사람들은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대속)의 중요성을 희석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후기성도가 예수의 속죄를 믿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하지요,) 솔직히 그런 사람들을 볼 때면 몰몬경의 한 구절이나마 제대로 읽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선지자인 조셉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 종교의 근본 원리는 사도와 선지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간증, 곧 그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간증이며, 우리 종교에 대한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이 원리에 부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 밖의 것들로 표현된 것들에는 성신의 은사, 신앙의 권세, 영적 은사, 이스라엘 집의 회복, 그리고 진리의 최후 승리가 포함됨")

 

 

즉 우리 주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속죄)가 모든 후기성도의 가르침 중에 가장 핵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1917년 조셉 에프 스미스 회장은 교회의 원리와 관련하여 말씀하실 적에 다음의 선언을 포함하였습니다.

 

 

“교회의 회원임을 고백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피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그리고 속죄의 교리를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그러한 진리를 무시하고 잘못된 믿음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이 교회의 회원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씀드립니다.” (Joseph F. Smith, "Principles of Government in the Church" (September 13, 1917))

 

 

1924년 연차대회에서 히버 제이 그랜트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과 세상의 구속주로 인정하지 않은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관련이 없습니다.” (Heber J. Grant, Gospel Standards (Salt Lake City: Deseret News Press, 1969, 1941))

 

 

브루스 알 맥콩키 장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는 복음의 핵심이며 근본적인 교리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교회의 총관리 역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복음의 영원한 원리이며 핵심임을 지속적으로 천명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지 않는다는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지요?? 정말 알고 싶으시다면 몰몬경을 가져다 예수 그리스도에 해당되는 구절에 밑줄을 긋고 읽어 보길 바랍니다. 이 책이 정말 예수가 구세주임을 증거하는 성스러운 경전임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다음 글은 제가 성찬식 때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관련된 말씀의 일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정말 일요일에 기다려질 정도로 기쁨에 넘칩니까? 아니면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행해 온 것을 반복할 따름입니까? 일요일이면 TV에서 하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고 싶기도 하고, 오래간만에 늦잠을 자고 싶기도 하고, 혹은 날씨도 좋은데 가족들이나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지는 않으십니까?? 이렇게 날씨도 좋은데 불편한 표준 복장 입고 와서 3시간 동안 교회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고역스럽지는 않으십니까??

 

혹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일들로 인해 지치신 분은 없으십니까?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 밖의 일이라고 여겨지십니까? 이제는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으십니까? 제 주변에서 그렇게 느끼고 실제로 고민하다가 잠시 교회 모임에서 쉬고 싶다고 한 경우도 더럿 있습니다. (물론 잠시 쉬고 싶다는 것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서 문제지만요..)

 

사실 저도 불완전한 사람인지라 이런 유혹에 빠져들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더욱 간절히 기도를 드려야할 필요를 느끼고 더욱 심도 깊게 경전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훗날로 미루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고 하지만, 육신의 한 편으로는 귀찮으니 다음 날로 미루라는 그 속삭임은 저를 괴롭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저의 고민은 비단 저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 역시 이러한 고민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22-24)

 

속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지체 속에 다른 법이 나를 사로잡는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바울이 탄식이 곧 저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제가 접했던 많은 분들 중에 실제로 이러한 고민에 사로 잡혀 고민에 빠지거나 자신을 합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스스로를 주님의 가르침에서 멀리 하려는 이들을 봐왔습니다. “나는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 모임에 나올 자격이 없고, 부름을 수행할 자격도 안된다.”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과 자신의 현실과의 괴리 속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어둠의 길로 내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이 봐왔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혹시 자기 스스로 완벽하게 계명을 지키는 가운데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에서 “합당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고, 그리스도처럼 온전해져야 할 필요성에 대해 강조한다고 하여 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하다 결국 그에 도달하지 못해 좌절해 본 적은 없으십니까?? 만약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거짓 가르침”이며 철저하게 속아왔다고 봅니다.

 

우리가 스스로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있고 그로 인해 의로워질 수가 있었다면 그리스도의 대속은 불필요한 것이었을 겁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한 법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 9:12)

 

 

그렇습니다. 태초부터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은 바로 죄로 병들어 있는 죄인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아무리 의롭게 살았다고 공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 (로마서 3:10)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여러 의인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 역시 불완전성에 근거한 죄로 인해 바울과 같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와 같이 죄로 인해,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며 고민하는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가지 해결책을 주셨는데 바로 그것이 속죄입니다. 속죄란 영어에서 말해주듯이 죄로 인해 분리되었던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과 합하게 될 수 있는 방편입니다. 더욱 쉬운 예로 들자면 죄로 인해 납치 되었던 우리를 구출하고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대속이라는 몸값을 대신 지불하신 겁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고전 7:23)

 

철저하게 하나님의 공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지만 그 공의를 만족시킬 대속을 근거로 하여 우리는 의롭다고 선언되는 겁니다.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 13:39)

 

저는 이러한 속죄를 생각할 때마다 죄 많은 저를 의롭다 여겨주시고 당신의 사업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 중에서 “나는 합당하지 않아..”라고 고민하는 분들이 계시면 예수님의 대속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는 필요 없으신 분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누가 18:11-14)

 

 

자신은 철저하게 계명을 지키고 있으니 남들보다 의롭다고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하여 감히 눈을 들어 하늘도 쳐다보지 못했던 세리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세리가 진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불완전하고, 우리가 원치 않은 일을 함으로 곤고한 사람이라 외칠 수 있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갈 때에 그분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해 주실 겁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우리에게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을 내게 희생으로 드릴지니” (3니 9:20) 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헌납의 법이 있어서 우리가 가진 모든 시간과 재물, 심지어 생명까지도 주님을 위해 바치도록 요구받지만 결국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큰 희생은 바로 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 아닐까요??

 

이렇게 우리가 진심으로 드리는 이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이 결국 우리를 온전히 쉬게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 11:28)

 

그러하오니...교회에서 주어지는 의무나 책임감으로 인해, 혹은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 힘들어 하거나 지치시는 분들은 잠시 그 짐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속죄의 선물을 온전히 이용하길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짐을 지워 힘들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31)

 

교회 모임을 통해 이러한 새 힘을 얻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