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실존적 질문을 던진 자들에게...

모로나이 2012. 6. 28. 02:08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 중에 하박국이라는 선지자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의 하박국서를 읽어보면 첫 장부터 그는 하나님께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1:2-4)

 

 

왜 기도해도 들어주시지 않습니까? 왜 죄악과 패역을 목격하게 하며 변론과 분쟁이 일어나고, 정의가 실행되지 않으며 악인이 의인을 괴롭히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 왜 지상에서 만연하는 악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인지 그는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하나님께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는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나 레이맨, 레뮤엘과 같이 자기 육신의 만족을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것과는 달리 의보다는 악이 팽배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답을 얻고자 외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리버티 감옥에서 조셉 스미스가 드린 기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어디 계시나이까? 또 당신께서 숨으신 곳을 가리는 장막은 어디 있나이까? 어느 때까지 당신의 손이 멈추어 계시며, 당신의 눈, 참으로 당신의 순결한 눈으로 당신의 백성과 당신의 종들이 당하고 있는 부당한 처사를 영원한 하늘에서 바라보시며 그들의 외침이 당신의 귀를 파고들게 하시겠나이까? 참으로 오 주여, 어느 때까지 그들이 이러한 부당한 처사와 불법적인 억압을 당해야 당신의 마음이 그들에게 부드러워지시며 그들을 향한 연민의 정으로 애가 끓으시겠나이까” (교리와 성약 121:1-3)

 

 

저는 하박국이나 조셉 스미스가 드렸던 그 간절한 기도를 볼 때마다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번민,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잠시나마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 왜 선한 이들에게 가해지는 수많은 죄악들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시는 것입니까? 그들이 드리는 기도는 단순한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 받는 수많은 사름들에 대한 염려와 하나님의 의로운 원칙이 철저하게 모독 당하는 그 참담한 시기에 대한 절통한 외침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문과 원망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을 것들입니다.

 

그러데...저는 이러한 구절을 읽을 때 또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 하나님은 실존적인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에게 회개하라며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따스한 음성으로 위로와 희망의 소식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이러한 의문과 고통 속에서 답을 찾고자 노력하며 하나님께 외쳤던 이들에게 더욱 깊은 통찰력과 지혜, 위로와 소망을 주십니다.

 

하박국의 경우 그는 계속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울분을 토하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의 질문에 답변해 주심으로서 진실을 향한 그의 실존적 추구에 대해 응답해 주십니다. 실제로 하박국 초반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서 시작된 기도는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바뀐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조셉 스미스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역경과 고난은 잠시 뿐임을 알려주시면서 신권에 대한 더 많은 계시를 주시며 창세로부터 이제까지 나타내지 아니한 지식을 줄 것이라는 약속까지 받게 됩니다. (교성 121:2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의문을 가지고 때로는 울분을 토하며 절통해 하는 이들의 기도나 넋두리에 대해 어찌하여 감히 나에게 원망을 하며 대드느냐?”라고 정죄하시기 보다는 그 마음을 아시고 더욱 많은 지혜로서 축복을 주십니다.

 

실제 회복된 경전을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놀라운 속성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단순히 위에서 명령하고 백성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하기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님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분은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항상 그분의 백성들과 이치를 논하셨고 때로는 확고한 논거를 제시하시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명확하게 알려주시기를 거부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이에 나아오라. 오는 그와는 내가 옛날에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한 것같이 이치를 논하겠고, 또 너희에게 나의 확고한 논거를 제시하리라...그런즉 들으라, 그리하면 내가 옛날에 사람들에게 그리한 것같이 내가 너희와 이치를 논하겠고, 또 너희에게 말하며 예언하리라” (교성 45:10, 15)

 

그리고 주가 영으로써 자기 교회의 장로들에게 이르노니, 자 오라. 너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이치를 논하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여 서로 이치를 논하듯이 우리가 이치를 논하자 이제 사람이 이치를 논할 때에는 사람으로서 이치를 논하므로 사람이 그를 이해하나니, 그와 같이 나 주도 너희가 이해할 수 있도록 너희와 더불어 이치를 논하리라.“ (교성 50:10-12)

 

그리고 이제 보라, 너희 유익을 위하여 내가 이러한 일에 관하여 한 가지 명령을 너희에게 주었거니와, 나 주는 옛날에 사람들과 한 것같이 너희와 이치를 논하리라” (교성 61:13)

 

논거를 제시하고 이치를 논하는 과정에는 필연 묻고 대답을 듣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며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도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하늘을 향해 주먹을 지르며 하나님께 실망과 원망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럴 때 하늘에서 심판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불변의 원칙과 힘들어 지친 이의 어깨를 살며시 감싸 주시면서 함께 울어 주시는 분이 바로 내가 이 회복된 복음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속성이었습니다.

 

하지만....현재 몇몇 회원들은,,,,여러 실존적인 의문과 그에 따르는 절규를 내 나름대로 표현했다고 하여 그 전후 문맥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잘못된 행위라며 정죄하고 회개를 외치는 경우가 있기에 실망스러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지 못했다고 하여 느끼는 실망이 아니라 의문을 가지고 고민하는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잘못 판단한 그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제 주변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얻지는 못하고 오히려 싸늘한 시선만을 받았다면서 교회를 등진 이들이 있습니다. 어찌 이치를 논하고 강력한 논거를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에서 의문을 정죄시하고 죄인 취급을 하는지, 그리고 그런 행위가 마치 의를 수호하고 거짓된 것을 바로 잡는 의인의 태도인양 구는 양 미화될 수가 있는지 정말 가슴이 아플 따름입니다.

 

의문을 가지고 힘들어하는 이들이 있다면.....설령 그런 의문을 해결하지 못해 다소 과격한 발언을 한다고 해도...그냥 정죄하고 바로잡거나 회개를 외칠 생각만 하지 말고 함께 모여 이치를 논하려 해보고, 설령 답을 찾을 수 없다면 같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진실을 추구하려는 그 태도를 격려한다면 분명 그는 스스로 하나님께 매달리고 따지면서 투정을 부릴 수는 있을지라도 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게 깨닫고 신앙적으로 더욱 깊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