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들은 "몰몬 퇴치 운동본부"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진행된 토론으로 "침례는 구원에 필수적인 의식인가"라는 주제로
총 5회에 걸쳐 토론한 내용입니다. 토론을 하면서 느끼는 점은, 성경 여러 곳에서 침례의 중요성과 그 의식이 거듭남이나 죄사함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는데도 몇몇 이들은 특정한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러한 구절들을 무시하거나 왜곡함으로서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의 답변입니다...
몰몬경 니파이후서 31:5에 나오는 “모든 의를 이루시기 위해 물로 침례를 받으”시는 부분을 지적하면서 의 자체인 그리스도를 깔아뭉개는 짓거리라고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비단 몰몬경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도 나오는 겁니다. 침례를 받으려고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라면서 말리는 침례요한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 3:15)
예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시면서 침례를 통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운영진의 이러한 글들을 보면서 성경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만 몰몬경에 비슷한 내용이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비판하고 해괴망측하며, 심지어 그리스도를 깔아뭉개는 짓거리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주인장의 의도를 이해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러신 것인지, 아니면 몰몬경을 비난하기 위한 혈안에 다른 구절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 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침례란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죄사함을 위해 반드시 받아야 할 계명임을 지적합니다.
누가는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침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누가 7:30) 베드로 역시 이방인들에게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사도 10:48) 게다가 이 의식의 중요성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사도들에게 주신 다음의 말씀으로 다시금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마태 28:19)
침례가 선택적인 것이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께서는 마지막 말씀 가운데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침례를 베풀라는 명령을 주셨다는 것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침례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며 계명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한 3:5)
몇몇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물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음 구절들을 비교해서 살펴보면 물은 중생의 씻음을 의미하는 침례요 성령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벧전 3:21)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디도서 3:5)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이처럼 예수께서는 침례와 구원의 관계에 대해 명확한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냅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마가 16:16)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믿지도 않는데 침례만 받는다고 구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침례를 받지도 않으면서 믿기만 한다고 해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증으로 운영진은 고린도전서 1장을 이용해서 마치 사도 바울이 침례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해 다행스럽게 여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고전 1:13절부터 잘 보십시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에 대한 문맥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 분파가 일어나는데 그 중에 일부가 자신에게 침례를 사람을 추종하여 이러이러한 파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나는 누구에게 침례를 받았다, 나는 저 사람에게 침례를 받았다..뭐 이런 식으로 분파를 만들고 논쟁이 있어나 봅니다. 그런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고 분파를 조장하는 일이 없도록 몇몇 사람에게만 침례를 준 것에 대해 다행스럽다고 한 겁니다. 즉 바울 자신에게 침례를 받았다면서 분파를 일으킬 사람들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안심한 것이지 그가 침례 자체를 거부하거나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만에 하나 사도 바울이 침례를 부정하고 그 의미를 폄하하는 자였다면 어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겠습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7)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 2:12)
게다가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극적으로 회심할 때에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사도 22:16)
는 말을 하고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죄사함을 위한 침례를 받은 그가 어찌 성경 전체에서 강조하는 침례를 부정했다고 하는지요??
파멸님 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할 말은 더 많은데 A4 2장 내외이기 때문에 요점만 정리합니다.)
1. 침례는 행위로 인한 구원인가?
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해야 하는 것을 마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마땅하다고 하신 것을, 실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죄사함을 위해 받은 침례라는 의식을 “행함으로 인한 구원”이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으로 왜곡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리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라 주님께서 명하신 것들을 행하는 것과 병행되는 믿음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야고보 2:20)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 2:26)
“오직 믿음”이란 모토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부르며 성경에서 빼내려고 했던 것처럼 야고보서의 구절들은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의롭게 행동을 해서 구원을 쟁취하려는 율법주의자 같은 태도도 심각한 문제입니다만 “오직 믿음”이란 말로 행함이 전혀 없고 무슨 일을 행하던 그저 지적인 동의나 말로 고백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교리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자 보세요. 침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마가 1:4)를 전했습니다. 베드로 역시 많은 이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사도 2:38)라고 외쳤고 실제 그의 말대로 수 천명이 침례를 받았습니다. 눈이 먼 사울을 불러 침례를 준 아나니아의 경우도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사도 22:16)고 하였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침례를 죄사함을 위한 방식으로 전하고 있는데 왜 몇몇 사람들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구절을 곡해하여 침례에 대한 구절을 애매모호하게, 심지어 상징적인 것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 의식의 강조가 마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인양 왜곡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특정 구절 때문에 성경 전체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희석시키는 것이 이단의 행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2. 침례 받지 않은 강도의 이야기.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오해하여 생전에 어떤 일을 저질렀거든 죽을 때 (침례고 뭐고) 예수에 대한 믿음만 고백하면 천국에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이런 식으로 왜곡해서는 안됩니다. 예수 우편에서 죽어간 강도는 생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사실 이 강도 역시 처음 못박혔을 때 예수를 욕했습니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태 27:44). 그러다가 예수의 최후의 모습을 보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나중에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한 것 뿐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 마음의 의도를 보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럼 잘 살펴보시지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뒤에 강도와 함께 천국에 간 겁니까?? 아닙니다. 훗날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분을 잡으려는는 그녀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요한 20:17)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이 순간까지 아버지가 계신 천국에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운명하시고 부활하신 그 사이에 어디에 가 계신 것일까요?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18,19)
이 구절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모든 이들의 죄를 위해 죽으셨을 때 영으로 올라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다고 알려줍니다. 즉 영의 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겁니다. 후기성도들은 이들이 생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자들로서 예수께서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신 것으로 봅니다. 실제 벧전 4:6에서도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라고 알려줍니다. 그럼 논리적으로 볼 적에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강도에게 하신 약속, 즉 오늘 네가 낙원에 있겠다..는 말씀은 그의 이전 생활과 상관없이 구원을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의 세계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시겠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실제 침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초대 교회에서는 심지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고전 15:29)를 베풀기도 했습니다.
3. 침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은 이야기
님을 비롯한 몇몇 분들은 고넬료나 사도 바울과 같은 이들의 몇몇 예를 들어서 침례를 받기 전에도 성령을 받은 예가 있음을 지적합니다. 도대체 왜 이런 예를 든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결론은 먼저 받거나 나중에 받거나 “물과 성령”으로 침례를 받은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구원받은 자들은 하나같이 물의 침례를 받았고 이런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왜 하나같이 침례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이야기를 보지요, 왜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했습니까? 45절을 보면 잘 나옵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사도 10:45)
당시에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으며 물론 침례를 베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초의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성령이 부어주심으로 인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입니다. 즉 여기서 성령의 역할은 그전과는 달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는 하나의 신호탄, 증거로서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렇게 성령을 통해 증거를 얻은 이방인들에게도 “물로 침례 줆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어디에 침례가 중요하지 않다고 나옵니까? 복음을 깨닫고 성령의 증거를 얻은 이들이 먼저 한 것이 바로 침례였지요??
사도 9장에 나오는 사울의 개종기도 그렇습니다.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자로서 많은 기독교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런 주님께서는 이런 사울을 변화시켜 전도자로 삼아야겠는데 아나니아가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일 때 주께서는 사울을 이방인들을 위한 전도자로 삼기위한 증거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였던 것입니다. 당시 사울이 성령의 임재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처음 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침례였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사도 9:18)
앞서 언급한 구절에서도 알듯이 이 침례를 “죄사함을 위한 침례”였습니다.
“이제는 왜 주저하느냐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사도 22:16)
그 외에도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된 이들이 처음으로 한 것이 바로 침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빌립의 전도를 통해 복음을 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처음 한 것도 침례요(사도 8:12), 에디오피아의 환관도 처음 한 것이 침례였습니다. (사도 8:34-36)
이렇게 성경에서는 참된 믿음, 즉 주님이 명하신 것들을 행하는 것과 병행되는 믿음을 행사한 이들의 기록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럼에도 왜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명백한 구절을 두고서, 단지 “오직 믿음”이라는 구절을 근거로 침례에 대한 모든 구절들을 부정하거나, 그 중요성을 깍아 내리는 것일까요?? 이것이 갈라디아에서 경고한 “다른 복음”(갈 1:7)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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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야고보서의 구절에 대한 바른 이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님도 인정한 것처럼 야고보서 2장의 내용은 “진정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즉 믿음이 있다고 하고 행함이 없다면 그 믿음은 능히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고 믿고 한들, 예수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들을 행하지 않으면 그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이죠. 너무나도 쉽고도 명확한 내용 아닙니까? 하지만 님은 “진정으로 믿으면 그 믿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선행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와는 달리 개인의 노력이 요구되는 행함은 천국 가기 위한 억지 선행이라 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이 나옵니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2:12)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복종해서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했습니다.” 여기에 개인의 의지가 전혀 들어설 여지가 없이 그저 믿으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순종을 이야기합니까? 순종이 자연스레 나오는 것이라면 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권고합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거짓된 주장을 믿는 자들을 언급하면서 이들이 “복종치 않는 자”(디도서 1:16)라고 정죄합니다.
물론 우리의 순종은 철저하게 자발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행해져야 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 행함을 근거로 심판받는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 16:27을 보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는 말씀이 있고, 로마서 2:6에서도 “행한대로 보응하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우리 각자는 심판대 앞에서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리라(고후 5:10)고 했으며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신다는 말씀(계시록 2:23)도 나옵니다. 이렇게 성경 여러 곳곳에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며, 믿음에 근거한 행함으로 심판받겠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왜 성경에 있지도 않은 말을 애매하게 둘려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2. 십자가 강도의 문제
물론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제가 그걸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ㅎㅎ 제가 말씀드린 핵심은 예수께서 강도에게 약속하신 낙원은 구원받는 자들이 거하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가게 되는 천국은 죽은 자의 영혼이 바로 하늘로 올라가게 되는 곳이 아니라 예수 재림 이후(살전 4:16) 모든 이들이 부활하고(요한 5:29) 심판대에 나와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받고(고후 5:10) 최종적으로 가게 되는 곳입니다. 죽어서 바로 올라가는 곳은 부활의 그 날을 예비하는 임시적인 장소인 것이죠. 죽어서 바로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면 무슨 부활이 필요할 것이며 심판의 날이 필요하겠습니까?
다시 말해 생전에 복음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던 강도에게 낙원이라는 곳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복음을 들으며 부활의 그 날까지 기다리게 된다는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죽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이야기와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이야기는 추후에 더욱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
만에 하나...정말 강도가 간 곳이 구원받는 자들이 가게 되는 천국이라고 한들...그런 예외적인 상황이 성경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는 침례의 중요성을 무너뜨리는 근거로 사용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생전에 복음을 듣고 선택하여 생활할 기회가 없는 자들에게 단순히 믿고 침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여 바로 지옥에 보낼 그런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고넬로 등의 문제
님을 비롯해서 몇몇 분들은 성령을 먼저 받은 사람이 죽었다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이냐는 식의 극단적인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앞서 언급한 십자기 위에 강도의 예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고자 했으나 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졌다고 하여 바로 지옥에 보내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왜 그런 극단적인 예를 자꾸만 만들어 현재 우리가 충분히 할 수도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회피하는 도구로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을 기회가 없이 죽은 자들은 지옥에 가야 하냐며 질문하는 이들이 정작 자신에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거부하는 이들과 뭐가 다릅니까?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지금 님에게 중요한 일은 지금이 바로 은혜 받을 때요 구원의 날이라는 것입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마가 16:16)라는 말씀이 주어졌고 실제로 우리가 믿고 침례받을 기회가 충분히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대로 행하지 않으면서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이들의 예들을 자꾸만 들어 우리가 현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린다면 이 얼마나 애통할 만한 일인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님이 착각하신 것처럼 “침례가 믿음과 별개로 구원의 필수조건”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침례를 여러 번 받아도 믿음 자체가 없으면 구원과 관련이 없는 의식에 불과합니다. 야고보서에 말한 참된 믿음이 “믿음+행함”이었던 것처럼 믿음과 침례와 같은 의식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동시에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믿음과 침례를 분리해서 이해하려는 것은 예수께서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과 별도의 “다른 복음”(갈 1:8)인 것입니다.
여기서 질문....
자꾸 본질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질문을 드립니다. 본질을 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계속 무의미한 이야기만 반복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1. 님은 애초에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한” 예수님의 침례를 “의 그 자체인 그리스도를 깔아뭉개는 짓거리입니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마태 3:15)의 참된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2. 침례에 대한 많은 구절이 있었는데 한구절만 다시 질문합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마가 16:16)라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단지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과 어떻게 조화를 시키겠습니까?
3. 우리가 구원받을 진정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단순히 믿고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아니면 행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믿음입니까??그것도 아니면 무엇입니까??
저는 님의 생각을 듣고 싶은 겁니다. 그저 몇몇 분들의 블로그나 무물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가 질문하여 나온 답변을 짜집기 하지 마시고 님의 생각 말입니다.
1. 예수님의 침례
님의 글을 여러 번 읽어 봤습니다만 도무지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만 이해를 못하는 건가요?
무턱대고 님은 “니파이후서 31:5의 논지를 잘 생각해 봅시다.”라고 해놓고서
1) 거룩한 존재도 의를 이루려면 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2) 거룩하지 못한 우리는 반드시 물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이 두 개의 논리가 완전하게 이상하게 된다면서 이것이 예수를 깔아뭉갠다고 합니다. 아니 뭐가 이상하다는 것인가요? 완전하신 예수께서도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침례를 받으셨는데(‘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마태복음 3:15)) 하물며 불완전한 우리가 침례를 거부할 수 있겠냐는 것이 뭐가 이상하며, 이것이 어찌 예수님을 깔아뭉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횡설수설로 보여서 말입니다. 다시금 명확하게 설명하기 바랍니다.
2. 복음서 속 침례 관련 구절
님은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를 혼용하여 사용합니다. 따라서 성경 곳곳에 나오는 세례는 성령세례로 볼 수 있습니다.”라고 주장을 하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물 침례와 성령 침례를 혼용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침례는 성령 침례다??? 이건 무슨 논법인가요?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제시한 것이 마태 28:19와 마가 16:15절을 비교한 것이더군요 그리고 이에 대해 "침례와 복음이 상당 부분 동의어로 사용되기 때문에 복음 속 침례는 대체로 성령 침례라 합니다. 그리고 “물세례보다는 성령세례가 복음과 더 자주 유의어로 쓰일 만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더 확실한 구원의 증표가 되기 때문입니다.”라는 근거 없는 개인적인 판단을 할 뿐이구요.
님. 님이 인용하신 구절을 비교해 봐도 사도들이 전한 복음 안에 침례라는 의식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 2:38)
자 베드로의 말씀을 보세요. 이것이 복음입니다. 즉 회개하여 침례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언급한 죄사함을 위한 침례가 성령의 침례입니까?? 물의 침례를 받고 죄사함 받아야 성령을 받는다 했죠?? 그런데 이 약속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그 다음 구절에 나옵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39절)
그렇습니다. 오순절 당시 모인 사람들 뿐만 아니라 모든 먼 데 사람, 즉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겁니다. 물론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겠죠.
혹자들은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사도 1:5)는 구절을 들어 물의 침례는 중요하지 않고 성령의 침례만 중요하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으나 전후 문맥을 잘 보길 바랍니다. 사도들은 침례 요한을 통해 받은 물의 침례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물의 침례를 받은 그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성경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형태입니다. 예수께서도 모든 의를 위해 물에서 침례 받으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요한 3:5) 베드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아야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고요..성령의 선물도 실상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사도 5:32)
그런데 님은 왜 자꾸 성경에서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함으로 복음을 왜곡합니까??
또 어떤 분은 우리가 죄씻음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의 피를 통해서인 것이지 침례라는 행위가 아니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죄를 씻음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 곳곳에서 말하는 것처럼 침례는 죄사함과 관련된 것이 맞습니다.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요한1서 5:6-8)
보세요. 물과 피, 그리고 성령이 하나라고 해서 진리를 증언한다고 합니다. 물(침례), 성령(성령의 침례), 피(속죄). 이것이 하나가 된다고 한 것이죠.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죄사함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마음에 안든다고 하나를 임의적으로 빼서는 안됩니다.
3.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는가?
저는 님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배척하는 “행위로 인한 구원”은 우리가 특정한 업적이나 목표를 성취해서 구원을 쟁취하는 것과 관련된 겁니다. 당시 왜곡된 율법사관을 지닌 당시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이런 저런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겠다는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죠. 그런데도 성경을 잘 모르는 분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것들을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그것을 꼭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는 율법주의적인 사고관으로 비판을 한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누가 10:28)고 해서 행해야 그러면 살리라고 했는데, 그럼 예수님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율법주의자입니까?? 히브리 11장은 우리가 믿음의 장이라 부르며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그 장들은 그들의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행한 것들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지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우상의 땅을 “떠나” 아들인 “이삭을 드렸다”고 알려줍니다. 즉 믿음의 장이라 알려진 히브리서 11장에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 오해를 하셔서 다시금 말씀드립니다. 제가 강조하는 행위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도 없이 침례를 받고 계명을 지킨들 그것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항상 믿음으로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 행위 자체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보잘 것 없었을지라도 주님은 그러한 행함을 통한 믿음을 받아들이셨던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행하지도 않고 단순히 입으로 고백하거나 지적인 동의를 했다고 구원을 주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 제가 성경에서 배운 바입니다.
1. 죄송합니다만 전 님의 글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 3:15절의 말씀이 예수께서 모든 이들을 위해 모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우리가 당연히 따라야 하는 것이라면 침례라는 의식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 당연하거늘 이것이 왜 니파이후서 31:5절의 말씀이 문제가 된다는 식으로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카페에서 이 구절로 질문하니 그런 답변 밖에 없었죠?) 예수도 계명을 지킴으로 힘을 얻는다? 이런 결론이 어떻게 갑자기 튀어나온 것입니까? 예전에도 항상 오락가락, 횡설수설하시는 글을 올리시더니 지금도 그러신 겁니까? 다른 분들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운영진의 답변을 제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쉽고 명확하게 알려주실 분 없으신가요?? 이렇게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고 핵심조차 찾을 수 없는 글들을 올린다면 토론을 진행하기가 어렵습니다...시간낭비죠...ㅜㅜ;;
2.사도 2:38에 나오는 침례가 성령 침례라구요?? 근거가 전혀 없지요. 침례를 받기 전에 성령을 받은 이야기는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신호였다고 했습니다. 님이 다른 번역본의 성경을 보면 더 잘 이해할 것이라고 한 공동번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를 용서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했죠? 순서를 잘 보세요. 세례를 받고 죄 용서 받으면 성령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렵습니까? 여기서 “그리하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이는 “그리고”라는 의미와 “그리하면”이란 뜻으로 번역 가능한데 앞 문장이 명령문이기 때문에 여기서 나오는 “카이”는 두 번째 의미, 즉 ‘그리하면’으로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 사용되는 겁니다. 즉 회개와 죄사함을 위한 침례가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조건이란 거지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사도 2:38에 나오는 침례를 성령의 침례라 하니 너무 황당한 것 아닙니까?
사도 8:36에 나오는 이디오피아의 환관의 침례 구절을 들어 마치 글의 분위기가 “마침 물도 있으니 침례를 받자”라는 식으로 구원의 필수조건이라면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전후 문맥과 무관하게 개인의 생각을 집어 넣은 엉터리 해석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지만) 빌립이 이디오피아의 환관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침례에 대하여 설명을 했을 것이란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가는 도중 물이 있자 바로 침례를 받아야겠다고 한 것 아닐까요? “무슨 거리낌이라도 있는가?'라고 반문한 것은 그저 우연히 물이 있자 ”그냥 침례나 받을까“가 아니라 복음을 믿고 있기 때문에 침례를 받는데 장애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한 반문 형식의 의문문을 사용했습니다. 그 다음 구절(37절)을 보세요. 개역한글판에는 ”없음“이라고 나와 있지만 흠정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빌립이 말하기를 ‘만일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합당하니라” 고 하니 그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나이다”라고 하더라“ (사도 8:37)
즉 침례를 받고자 하는 환관에게 “당신이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침례 받을 수 있다”고 하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39절에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환관에게 침례를 준 것 아닙니까? 이게 어떻게 침례의 중요성을 깍아내리는데 사용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 3:5절에 나오는 물이 회개를 의미한다는 주장 또한 근거 없는 엉터리 해석입니다. 님이 다니시는 가톨릭에서도 세례성사를 할 때 요한 3:5절 구절을 이용해서 이 구절에 나오는 물을 세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데 님은 그 구절을 부정하기 위해 님이 속한 가톨릭의 교리 자체까지 무시하시는군요. 호크마 주석에서도 이 구절에 나오는 물에 대하여 “이를 '세례 요한의 세례' 혹은 '기독교의 세례' 와 관련시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연적 출생'으로 보기도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단어가 회개와 관련된다는 말은 언급조차 없습니다. 물을 회개라고 해석하기 위해 로마 6:6을 애써 연결하려고 하는데 오히려 로마 6:3,4에서는 우리가 매장되어 부활하는 의미를 가진 물의 침례를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린 것 아닙니까? 성경을 보려면 전체 의미를 보고 전후 문맥을 보시라구요.
3. 성경의 구원관이 행위가 동반되는 믿음이 맞다고 인정하시니 다행이군요. 언제는 믿고 고백만 하면 된다고 하시니 이제는 생각을 바꾸신 건가요?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침례를 행하는 것이 진정한 행위가 동반된 믿음이라는 몰몬교회의 가르침을 인정해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님은 행함이 동반된 믿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 “몰몬교회의 율법주의는 널리 잘 알려져 있다”면서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용하는 것이 십일조와 지혜의 말씀을 다룬 교리와 성약 구절이지요. 이 부분은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설명 드리겠지만 이러한 계명들 역시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한행함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엑스모 블로그에서 몰몬교의 율법주의에 대해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시는데...보세요..엑스모는 성경 자체를 부정하고 심지어 하나님이나 예수님조차 부정하는 극단적인 무신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율법주의자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지 않은가요? 그들은 믿고 고백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일반 개신교회의 주장조차 망상으로 치부하시는 것 몰랐습니까? 엑스모에서 그렇게 주장했다고 “이미 개신교회의 믿음은 망상이라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라고 결론을 지어도 된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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