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글을 읽어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하여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그 후에 강제로 그를 눕히고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긴만큼 머리, 다리를 절단해서 죽이고, 반대로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추어서 다리를 늘려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특정한 교리(침대)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성경)의 몸과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 구원 받은 이들은 구원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는다는 예정론. 행함이란 믿음의 본질을 흐리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오직 믿음설. 저는 이러한 교리를 기준으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왜곡하고 비틀고 심지어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 이번 토론에서 여러 차례 확인해 봅니다. 더욱이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은 여러 신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마치 이것이 평범한 사람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지식인 양 포장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금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오직 성경을 사용해서 설명드립니다.
(1)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요한1서 4:9) 저는 그것을 부정한 적도 없으며 그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분을 지적으로 동의하거나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하여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13:24절을 보시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그저 믿는다고 구원받거나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자동으로 천국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가는 넓은 길과는 달리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가도록 힘쓸 좁은문이 있는 겁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처럼 주여주여 믿음으로 부르짖는다 한들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며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행해야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그것이 예수에 대한 참된 믿음입니다.
(2) 그러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 6:4-6)
잘 보세요. 이들은 애초에 구원받지 못했던 자가 아닙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심지어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어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란 말인가요? 과연 지금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 중에 얼마나 이런 경험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이죠.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벧후 2:20,21)
이 구절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자들이, 의의 도를 안 자들이 나중에는 다시 그 중에 얽매어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에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나중에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
로마서에서 그토록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바울 역시 자신이 복음을 전파한 다음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9장 24절에서는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고합니다. 즉 영생을 얻기까지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라는 권고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출애굽 기사에서 더욱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로 발라 장자의 죽음을 피하게 되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것으로 예수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자마자 바로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까? 아닙니다. 죄로 인해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대부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멸망하지 않았나요?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서 5절)
이는 우리의 모습을 전형하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애굽이라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라 할지라도 끝까지 복음 안에서 견디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그 이후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멸망하여 천국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란 단 한 번의 고백으로 천국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 2:12)고 하여 우리의 구원은 복종과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과정이라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 10:22)고 하시지 않았나요? 말일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 24:24)고 했으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로 선택받은 자들도 미혹당할 수 있고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신 거죠.
(3) 그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몇몇 이들은 로마서를 비롯한 몇몇 구절들을 인용해서 행함은 필요없고 오직 믿음이면 구원을 받는다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이에 대해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사례를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로마서 4:9)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로마서 4:9,20,22)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 여겨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야고보서의 다른 구절과 병행해서 읽어 보시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 2:21-24)
즉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칭하게 된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나 고백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마지막 구절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다시 읽어 보세요. 믿음으로만은 아니고 행함으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성경 야고보서에는 분명히 진정한 믿음이란 ‘믿음+행함’이라고 말해주는데 오직 단어에 집착해서 오직 믿음만 하고 있으니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 못하는 것이며, 루터같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고 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부르며 정전에서 빼버리려고 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침대를 기준으로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요?
그럼에도 몇몇 분들은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진정한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돌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중요하게 봅니다.”라고도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기뻐보신다는 말인가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요한 16:2)
훗날 몇몇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중요시 여긴다면 그분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저지른 이런 일들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상대방을 때리면서 “이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거야”라고 외치면 그게 사랑입니까?
우리가 행하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우리의 의를 자랑하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빨간 신호등에는 도로를 건너지 마라고 지침을 주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지만 그분의 말은 순종할 필요가 없어.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셔”라고 판단해서 빨간불에 도로를 건너면 어떻게 됩니까? 생각해 볼 것도 없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아무런 일을 행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을 보장받는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성경을 편견없이 읽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은 우리가 스스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구원자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심판받게 되는 근거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거나 중요시 여기지도 않으면서 “오직 믿음”만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님을 다음 성구들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분명한 음성으로 전해주는 것들을 왜 복잡한 인간의 신학을 동원해서 왜곡하려는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마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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