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토론내용

낙원을 약속받은 강도의 이야기

모로나이 2014. 4. 13. 01:41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누가 9:23,24)

 

그리스도인의 길은 어떤 이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힘든 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들은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여 매일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매어 죽는 일을 자랑으로 여겼다고 알려줍니다. 그 이유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고 한 것처럼 매일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이러한 예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아무런 행함도 없고 회개의 열매도 없이 그냥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복음이라 합니다. 그래서 생전에 정말 즐길 것 다 즐기다가 죽기 전에 침상에서 예수를 믿습니다 아멘..만 외치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의 거짓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적에 옆에 있던 강도가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에 낙원에 있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을 대표적인 예로 언급합니다. 만약...정말 이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생전에 강도와 같은 짓을 하다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만 고백하여 구원을 받는다면 성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공부하며 그곳에 기록된 여러 증인들은 왜 죽음을 각오하면서 복음을 믿고 전하였던 것일까요? 그냥 편한대로 하고 싶은 일 다 하다가 말년에 죽음 앞두고 나는 이제 예수를 믿습니다 아멘!“하면 구원 받을텐데 말입니다. 교회는 왜 다닙니까? 그냥 일요일에 실컷 놀러다니고 예수를 믿습니다..만 고백하면 될 것을? 왜 성경을 읽고 연구합니까? 예수를 믿으면 끝나는데 말이죠...

 

예수 옆에 있던 강도의 예는 성경에 등장하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며 그것이 성경 전체를 왜곡하고 바꿀 만한 핵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도가 만약 생전에 복음을 알았더라면 강도짓을 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을까요? 그가 생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는 점을 왜 간과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수께서는 생전에 복음을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영의 세계에서도 복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벧전 4:6) 왜 그렇게까지 해야했던 것일까요? 기회가 없었더라면 그냥 그 양심에 따라 사는 여부에 따라 구원을 판가름하면 안되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 4:12)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의 방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전에 정말 기회를 받지 못한 이들에게조차 예수라는 이름을 전해 믿고 구원받게 하시는 거죠. 십자가의 강도 역시 그런 이였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도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해도 그 복음을 듣지 못했을 이들은 많았을 겁니다. 그런 이들에게조차 복음을 듣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것이죠. 따라서 예수께서는 그를 기억해달라는 강도에게 구원의 약속을 준 것이 아닙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 23:43)는 겁니다. 언제요? 네 오늘입니다. 즉 예수께서 죽으신 바로 그 날을 의미합니다. 그럼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에 어디서 무엇을 하셨단 말인가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벧전 3:18,19)

 

그렇습니다. 육체로 죽임을 당하셨을 때 영으로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20절에는 그 영들이 노아의 홍수 때 죽은 자들이라 표현하지만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당한 이들을 대표로 하는 것이지 고작 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셨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실제 예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는 말씀처럼 강도의 영혼도 분명 예수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만에 하나...강도가 영의 세계에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지겠다는 의미가 아니라..실제 구원이 보장된 개념이었다 하더래도 그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볼 수 있는 예외일 뿐 일반적인 개념으로 볼 것들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줄곧 믿고 침례를 받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침례가 문맥적으로 상징적인 경우로 사용될 경우도 있지만 분명한 의식으로서 표현된 구절마저 상징이나 불필요한 것이라며 왜곡하는 것이야 말로 다른 복음이요 다른 영이며 다른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