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스테이크의 비전을 아시나요? ‘행복한 시온을 건설함’이란 주제로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이 함께 행복하도록 합시다. 진정한 행복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와드 주제 성구는 어떻습니까? “참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와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고 행복하게 살았더라”(모로 10:32, 니후 5:27)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바로 이러한 목표와 일치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는 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신앙생활’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이야기들은 역설적이게도 다른 점들을 시사해 준다고 봅니다. 즉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행복한 웃음으로 다가올지는 몰라도, 사람들 앞에서는 정말 행복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지 몰라도 그 내면에는 나름대로의 갈등과 번민, 고민으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분명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복음 안에서 행복하자”는 구호를 외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일부로 웃음 짓는다고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행복이란 모든 인간의 존재 목적입니다. 니파이후서 2:25절에서도 사람이 존재하는 것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 복음이란 말 자체도 복된 소식, 즉 기쁜 소식으로 그것을 알고 믿고 있는 우리로서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곧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교성 59:23)는 말씀처럼 앞으로 올 세상에서의 영생이 근본적인 이유이기는 하겠지만 험난한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복음을 통해 평화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거친 세상에서 살고 있고, 나름대로의 인간적인 약함과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갈등할 수도 있고 힘들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믿고 있다고 하는 분들이라면 마땅히 행복해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행복과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 복음을 통한 행복한 모습이 자연스레 베어 나와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된다면 한 번쯤은 자신의 모습을 뒤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이 복음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아마 다양한 방법들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훌륭한 프로그램이나 교회 회원들의 따스한 과심과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토대로 세워진 우리 가족들과 함께할 때도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행복의 방법에 대해 기도와 경전 연구, 성전 예배, 계명에 충실함과 같은 방법들을 제시해 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행복의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대해 복음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힘을 이해하고 적용한다.*
저는 이 안에 모든 행복의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다소 추상적이며 우리 인간의 지혜로 이 속죄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실상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해 한도에서 허락된 지식과 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속죄를 (불가능하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지만 “불완전한 우리를 완벽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해주는 권세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불완전합니다. 로마서 3:23에 의하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교리와 성약 1:31을 보면 주께서는 “죄를 털끝만큼도 묵과할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죄를 단 하나도 용납하지 않으신 하나님, 그리고 죄를 범한 모든 사람들.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들은 예수께 옮겨졌고 그 분은 십자가에서 그 죄를 전부 사했기에 우리는 죄 없는 신분으로 하나님께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실수하고 그릇된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우리지만 예수님과 맺은 성약에만 충실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속죄를 근거로 우리를 의롭다고 판단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와 맺은 성약에 충실하고 그분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해 흘리신 속죄의 피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같이 부족한 이를 의롭다 하시고 주님의 일을 행하도록 부르셨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3:16에서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그분의 가장 소중한 아들이신 예수를 보내주시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전가하신 다음 희생 제물로 바치게 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을 때 사람은 행복한 법인데 그것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그 증거로 그 아들을 보내 주셨다는 그 사실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 사랑을 깨닫지 못했을 때 우리가 교회에서 수행하는 부름이나 지켜야 하는 계명들은 자칫 우리에게 짐으로 느껴질 수 있으며 자칫 그러한 느낌에 계속 사로잡힐 경우 교회가 우리에게 행복을 주기 보다는 우리를 얽매이게 하는 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속죄를 이해하고 있다면....스스로 의롭게 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그렇게 되지 못하는 한계로 인해 좌절할 필요도 없으며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로 내가 받은 부름에 대해 힘들어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스로 의롭게 된다면 예수의 속죄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스스로의 지식과 능력으로 교회의 부름을 수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왜 신권의 권능선을 통해 부름을 주시겠습니까?
눈물의 선지자로 불리는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았을 때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예레미야 1:6) 그랬을 때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예레미야 1:7,8)
부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그에 대해 힘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아이라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너는 아이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부족해서,,,능력이 없어서,,부름을 수행하기 힘듭니다..라는 말에 “너는 부족하다고 하지 말고 능력이 없고 힘들다고 하지 말라” 두려워 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하려고 해서입니다. 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테니 아이라 하지 말라고 하신 그분의 말씀을 믿지 않으십니까? 불완전한 우리를 위해 예수께서 그 귀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의인이라 칭하셨는데 왜 합당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이 행복한 신앙 생활을 힘들고 단순히 수행해야 할 의무로만 보십니까?
예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 11:28-30)
복음은 우리의 짐을 무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쉼을 얻고 안식을 누리게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멍에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메려 할 때는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주님과 함께 멜 경우는 오히려 우리를 평안하게 만들며 우리의 맘의 쉼을 얻게 합니다. 부름이나 계명 등이 짐처럼 느껴지고 있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수행하는 이 일들은 내 힘과 지혜로 하려는 것인가...아니면 주님과 함께, 주님의 방법대로 하고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힘들게 되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는 분명 회원들 사이에 갈등이나 오해가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각기 개성이 다르고 이해 관계도 다른만큼 아무리 교회 안이라 할지라도 불가피하게 그러한 갈등이 일어날 여지는 충분히 있습니다. 혹시 교회 내 인간 관계로 인해 교회 생활이 힘들게 느껴지는 분이 있습니까?
속죄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해 줍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저 표면적으로 의롭게 생활하려는 이들의 공통점은 다른 이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확률이 높다는 사실입니다. 속죄는 우리 모두가 불완전한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또 만일 사람들이 내게로 오면 내가 그들에게 그들의 연약함을 보일 것이라. 내가 사람들에게 연약함을 주는 것은 그들로 겸손하게 하려 함이요, 내 은혜가 내 앞에 스스로 겸손하여진 모든 자에게는 족하니, 이는 만일 그들이 내 앞에 스스로 겸손하여 나를 믿는 신앙을 가지면, 내가 그들을 위하여 연약한 것들을 강하게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디서 12:27)
우리들이 예수께 다가가는 순간 우리의 연약함들은 온전히 드러납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기 위함이며, 그렇게 겸손한 자들에게 비로소 주님의 은혜가 풍부하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이기에 속죄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 의롭게 선언된 자인만큼 항상 감사하고 겸손하게 살도록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이렇게 의롭게, 표준대로 살고 있는데 저 사람은 그렇지 못하구나...그렇기 때문에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1세기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러했습니다.
그들은 “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누가 18:11,12) 자신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세리의 경우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절)고 했습니다. 이 두 부류를 언급하신 다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죠.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14절)고 말입니다. 즉 진정한 의인은 자신의 힘으로 의를 추구하기 위해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비판한 것이 아니라 감히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며 가슴을 치고는 자신이 죄인이니 불쌍히 여기소서라면서 온전히 하늘을 의지했던 그 세리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복음적 관점을 유지하여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의롭게 되려고만 하지 말고 자신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의롭게 인정받은 이며 그렇기에 부족하지만 그분을 사랑하기에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실수와 결점을 자신의 관점으로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저렇게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셨기에 예수를 보내주신 것이며, 또한 그런 이들을 들어서 사용하시는 사실에 오히려 감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같은 이도 주님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희망에 감사를 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고 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하고 계명에 충실하고 모든 모임에 충실하게 참여한들 자신의 힘과 능력 자랑하고 상대방을 비판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일을 행한다면 이 모든 것들은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며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소음이 될 뿐입니다. 형제와 자매를 비난하는 일들은 그들을 위해 흘리신 예수의 속죄의 피를 헛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는 달리 누군가에게 그런 말들을 들었다고 한다면 이에 대해 마음 쓰지 말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그들의 복리를 위해 축복을 빌어주는 것도 하나님의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강조하고 있는 계명을 지키라거나 기도, 경전 읽기, 가정의 밤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 부담이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속죄의 의미를 분명하게 각인시키고 기억하도록 만들어진 장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인간은 망각의 존재인지라 이렇게 주기적으로 속죄의 의미를 기억하게 하는 도구들이 없다면 우리는 금세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하려 아등바등하다가 지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고 결국은 행복과는 무관한 무거운 의무와 책임만 남은 교회 생활이 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복음을 통해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을 것이란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성 59:23)
'개인적인 글 > 개인적 생각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어떻게 후기성도(몰몬)가 되었나? (0) | 2014.11.19 |
---|---|
예장통합. 몰몬교 이단 규정???? (0) | 2014.10.01 |
주님 그들을 위로해 주십시오.. (0) | 2014.04.29 |
교회의 부름.. (0) | 2014.04.05 |
육에 속한 사람들... (0) | 2013.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