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은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요구하시는 조건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그 아들을 바치려고 한 것(창세기 22:15-18)이나 노아가 사람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방주를 지은 것(창세기 6:22)이나, 리하이가 그의 모든 재산을 버리고 광야로 간 것(니파이전서 2:2,3)이나 이 모든 것들은 주님이 명하신 것에 대해 믿음으로 응답했던 태도입니다. 실제 구원의 계획에 따르면 인간들이 이 지상에 보내진 이유도 “주가 명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는지를 보리라”(아브라함서 3:25)는 주님의 뜻을 이루려 함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담의 경우도 “주께서 내게 명하신 것 외에는 알지 못하노라”(모세서 5:6)는 말로서 비록 자신이 명확히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께 희생 제물을 바치는 순종의 태도를 보인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순종에는 자신의 이해력에는 한계가 있고 비록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고 계시며 우리의 유익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심을 알고 있기에 가능한 순종입니다.
하지만 자칫 이러한 의미의 순종. 즉 “알지 못하는 내용이 있어도 그냥 순종하라”..는 식의 이야기는 자칫 맹신으로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때로는 먹힐 수 있는 이야기이긴 해도 실제 그런 의미의 순종은 이미 여러 차례 복음 원리에 대한 순종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경험한 자들의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순종으로 인해 이해와 축복을 받은 이들이기에 설령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다가온다 해도 이미 하나님에 대하여 철저하게 신뢰하게 된 이들의 경우라서 그러한 부분에 대한 순종은 받아들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하나님과의 충분한 신뢰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이들이 어떤 질문을 갖고 와서 그것에 대해 답변을 요구한다고 해봅시다. 설령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과의 철저한 신뢰 관계를 맺은 이들이라면 당연히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더 나은 뜻이 있을 것임을 믿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무조건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냥 순종해라!”고 하면 그것이 과연 먹혀 들어갈까요?
레이맨과 레뮤엘은 그들의 아버지였던 리하이(선지자)의 명에 대해 투덜거리고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를 몰몬경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그들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니전 2:12)고 알려줍니다. 정말 이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스스로 연구하며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투덜거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와 달리 니파이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자 심히 원하였던지라 이에 주께 부르짖었다”(니전 2:16)고 알려줍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주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해주셨다고 알려줍니다.
우리에게 다가와 어떤 알지 못하는 내용을 갖고 와서 질문을 던지며 투덜거리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만약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자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이런 저런 단편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이해 못한다면서 투덜거린다면 그것은 레이맨과 레뮤엘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먼저 기도하고 연구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답변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오히려 분쟁과 논쟁의 씨앗이 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하나님의 비밀을 알고자 심히 원하는 자였고 이에 대해 주님께 부르짖은 자들의 경우라면 그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에 대해 “기도해봐라. 성전에 가봐라..그냥 순종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무책임하며 오히려 질문하는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들 뿐입니다. “나는 그동안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해보고 성전에도 가보고 여러 부름에 충실해 왔는데 이것으로 부족했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좌절할지도 모릅니다. 니파이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찾아와 마음을 부드럽게 주신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런 기적적인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이 올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찾아올 수도 있겠지만 우리 각자가 기도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즉 정말 영적으로 굶주린 자가 있어, 하나님께 진심으로 기도한 자였으며 그에 대한 대답을 듣고자 다가와 도움을 구하는 이가 있다면 우리 각자가 그 사람이 드린 기도의 응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가진 의문에 대해 공감하고 같이 기도하고 연구해 보며 모른다면 여러 통로를 통해 답변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도 전혀 없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그냥 기도해 봐라...의심하지 말며 순종해라..”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의 진지한 의도조차 무시할 뿐이며 오히려 의심을 더욱 부채질 할 뿐입니다. 등이 간지러워서 긁어달라고 요청했는데 엉뚱하게 다리만 긁어주면서 “시원하냐?”고 말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입니다.
설령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같이 알아보고자 노력하며 함께 기도하고 연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경전은 아담이나 니파이처럼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순종했던 자들의 태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어떤 말씀이 주어지면 무조건 받아들이고 순종하기 보다는 과연 그것이 옳은 것인지 분별하려고 했던 이들의 모습도 나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사도 17:11)
바울과 실라가 베레아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 그들은 그냥 “아멘 믿습니다!”라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이 과연 그러한가?”라는 의문을 품고서 날마다 경전을 상고했다고 알려줍니다. 사도행전의 필자는 이런 태도를 “더 신사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지도자라는 분들이 말씀을 전해주실 적에 그냥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도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더 신사적인 베레아 사람들처럼 “이것이 과연 그런가?”라는 건전한 의미의 의문을 계속 품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경전을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지한 의문을 갖고 확인하는 작업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의문을 갖는 것을 신앙이 약하다는 증거로 봐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신사적인 일이며 필수적인 일입니다. 정직한 의문이라면 그것을 알기 위해 개인이 부지런히 노력해야겠지만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함께 연구하면서 도와줘야 합니다. 혹시나 압니까? 그러한 노력들이 그 개인이 드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될지..그것을 무조건 부인하면서 “순종”하라고만 하면 안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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