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았던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을 향하여 분노의 이빨을 갈았습니다. 특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어떻게 하면 올무에 빠뜨릴까 고민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일을 따져 묻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책잡고자 하여 노리고 있더라” (누가 11:53,54)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마태 22:!5)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마가 12:13)
이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하여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것에서 트집을 잡아 비난을 할까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자들을 향하여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태 23:13)고 말씀하실 정도로 자신만 그릇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그와 유사한 길에 들어서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이러한 이들의 그 “말 트집”이 바르게 지적되면 이에 대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을 내면서 이를 갈고 자신의 길을 더욱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경우를 보십시오. 스데반이 당시 모여 있던 유대인들에게 간증을 전하면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했을 때 “이를 갈며”(사도 7:54)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57,58절)쳤다고 알려줍니다.
이와 비슷하게도 교회의 정책이나 교리를 가지고 “말 트집”을 잡아 자신의 생각만을 고수하는 이들은 언제나 존재해 왔습니다. 특히 교회의 교리와 원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첫 번째 시현”에 대한 몇몇 화가들의 그림이나 동영상을 두고서 충격적이니 뭐니 하면서 댓글로 지저분하게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의 특수성에 대해 설명을 드리니 한다는 소리가 그저 "뭘 그리 장황하게 이야기하느냐..그냥 사과해라.."뭐 이런 식입니다.
만약에 조셉 스미스가 그 사건이 일어난 날을 두고 “나무가 울창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여기저기 벌과 새가 날아다니는 이른 봄”이라고 했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아니 설령 조셉이 그렇게 기록했다 한들 그것이 별 문제가 될까요? 당시의 사건이 중요한 것이지 그 사건이 일어나 구체적인 날씨를 부정확한 기억을 토대로 표현했다고 해도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날씨와 그림에서 묘사된 날씨가 다르다고 하여 충격이니 뭐니 하는 것은 그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면)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태 7:26)라고 하신 예수님의 지적을 면밀하게 고려해 봐야 합니다. 그렇게 모래 위에 집을 지었으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7절)고 하신 것 아닙니까? 우리 신앙의 토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이라는 반석 위에 지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했을 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 아닐까요? (25절)
물론 그러한 글을 올리신 분이 정말 신앙적으로 연약한 분인지라 교회의 그림이나 동영상 하나 보고 신앙적인 위기나 충격을 받으신 것이라면 제대로 영적으로 양육해 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교회가 사과를 해야겠지요. 저같이 평신도에게 사과를 듣고 싶으시다면 저라도 그렇게 할 의향이 있습니다. 단, 님이 그러한 사과를 듣고 그동안 모래위에 지었던 집을 다시금 반석 위에 새로 짓겠다고 각오를 하신다면 말입니다.
하지만...단순한 말 꼬투리를 잡기 위한 의도라면.....엑스모 블로그에서 올라오는 내용을 토대로 끝임 없이 자신의 생각만 고집하고 성을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그릇된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를 가지신 것이라면 저는 날카롭게 님의 그릇된 점을 지적할 것입니다. 토론을 하시려면 정확한 자료를 근거로 도전하십시오. 저는 욕설이나 도배만 아니라면 끝까지 토론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정말 사소한 것 가지고 교회를 등진 이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대표적으로 토마스 비 마쉬의 이야기가 있죠. 그에 대해 토마스 몬슨 회장님이 하신 이야기가 있으니 인용합니다. 정독해 보십시오.
우리 대부분은 토머스 비 마쉬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슬픈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마쉬 형제는 교회가 지상에 회복된 후에 부름 받은 현대의 첫 번째 사도 중 한 명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십이사도 정원회의 회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미주리 주 파웨스트에 있었을 때입니다. 토머스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마쉬와 그녀의 친구였던 해리스 자매는 이제까지 만들어 온 것보다 좀 더 많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우유를 교환하기로 했습니다. 모든 것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후착유라 불리는 것을 남겨 두지 않고 우유와 후착유를 모두 함께 사용하기로 했습니다. 후착유는 우유를 짤 때 마지막으로 나오는 우유를 말하며 크림이 더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해리스 자매는 약속을 충실히 지켰지만 마쉬 자매는 더 맛있는 치즈를 만들기 위해 각 젖소마다 후착유를 약 0.5리터씩 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해리스 자매에게 후착유를 빼고 우유만 보냈습니다. 이 때문에 두 여성은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입장을 조정하지 못했고, 결국 가정 복음 교사들이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마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책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마쉬와 그녀의 남편은 이 결정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는 감독을 통해 교회 재판에 회부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감독의 법정은 후착유를 남겨 놓은 것은 잘못이며 마쉬 자매가 해리스 자매와 한 약속을 어겼다고 판결했습니다.
토머스 마쉬는 고등 평의회에 항소했고, 평의회 위원들은 감독의 판결을 승인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일회장단에까지 항소했습니다. 조셉 스미스와 보좌들은 이 사건을 심의했고 고등 평의회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아내 편에 섰던 토머스 비 마쉬 장로는 잇따른 판결에 점점 더 화가 났습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는 주지사에게 가서 몰몬들은 미주리 주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악담을 했습니다. 그의 진술은 릴번 보그스 주지사의 잔인한 몰살 명령의 원인, 또는 적어도 한 요소로 작용했으며, 그 결과 성도들 만 오천 여 명이 집에서 쫓겨나고 끔찍한 고통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유와 크림 교환을 둘러싼 의견 충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19년 동안 원한과 상실감 속에서 세월을 보낸 후, 토머스 비 마쉬는 솔트레이크 계곡으로 와서 브리검 영 회장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쉬 형제는 또한 제일회장단 제1보좌였던 히버 시 킴볼에게 그가 배운 교훈에 대해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서 마쉬 형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 없이도 이 사업을 진척시키셨습니다. 제가 교회를 떠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어도 그분은 잃어버린 것이 아무 것도 없으십니다. 그러나 제가 잃은 것을 보십시오! 부, 세상 전부나 수 많은 별들보다 더 큰 부를 잃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리십시오, 나의 형제여: 토마스 에스 몬슨 회장)
지금도 그러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역사가 기록된 이유는 그것을 토대로 우리가 동일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함입니다. 부디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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