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장로교인과의 토론

(예전글 모음) 장로교 전도사님과의 토론2

모로나이 2017. 5. 6. 00:08

님의 글을 읽어 보면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는 아테네 교외의 케피소스 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지나가는 행인을 유혹하여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는데 그 후에 강제로 그를 눕히고 키가 침대 길이보다 길면 긴만큼 머리, 다리를 절단해서 죽이고, 반대로 짧으면 침대 길이에 맞추어서 다리를 늘려 죽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는 특정한 교리(침대)를 기준으로 해서 사람(성경)의 몸과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깊은 의미가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선택되어 구원 받은 이들은 구원이 절대로 취소되지 않고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는다는 예정론. 행함이란 믿음의 본질을 흐리는 것으로 우리의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오직 믿음설. 저는 이러한 교리를 기준으로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왜곡하고 비틀고 심지어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폄하하는 것을 이번 토론에서 여러 차례 확인해 봅니다. 더욱이 성경에 등장하지도 않은 여러 신학적인 용어들을 사용해서 마치 이것이 평범한 사람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지식인 양 포장하는 모습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금 정리하겠습니다. 제가 주장하는 진정한 믿음이란 무엇인지 오직 성경을 사용해서 설명드립니다.
 
(1)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요한1서 4:9)저는 그것을 부정한 적도 없으며 그 가치를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그분을 지적으로 동의하거나 마음으로만 믿는다고 하여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13:24절을 보시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 힘쓰라고 권고합니다. 그저 믿는다고 구원받거나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자동으로 천국행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가는 넓은 길과는 달리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서 가도록 힘쓸 좁은문이 있는 겁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는 말씀처럼 주여주여 믿음으로 부르짖는다 한들 아버지가 원하시는 길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4)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분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며 그 속에 진리가 있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에는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행해야 하는 것이 포함됩니다..그것이 예수에 대한 참된 믿음입니다.
 
 
(2) 그러면 구원받는 자는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 6:4-6)
 
잘 보세요. 이들은 애초에 구원받지 못했던 자가 아닙니다.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심지어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이 어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란 말인가요? 과연 지금 구원받았다고 자부하는 자들 중에 얼마나 이런 경험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런 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고 합니다.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말이죠.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벧후 2:20,21)
 
이 구절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자들이, 의의 도를 안 자들이 나중에는 다시 그 중에 얽매어 나중 형편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성경에서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도 나중에 구원의 반열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알려줍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
 
로마서에서 그토록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 바울 역시 자신이 복음을 전파한 다음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9장 24절에서는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고합니다. 즉 영생을 얻기까지 최선을 다해 달음질하라는 권고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출애굽 기사에서 더욱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로 발라 장자의 죽음을 피하게 되고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 것으로 예수의 피로 구원 받은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하자마자 바로 가나안 땅에 도달했습니까? 아닙니다. 죄로 인해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대부분은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멸망하지 않았나요?
 
“너희가 본래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유다서 5절)
이는 우리의 모습을 전형하는 사건입니다. 예수의 피로 구원받은 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애굽이라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라 할지라도 끝까지 복음 안에서 견디지 않고 순종하지 않고 그 이후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멸망하여 천국으로 상징되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믿음이란 단 한 번의 고백으로 천국행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 2:12)고 하여 우리의 구원은 복종과 떨림으로 이루어야 할 과정이라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 10:22)고 하시지 않았나요? 말일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 24:24)고 했으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구원받기로 선택받은 자들도 미혹당할 수 있고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라고 하신 거죠.
 
(3) 그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몇몇 이들은 로마서를 비롯한 몇몇 구절들을 인용해서 행함은 필요없고 오직 믿음이면 구원을 받는다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7)
 
이에 대해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사례를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로마서 4:9)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로마서 4:9,20,22)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아브라함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 여겨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야고보서의 다른 구절과 병행해서 읽어 보시면 그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 2:21-24)
 
즉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칭하게 된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나 고백이 아니라 믿음과 함께 그 믿음에 따르는 행함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마지막 구절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다시 읽어 보세요. 믿음으로만은 아니고 행함으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하지 않았나요. 이렇게 성경 야고보서에는 분명히 진정한 믿음이란 ‘믿음+행함’이라고 말해주는데 오직 단어에 집착해서 오직 믿음만 하고 있으니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해 못하는 것이며, 루터같은 사람은 자신의 주장과 어긋난다고 하여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부르며 정전에서 빼버리려고 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침대를 기준으로 머리와 다리를 자르는 프로크루스테와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요?
 
그럼에도 몇몇 분들은 이 구절에 대한 이해를 “진정한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식으로 애매하게 돌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느냐를 중요하게 보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중요하게 봅니다.”라고도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기뻐보신다는 말인가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요한 16:2)
 
훗날 몇몇 이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행위가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만 중요시 여긴다면 그분을 사랑하는 행위라고 생각해 저지른 이런 일들 역시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요? 상대방을 때리면서 “이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거야”라고 외치면 그게 사랑입니까?
 
우리가 행하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들은 우리의 의를 자랑하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빨간 신호등에는 도로를 건너지 마라고 지침을 주었는데 “나는 아버지를 정말 사랑하지만 그분의 말은 순종할 필요가 없어. 내가 이렇게 행동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나를 사랑하셔”라고 판단해서 빨간불에 도로를 건너면 어떻게 됩니까? 생각해 볼 것도 없지 않나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아무런 일을 행하지 않아도 믿기만 하면 천국을 보장받는다는 주장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성경을 편견없이 읽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들은 우리가 스스로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행위구원자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겸손하게 주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 우리가 심판받게 되는 근거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거나 중요시 여기지도 않으면서 “오직 믿음”만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님을 다음 성구들은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분명한 음성으로 전해주는 것들을 왜 복잡한 인간의 신학을 동원해서 왜곡하려는 참 안타까울 뿐입니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값아 주리라”(마 16:27).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 2:6).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계 2:23).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번 글에서는 정택주 전도사님께서 반박하신 성구들에 대한 이해와 질문하신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1. 시편 69절에 대한 이해.
 
님께서는 그 구절에 나오는 “그들”이란 유대인들 중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신약에서는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인들이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오해를 하고 계시는군요. 다윗 시대에 유대인들 역시 선택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윗을 박해한 대표적인 인물인 사울왕의 경우는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었습니다. (삼상 9:15,16, 10:1) 그는 왕으로 부름 받을 적에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죠. (삼상 9:20,21) 그를 왕으로 기름부은 사무앨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한 표징들도 주었습니다. (삼상 9:22-10:16) 하지만 아시겠지만 그는 훗날 주제넘게 행동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께 배척을 당하면서 다윗을 시기해서 그를 죽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역시 현대적인 의미로 부면 구원받고 나중에 범법하여 구원이 취소된 자입니다. 사울을 비롯한 당시 다윗을 비방한 이들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배척한 자들이 아니였습니다. 그들에 대해 다윗이 말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시편 69:28)
 
잘 보세요. 생명책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거기서 지우라는 말이죠? 지우라는 말은는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을 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사울왕이 결국은 자신의 구원을 저버리지 않았나요? 그래서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빼어 의인들의 이름과 함께 있지 않기를 바란 겁니다.
 
2. 생명책에 기록된 자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요한계시록 21:27)
 
이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속된 것, 가증한 일, 거짓말하는 자와 구분하고 있습니다. 즉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는 여기서 말하는 속된 일을 행하지 않은 자로 볼 수 있지요.
 
빌립보 4장 3절에 나오는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누구입니까?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이라고 나오지요. 그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기록된 자들이 아니라 복음에 힘쓰던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계시록 20:12)
 
이 구절에서 생명책을 비롯한 책들이 등장하는데 “자기 행위에 따라” 그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 했습니다. 즉 생명책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에 의해 기록되어 구원을 보장하는 티켓이 아니라 우리가 생전에 행한 것에 의해 기록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시록 13:8)
 
여기서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의 특징이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고 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말은 이전 구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복음에 힘쓰며 속되고 가증한 일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구원이 완결된 자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오해를 하시는군요.
 
3. 구원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들.
 
마 15장의 가나안 여인,
막 5장 혈루증 여인,
막 10장 여리고 맹인
눅7장 옥합부은 여인
 
이런 자들이 구원을 위해 무엇을 행했느냐는 질문을 하십니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질문입니다. 제가 지금 말하는 구원이란 죽어 부활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개념을 말하는 것인데 당시의 곤란하고 비극적인 상황에서 구출받은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어디에 유출병 걸린 여인이나 여리고의 소경, 문둥병자나 백부장이 구원이 확정되어 천국행 티켓을 따냈다고 합니까?? 성경에서는 구원이란 말에 대해 위험에 빠진 사람이나 나라를 대신해서 구해주는 행위나 자연재해나 적의 침입과 같은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상황과 관련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혈루병 걸린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태 9:22) 는 말에서 나오는 구원이란 그 여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하늘나라에서의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혈루증에서 낫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21절을 보세요.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고 되어 있지요. 즉 겉옷을 만져도 혈루증에서 낫게 되리라는 소망을 가졌고 예수께서는 그 소망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마태 8:25)
 
여기서 제자들이 자신들을 구원하소서라고 외친 것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달라는 말이 아니라 당시 광풍에서 죽게 된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혈루증 여인이나 여리고 맹인, 옥합 부은 여인과 같은 이들의 구원은 말 그대로 예수를 통한 영생의 개념이 아니라 당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의 구출을 의미하는 겁니다. 이런 식의 구제 개념은 예수에서 조건없이 행해주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분의 구세주 되심을 전한 계기가 되었을 뿐 인간의 궁극적인 구원 보장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메섹에서의 바울이나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와 주신 경우를 일러 “무슨 잘난 일을 해서 이들을 구원하셨나?”라고 말하는 것 역시 우스운 일입니다. 이 두 사건은 주님께서 부족한 그들을 불러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도구로 삼으신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확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격도 없고 주님을 배척했던 이들을 사용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8,29)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앞에 잘난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전적으로 자비로운 조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주님의 은혜로 개종한 이들이 구원을 100% 보장받고 절대 취소할 수 없는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글에서도 말한 것처럼 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고도 했죠?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도 의로운 행동을 하라고 성도들에게 촉구하지 않았습니까?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마가 복음 16:16장의 해설을 잘 읽어 보았습니다. 원본을 분석한 내용은 잘 알고 있는데 굳이 그것이 필요했었나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한마디로 말해 님의 결론은 “구원을 받게 하는 이유는 믿음과 그것에 종속되는 침례”인 것이고 정죄 받은 사람의 조건으로 “믿지 않는 자들”만 나왔기 때문에 침례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것처럼 서술을 하셨습니다. 또한 침례가 본질이 아니라 믿음이 본질이기 때문에 생략이 가능하다“고도 하셨습니다.
 
좋습니다. 님의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치죠. 저는 침례 그 자체가 구원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전체로 한 침례여만 한다고 여러 차례 설명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아무리 침례를 받아도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는 조건으로 작용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침례를 믿음에 종속되는 것으로 봐도 그리 큰 무리가 없다고 볼 수도 있겠죠. 다만 침례가 믿음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고 보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쉽게 생각해도 될 문제라면 왜 성경에 기록된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침례를 받았다는 말인가요?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형과 유대인들의 박해로 인해 조심스러워야 할 시기에도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 나 더하더라”(사도 2:41)는 일을 행해야 했나요? 삼천명이 침례를 받으려면 아마도 사람의 눈에 쉽게 뛸 텐데 주변 사람들의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도 왜 그들은 침례를 감행했던 것일까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라면 말입니다.
 
마가복음 16:16절에서 “믿고 침례를 받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면 “믿지 않는 자는 정죄를 받으리라”는 말씀에서 “침례는 생략되었으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식의 해석은 나올 수가 없죠. 구원받지 않으면 정죄 받는 것 아닌가요? 믿고 침례를 받는 자가 구원을 받는데 당연히 믿지 않으면 침례도 안 받고 정죄 받는다는 말 아닌가요? 편견 없이 읽어 보세요.
 
믿고 침례를 받는 자 <-> 믿지 않는 자
구원을 받음 <-> 정죄 받음
 
이 도식만 봐도 믿지 않는 자는 믿고 침례를 받는 자와 대조되는 개념임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않으면 당연히 침례도 안 받고 결국 정죄 받는다는 내용이지요. 믿지도 않은데 침례를 받을 필요가 있나요? 이렇게 뻔한 내용 가지고 침례가 중요하지 않아 생략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왜곡입니다.
 
보통 언어에서 생략되는 경우는 앞의 표현이 반복될 경우입니다. 동어반복이 이루어질 경우 자연스레 대명사를 사용하거나 생략하는 것은 기본이지요. 예를 들어 “나는 일어났고, 나는 밥을 먹었고, 나는 학교에 가서 나는 공부했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오히려 이런 문장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저 ‘나는 일어나 밥을 먹었고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는 식으로 표현하여 반복되는 “나는”이란 표현을 생략한 겁니다. 생략되었다고 하여 “나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오히려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 받고 믿고 침례를 안 받으면 정죄 받는다”는 식으로 동일한 표현을 반복해 버리면 이상해 버리지요.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운 표현은 “믿고 침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정죄 받는다”로 해야 된다고 봅니다.
 
또한 님께서는 침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바울이 침례를 베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님의 지적처럼 전후 문맥과 배경을 잘 살펴봐야 이해가 되는 겁니다.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침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침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침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고전 1:14-16)
 
이 구절만 딱 떼어놓고 살펴보면 마치 바울이 침례를 베풀지 않고 베풀지 않은 것을 감사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는 침례를 안 준 것을 감사할 정도로 침례 의식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봤단 말인가요? 아니죠. 그 배경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 말이 왜 나왔는지 이전 구절을 보자구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침례를 받았느냐” (고전 1:10-13)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분쟁은 자신을 침례 준 사람을 따라 나는 무슨 파다, 나는 무슨 파다라고 하면서 분파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에게 침례를 받은 사람은 “나는 바울파다!”라고 주장한 것이고 아볼로에게 침례를 받은 자는 “나는 아볼라파다”면서 분란을 일으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언급하면서 바울은 자신이 직접 침례를 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 자체에 감사를 표현한 겁니다.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 침례를 주었더라면 그들이 바울파를 만들어 분쟁을 일으킬 것을 우려했기 때문인 것이죠. 사도행전 2장을 보면 베드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며 침례를 받고 죄사함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그 말을 들은 즉시 3천명이 침례를 받았다고 하죠. (사도 2:41) 그럼 정말 베드로는 직접 이 3천명을 침례 주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제자들이 침례를 베푸는데 도움을 주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직접 침례를 준 적은 별로 없을지 모르지만 그가 전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이들은 바로 다른 제자들에의해 침례를 받았을 것이라 추정할 근거가 많습니다. 바울은 그저 자신이 직접 침례를 베풀지 않았을 뿐 그 의식 자체를 부정하거나, 심지어 침례를 주지 않은 것으로 인해 감사할 정도로 침례를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여겼다고 볼 근거는 전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침례의 중요성을 부인하기 위해 전후 문맥에 비추어서 어색한 주장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침례를 강조하는 것을 교인 등록시키는 목적 정도로만 보는 어리석은 모습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전에 언급한 사도 2:41에 침례 받은 자의 숫자가 3000임을 기록했습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침례 받은 사람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는 뜻이거든요. 그럼 이건 그저 교인 등록 시키고 교인의 숫자를 광고하기 위해 일일이 침례 받은 자들 숫자까지 세고 있었다는 말이 되나요?? 제가 이런 글을 올리면 “침례를 중요시하는 사고관이 잡혀서 이런 식으로 밖에 못 본다”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저 역시 “침례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해석이 안되는구”라고밖에 안보입니다.
 
2. 님께서는 고전9:27를 해석함에 있어서 24절에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상은 구원이 아니라 교회의 직분 정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천국은 전 세계에서 한 명만 갑니까? 버림을 당하는 것은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 이런 님의 해석을 보면서 아니 왜 24절은 보면서 25절은 못보시는가 의아했습니다. 25절을 보세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잘 보세요. 썩은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저희(그들)”과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우리”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 ‘우리’라고 1인칭 복수형을 썼지요. 이 면류관을 얻을 자들은 누구이며 언제입니까?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벧전 5:4)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시록 3:11)
 
보세요. 생명의 면류관을 쓸 날은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재림하신 이후에 주어집니다. 그 면류관을 빼앗지 않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들을 굳게 붙잡아야 하지요. 바울은 그러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함”(27절)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의 면류관은 영생 아닙니까??
 
24절에 나오는 “상을 얻는 자는 한 명이다”라는 구절에 대해 제가 참고하는 주석서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 이 말은 문자대로 육상 경기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상을 얻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오직 한 사람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운동 경기에서 승리하면 상금을 주지 않고 명예를 상징하는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모든 경주자는 이러한 명예를 획득 하기 위해 경기에 참가했다. 따라서 바울이 의미한 것은 경기에서 우승자가 질주하는 것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상을 얻겠다는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 목표만 을 향해 노력하라는 것이다”(Godet).
 
계시록에서 복음에서 승리한 자들을 “이기는 자”라고 단수로 표현합니다. 또한 성도들을 “신부”라고 부르죠. 단수라고 쓰였다고 하여 그것이 꼭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설령...그것이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것이라 해도 문제가 됩니다..하나님은 그분의 종을 오직 한 명만 부르십니까? 아니지 않나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경에서 등장하는 구원이라는 단어가 어떤 용례로 써졌는지
정리해보신적 있으신지?
 
1. 크게3가지가 있습니다만 말해보시길 바랍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시고요.
 
님께서 어떤 답변을 미리 전제로 하고 질문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이 꼭 3가지일 이유도 없다고 보구요.
 
제가 설명해도 되지만 저희 교회 지도자 중에 옥스 장로님이란 분이 계신데 그분의 말 일부를 인용하지요.
 
“후기성도들이 "구원받다'나 "구원" 같은 말을 사용할 때는 최소한 여섯 가지의 다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 가운데 몇 가지에 따르면, 우리의 구원은 확증되었으며,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또 다른 의미로 볼 때, 구원은 미래의 일이거나(고린도전서 5:5 참조) 혹은 미래의 일로 조건지어진 것으로 이야기되어야 합니다.(마가복음 13:13 참조) 하지만, 이러한 모든 의미에도 불구하고, 구원은 주님 안에서, 그리고 주님 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첫째, 모든 필멸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의 영속성에서 구원되었습니 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린도전서 15:22)
 
구원받았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인 생의 목적과 사람의 운명에 대한무지함의 암흑에서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역을 통해 이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 라'(요한복음 8:12)
 
후기성도에게, "구원받았다' 함은 장차 올 세상에서 영광의 왕국에 대한 확증으로 인해 둘째 사망으로부터(궁극적인 영적 죽음을 의미함) 구원되거나 혹은 해방된다는 뜻일 수 도 있습니다,(고린도전서 I5:4O-42 참조) 부활이 만유에 미치듯이, 극소수를 제외하고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점에서의 구원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아담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원죄로부터의 죄사함,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죄로부터 정결하게 된다는 것은 회개하고 침례 받고 성신을 받으라는 주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나타내 보여야 하는 신앙, 즉 죄 지은 사람 각자의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 등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2. 그리고 칼빈주의 5대강령(TULIP) 과 반대대는 개념인 알미니안 5대 강령을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님보다 몇백년 앞선사람이 행위구원을 논리적, 신학적으로 정리한 겁니다.
 
글쎄요..님께 몰몬경이나 교리서를 공부하라고 책을 드리면 연구해 보시겠습니까? 전 칼빈주의니 알미니안주의니 하는 인간적 개념의 이즘(ism)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그래도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읽어볼 의향은 있습니다.
 
 
3. 그리고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울이 아니라 다윗을 선택하려고 정하셨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제물을 살려둔 죄를 범한 사울을 폐하시고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자기 신하를 죽이고 그 아내를 강간한 다윗은 왕으로, 언약의 대상(다윗언약)으로 삼으셨습니다.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선택하시고 보내셨습니다. 사무엘상 9:15-17절을 읽어 보세요.
 
“사울이 오기 전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이르시되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로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되었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았노라 하셨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다스리리라 하시니라”
 
이렇게 왕으로 기름부음받은 사울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죠? 그는 하나님을 적대시하였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부함으로서 버림 받았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은 왕이라 할지라도 그가 그릇된 길로 행하면서도 회개치 않으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4. 그리고 제가 언급한 로마서9:8~26 읽으시고 그 말씀에 대해 의견을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인용하신 구절 잘 읽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이 구절은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부름에 대한 것이지 이미 구원 받기로 예정된 자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10절에 리브가를 통해 야곱과 에서가 태어난 이야기,그리고 17절부터 바로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온전히 땅에 전파되는 일 등처럼 특정한 사명을 위해 태어난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20-22절을 보세요.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는 일과 관련하여 도공이 진흙으로 그릇을 빗어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예화가 담겨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선택하기로 결정하시고 판단하시는 일은 오로지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한 개인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목사가 되어야지"라는 의지를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가 박사학위 따고 교회를 차린다고 해서 주님께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로마서 9:24)
 
이 구절에서 그릇이 의미하는 바가 나와 있지 않습니까? 부름입니다.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브라함의 씨로서 선택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로마 3:2)기로 선택받은 자들 아니였나요?? 그런 이들이 자동적으로 구원을 상속받았습니까? 아니죠.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을 거부했기에 버림 받았습니다.
 
 
언젠가 바울이 무슨 잘난 일을 해서 부름 받았냐고 질문하셨지요? 부름은 누군가가 잘나서 주고, 못나서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29절에 나온 바와 같이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하려는 것이구요. 하나님께서 바울처럼 기독교를 비판했던 이를 부르신 이유도 그가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일종의 충격 요법까지 동원하시면서 그를 변화시키신 겁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부름에 온전히 순응하지 못하면 그 역시 버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버림 받을까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했던 것이구요.
 
구원 받을 자가 미리 결정되어 있고 말 그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만 구원하신다고 하면 왜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보세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구원 받고 어떤 이들은 멸망 받을 것을 예정하셨다고 합니까?? 만약 그것이 사실이고 이미 구원 받을 자와 멸망 받을 자를 구분해서 정하고 계시다면 어찌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한다”고 하실 수 있단 말인가요?? 부름에 대한 성구를 가지고 구원 받을 자로 정해진 것으로 해석해 버리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흔들려 버립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