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6장 4-6절에 대한 님의 해석을 보면서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선입견이 얼마나 깊게 관여했는지를 다시금 볼 수 있었습니다. 각 단어의 쓰임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히브리서 구절이 구원의 경험이 없던 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해석을 시도하셨더군요. 님이 그토록 강조하시는 것처럼 성경의 전후 문맥과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1. 한 번 빛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who have once been enlightened)
님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빛 가운데 거하고 dwell in the light”라는 요1서7절과 비교하여 어둠에 있다 잠시 빛을 본 자라고 해석을 하셨습니다. 그럼 요한 1서 구절을 볼까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한1서 6,7)
님이 인용하신 이전 구절과 비교해 보시겠습니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면서도 어둠에 행하면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에서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행함으로 어둠의 일을 한다면 진리를 행치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와는 달리 빛 가운데서 “행할 때”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즉 님이 히브리서와 대조적인 것으로 주장하기 위해 인용한 구절은 우리가 단순한 믿음의 고백이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구원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행할 때 구원 받을 수 있음을 언급할 뿐입니다. 이와 달리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해도 어둠에 속한 일을 행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님을 알려줄 뿐이죠.
오히려 “빛을 받은 적이 있는”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포티스덴타스에 대해 주석에서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요1:9;고후4:4,6;벧후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마5:14;요 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영어 “enlightened”이란 단어로 표현된 다른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enlightened)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 1:18,19)
윗 구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의 눈을 밝혀” 부르심의 소망이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 그리고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크심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 번 빛을 받고..라는 말이 ‘어둠에서 잠시 빛을 받은’ 구원받지 못한 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성경의 문맥상으로도 맞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2.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님은 이 구절에서 사용된 “맛보고”라는 단어를 계시록에 언급된 말씀을 먹는 것(ate it – 계10:10)과 비교를 하셨습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습니다. 여기서는 ‘하늘의 은사’를 맛본 것이지 말씀을 맛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보통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거나(Lane)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Morris). 고전 12장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사에는 무엇이 있는지 잘 설명해 줍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 12:8-11)
이 은사는 성도를 세우기 위해 성령께서 주신 것으로 그 은사에는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등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 은사들이 주어졌지만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전 12:4)습니다. 제가 묻고 싶습니다. 구원을 받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성령의 은사가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로마 11:29)고 했습니다. 어찌 이 은사가 구원 받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하여 후회하심이 있게 만듭니까??
3. 성령의 참여한 적이 있는
님은 이 구절에서도 참여한 적이 있고(partake) – 연합하고(unite, knit together)를 비교하여 “참여한 적이 있다는 것은, 잠깐 같이 있다가 더 이상 같이 있지 않게 되는 것을 말하지만 연합하다라는 것은 그것이 서로 결합하여 떨어질 수도 없고, 떨어지지도 못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전 도무지 이런 해석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그 출처를 알고 싶습니다. ‘참여하다’가 잠깐 있다가 떨어지는 것이라니요??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partake)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partake)이 아니냐” (고전 10:16)
그럼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성찬을 통해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은 잠깐 있다가 더 이상 관계를 갖지 않게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이런 해석이 어떻게 가능한지 정말 궁금합니다.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에서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 '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로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킵니다.(Lane, Bruce). 이 구절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은사,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것일 수 있으며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는 말씀처럼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닫게 된 자들일 수 있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다 1:19)고 설명하고 있지 않나요?? 흠정역 성경에서는 ‘참여한 적이 있는’을 “partakers” 즉 동참자라고 알려줍니다. 성령의 동참자가 어찌 잠깐 있다가 떨어지는 것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partakers)가 되리라” (히브리 3:14) 고 했는데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는 자가 그리스도에 잠깐 있다 떨어지는 것입니까?? 말이 안되지요.
전도사님..
윗 구절과 비교할 수 있는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히브리 10:26)
이 구절은 또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또 어줍쟎이 구원을 받지 않은 일반인이 잠시 구원에 대한 지식을 들은 것이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디모데후서 3:7)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빌리자면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디도서 1:1,2) 고 했습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았다는 말은 그저 잠시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허락된 일종의 특권입니다. 그런 자들이 짐짓, 즉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면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예를 성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왜 그걸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은 애초부터 구원받은 자가 아니였다”는 식으로 둘러서 회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구원이 취소될 수 있는가, 믿음과 행함에 관계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주제와 맞지 않은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는 잠시 답변을 보류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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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을 하나 던지겠습니다. 님은 죄인이 아닙니까? 아니 구원을 받았으니 죄를 저지를 수 없습니까? 아니면 죄라고 판단되는 것을 행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것과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군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한1서 1:8-10)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기에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을 말하겠지요.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지만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한다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신다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에게서 나서 죄를 짓지 못하는 이가 어찌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그분의 속죄를 통해 깨끗함을 입는다는 말입니까? 그럼에도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님은 요한1서 3장의 구절들을 인용해서 그분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동일한 요한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단 말일까요?
3장 6절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범죄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마르타네이'는 현재형으로서 동작의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상태를 묘사해 주기 때문에 습관적이고 지속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이는 죄가 애초부터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죄와 상관없는 분이시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이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만약 죄를 범하게 된다면 회개를 통해 용서함 받고 그릇된 생활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이가 지속적으로 죄 안에 거하길 즐겨한다면 당연히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볼 수 없겠지요. 이건 요한1서의 내용과도 일치되는 부분입니다.
그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는 9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은 1:8,10에서 믿는 자들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언급하였으나 본절에서는 믿는 자들이 범죄치 아니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 구절은 6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습관적으로 마귀와 같이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즉 구원받은 자들은 비록 죄된 성품을 가지고 불완전성에 기인하여 죄를 짓기는 하나 자신의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특히 요한1서가 영지주의자들을 겨냥해서 쓰여진 것임을 감안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예를 들어 7절에서 “아무도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는 경고가 주어졌는데 영지주의자들은 신비를 깨닫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신비를 깨닫게 되면 육신에서 자유로워져 도덕적 방종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을 한 겁니다. 이런 가르침이 요한 당시 많은 이들을 미혹했기에 사도는 복음 외에 것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을 멀리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라고 하지 않았나요? 즉 예수의 의로우심처럼 의를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거죠. 그럼 맥락에서 다음 8절 이후에서 하나님께로 태어난 이들은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니 영지주의자들처럼 도덕적 방종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권고한 내용입니다.이상하지 않습니까? 애초부터 구원받아 죄를 짓지도 않고 유혹도 받지 않으며, 천국에서의 구원이 보장되는 이들에게 영지주의자들로부터의 미혹을 피하라고 권유하는 요한의 모습이 이상하지 않나요? 죄를 지을 일도 없는 이들에게 왜 영지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할까요??
이런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이 그저 구원받은 자들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요한이 1장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2. 성령의 은사에 대해..
님이 인용하신 구절들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사탄이 그 은사들을 모방에 것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서에 말한 성령의 은사를 맛보다..는 말이 사탄의 은사라는 말인가요?? 참으로 큰일날 소리를 하십니다. 제가 성령의 은사에 대해 언급한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영을 통해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 역시 성령의 은사라고 밝혔습니다. 9절에서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11)는 말씀처럼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은사를 주시는 겁니다.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방언을 말하거나 기적을 베푸는 그런 것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되는 것도, 그분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는 것도 성령의 은사입니다. 갈라디아서에도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갈 5:22)처럼 영의 열매를 언급하고 있죠. 이것이 영의 은사이며 선물이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사도 5:32) 주님을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은사를 맛본 자들이 구원을 받지 않은, 육적 인간이라는 것이 말이 됩니까?? 님은 구원은 취소될 수도 없으며, 일방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는 교리를 주장하기 위해 수많은 증거들을 누더기로 만들고 있습니다.
3. 동업자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동업”이란 말을 구원받지 못한 이가 잠시 빛을 받은 것처럼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개념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이전 저의 주장을 번복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가 한 때는 죄 사함을 받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이였으나 그 이후에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거나 신앙을 버림으로 구원이 취소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하기 위해 “애초부터 그들은 구원받은 자가 아니였다”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갑니다. 님의 논리대로 한다면 님은 구원받은 자라고 자신해서는 안됩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받은 자라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사람 일은 모르거든요. 그가 어떤 일로 인해 죄를 반복적으로 저지를 수도 있고 어떨 때는 신앙을 잃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런 이들은 애초부터 구원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죠? 그런 일들을 성경이나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봅니까? 그들도 한 때는 자신을 구원 받은 자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이들이 훗날 신앙을 잃고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럼 그들은 애초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였고 그들이 착각한 것이었겠군요? 결국 한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은 어떤 이가 끝까지 복음 안에 남아 있다가 죽기까지 충성한 모습을 본 뒤에야 알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 전에는 섣불리 판단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에서 언제 예수님이 진정으로 믿지 않는 자들을 쫒아냈다고 합니까? 요한 6장 60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살과 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스스로 물러가 더 이상 주와 함께 하지 않은 것뿐이죠. 이건 주님이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 못하자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67절에서도 말하지요. “너희도 가려느냐?” 그것은 베드로의 의지와 선택을 물어보신 것입니다. 물론 68절에 나온 것처럼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음을 확신한 베드로는 그분과 함께 하기로 선택합니다. 이 구절에서도 인간에게는 주님을 선택하고 거부할 수 있다는 의지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4. 디모데 후서를 보면 말일의 상황을 예언하면서 구원받지 못한 이들의 특징 중에 하나가 나옵니다.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보세요.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은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뜻인데 님은 다르게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 17:3)
여기도 나오죠. 영생, 즉 구원이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지식을 아는 것이라 했습니다.
진리의 지식을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은 자이긴 하지만 마가 4장에 나오는 씨뿌린 자의 예처럼 세상적인 박해나 욕심 등으로 그 말씀을 뿌리 내리지 못해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애초에 구원받지 못한 자는 씨를 아무리 뿌려도 발아조차 되지 못하죠. 그런데도 진리의 지식을 받을 수는 있으나 자신의 것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자가 아니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어디서 나온 건지요?
그리고 히브리서에 나온 구절에서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는 말은 예수의 속죄가 영원 무일하다는 것을 언급하는 것이지 그 일로 인해 한 번 구원 받은 자는 다시는 죄를 짓거나 구원의 취소를 당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히브리 6:6절을 보세요.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예수께서 유일 무일하게 속죄의 피를 흘려 사람을 구원시켜 놨는데 그가 그것을 거부하고 타락하면 이는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케 한 것을 부인하고 다시금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구원 받은 자들이 영원히 타락해 버린 일로 인한 것이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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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성도들은 구원이란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다고 믿을까요?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우리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고 믿을가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도 아니며 오로지 거저 주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믿기 힘든가요? 그럼 후기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몰몬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보죠.
“누구에게 그가 명하사 그의 구원에 참여하지 말라 하셨느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해 그의 구원을 거저 주셨으며, 그의 백성에게 명하사 모든 사람을 설득하여 회개하게 하라 하셨느니라.”(니후 26:27)
“또 사람이 타락한 때로부터 길이 예비 되었으며,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니라.”(니후 2:4)
“너희가 구원받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와,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인 줄을 기억하라.”(니후 10:24)
아무리 계명을 강조하고 행함을 강조한다 한들, 그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획득하게 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자손과 또한 우리의 형제들을 설득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부지런히 수고하여 기록함이니, 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 우리가 구원받는 것이 은혜에 의한 것임을 우리가 앎이라” (니후 25:23).
특히 마지막 구절을 잘 보시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후에”도 구원 받는 것은 결국 은혜에 의한 것이지 우리의 행함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닙니다. 후기성도가 행함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저버리기 위한 것도 아니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종종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행함으로 구원받을 자격이 되는가? 물론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지도 않으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고 보는 것입니다. 몰몬경을 사용한 궤변처럼 보이시나요? 그러면 성경을 통해 볼까요?
정말 우리가 하는 어떤 행위도 구원과 무관한 것이라면 왜 주님을 비롯한 여러 사도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을까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마태 7:22,24)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가 9:43)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21)
가장 기본적인 몇가지 구절만 인용했습니다. 예수께서도 그분의 말을 듣고 “행하는”자라야 지혜로운 이라 천국에 간다고 했으며 우리를 범죄케 하는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영생에 이른다 했습니다. 또 어떤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 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행함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들이 가득 차 있는데 자칭 정통이라 하는 이들은 이런 구절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이런 말만 합니다. “당신은 성경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행하느냐?” 그러면서 율법주의자니 행함으로 구원받는 자니 이런 소리나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이 있고, 이에 대해 완벽하게 하는 자들이 없기에 속죄가 마련된 것이라 말씀드렸지 않나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로마 3:23,24)는 말씀처럼 모든 이들이 주님의 온전한 표준에 이르지 못했고 죄를 지었기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의롭다 선언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하여 그 계명들이 우리의 구원과 무관하다고 가르쳐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다고 봐서도 안됩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지 하나님의 은혜가 값없이 거저 주는 것이라 하여 아에 아무 일도 행할 필요도 없다고 하거나 계명은 불필요하다는 식으로 회피해선 안되죠.
성경은 분명 우리에게 예수의 가르침대로 행하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죄를 유발하는 몇몇 행동들은 실제 우리의 구원을 위태롭게 합니다. 그렇기에 바울 역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여기서 바울이 버림 받을까 두려워 한다고 하니 “바울이 힘든 종교 생활을 했다”고 하실건가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흐르는 믿음과 행함의 원리는 분명합니다. “~하면 ~을 해주신다.”(창 26:3, 신15:4,18, 30:16, 마태 16:25, 요한 13:17, 계시록 2:16)입니다. 기복신앙처럼 보이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거리가 먼 것 같아 껄끄럽나요? 그렇지만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에서 회개하라는 가르침이 참 많죠. 회개가 하나님으로부 온 은사임이 분명하지만 개인의 결단과 행함이 필요한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태 3:8)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요한계시록 2:5)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사도 2:3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고, 처음의 행위를 갖기 위해 노력한다, 회개해서 침례를 받고 죄사함 받았다고 하여 이마저 행위를 통한 구원 운운 하시겠습니까?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 2:22-24)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했지요.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 했습니다. 이게 제 주장입니까? 이렇게 분명한 가르침을 두고서 분명치도 않은 애매모호한 신학적 표현들을 사용하여 율법주의자니 행함으로 구원받는자니 상대방을 비난하고, 자신은 구원이 예정되었다고 만족해 하는 모습이 참 슬픕니다.
그리고 누가 책을 안 읽는다 했습니까? 저는 저희 교회에서 나온 출판물만 읽지 않았으며 다양한 신학 서적을 섭렵했습니다. 오히려 자칭 정통이란 하는 사람 중에, 그리고 여기서 몰몬을 비판하는 사람 중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몬경을 읽기나 했습니까? 이단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것은 자칭 정통에 속한 분들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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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예정이나 예정론이니 하는 복잡한 신학적 이론은 사람이 만든 것일 뿐 성경에서 가르친 바가 아닙니다. 신학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기 위한 인간적인 시도라는 점에서는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이해를 가로막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킨다면 분명 사람의 계명이며 철학일 뿐입니다. 이중예정론을 주장하는 분들게 질문하고 싶은 것은, 님은 정말 님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나 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본인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것을 가지고 남들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요?
상당수의 사람들은 행위 구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이 행위구원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심지어 성경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고 죄사함이나 거듭남과 관련된 침례라는 의식 자체도 사람이 하려는 행위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것이요 행위 구원이며 반쪽 자리 은혜를 가르치는 것이라 합니다. 이런 식의 논리를 사용한다면 성경에 등장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전부 행위구원론자라는 말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행위구원이란 내적인 변화도 전혀 없이, 개인적인 선택이나 의지도 전혀 없이, 믿음도 없이 외적인 행위를 통해 구원을 이뤄내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도 없으면서, 그저 자신의 행위, 예를 들어 자선 활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선행을 통해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행위구원입니다.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기쁘게 행하는 것들을 행위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립보 2:12)는 말씀처럼 복종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는 자들에게 “피곤한 종교 생활” “두려움에 벌벌 떠는 종교” 운운하면서 비난하는 모습이 참 눈물 겹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생의 길에 이르는 과정을 마라톤에 비유하면서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고 격려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 것이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7절)고 했던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복음을 몰라 버림 받을까 전전긍긍, 두려워하는 종교인”이라고 매도할 것인가요?
그저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알아서 구원을 예정하고 베풀터이니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천국행이 자동 보장된다고 하여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된 생각을 포장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잡다한 이론들을 끌어쓴다 해도 그게 고급적인 의미의 신학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해서 손놓고 아무 일도 안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에베소 6:24)
윗 구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유합니다. 만약 은혜가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것이라면 왜 바울은 헛되지 받지 말라고 했을까요? 은혜가 주어진 자체가 아무런 보상도 조건도 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왜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일 사용했을까요? 그리고 바울은 그분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려 더 많이 수고하여 일했는데 그는 그것을 자신의 공덕으로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아무 일도 안했다고 봐야 하나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라고 해서 하나님은 그분의 선택에 따라 아무에게나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자들에게 주신다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 역시 이중예정에 따라 그분의 선택된 받은 자들에게 무조건 부여하고 자동으로 천국행이 보장되는 티켓을 부여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기에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심지어 스스로 하나님을 스스로 섬기기로 결정할 수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복음을 전할까요? 하나님을 스스로 섬기기로 결정도 못하는 이들에게 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 14:1)고 하셨는데 스스로 믿지도 못하고 선택도 못하는 이들에게 왜 근심도 말고 나를 믿으라고 했을까요?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라 질문했던 간수에게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사도 16:31)에게 말했던 바울과 실라의 경우는 어떤가요? 애초에 믿을 자유도 없고 선택도 못하는 이들에게 왜 예수와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믿고 회개하라고 전했던 것일까요? 이중예정이라는 말도 안되는 인간의 철학을 적용하면 이처럼 수많은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낱 쇼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걸 저보고 믿으라니 그게 가능할까요? 그건 반쪽자리 은혜 운운할 것도 못됩니다. 그건 값싼 은혜라는 말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드릴 말씀은...몰몬교인들의 선한 행위에 대해 자신의 행위를 높게 선전하고 자랑질한다고 비방을 하시는데요. 엄청난 오해입니다. 누가 누구를 자랑한답니까? 설령 자랑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2)
보세요...바울은 성도들에게 선한 행실을 갖도록 권유합니다. 그 이유는요? 바로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의도마저 님들 눈에는 “행위 구원자”이며 “선한 행실에 대한 자랑질”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겁니다.부끄럽지 않습니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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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어린 아이들이라도 파악할 만한 분명한 구절들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칭 정통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분명하고 명확한 구절을 자신들의 교리에 맞춰 해석을 시도하기 때문에 모호하고 핵심을 찾을 수 없는 교리들이 즐비합니다.
제가 자꾸 “인간의 철학”이라고 이야기한 것은 학문으로서의 철학 자체를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라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골로새 2:8)에 나온 것처럼 그리스도를 따르기 보다는 사람의 전통이나 세상적인 학문으로 복음을 왜곡하는 현상을 빗대어 쓴 말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한다고 하여 그것이 인간의 사상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하지 말길 바랍니다. 이중예정설은 하나님을 빙자한 인간의 사상일 뿐이라고 보니 말입니다. 예정설을 주장하는 장로교 측에서도 이중예정설을 (상당수)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아시나요? 또한 그 외 여러 교단에서도 그걸 부정하는 걸 말입니다.
그럼 왜 저는 이중 예정설이 거짓된 것이라고 보느냐....가장 기본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셨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중예정설에 의하면 우리 인간들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뭐 하나님을 믿고 따르고 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구원 받을 자와 지옥 갈 자를 선택하셨다는 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이중예정설이 맞다면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모든 이들을 구원 시켜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인가요? 아니죠. 누구라도 구원받기로 원하는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 1:12)라는 말씀에서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아니구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들어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 때 그분이 나와 더불어 먹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강한 설교를 했을 때 마음의 찔림을 받은 이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사도 2:37)
이중예정설을 믿는 이였다면 이렇게 말함이 옳습니다. “너희들은 선택을 할 권리가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요 권세다”
하지만 베드로는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 (38절)
즉 회개하고 침례를 받아 죄사함을 받으란 이야기였습니다. 이것이 행위로 인한 구원을 주장하는 이방종교의 행태인가요?
또한 자꾸 기적적으로 살리심을 받았던 나사로를 예로 들어 구원을 얻기 위해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도 없고, 할 이유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럼 가나안 여자가 그녀의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를 향해 눈물어린 호소를 하고 심지어 자신을 개로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도 겸손의 태도를 보였던 여인의 모습은 어찌 이해를 하시렵니까?(마태 15:28) 혈루증 앓는 여인은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겉옷이라도 만지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 9:22)고 했죠? 이처럼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과정도 필요한 법입니다. 하물며 예수께서 하라고 명하신 것들을 행한다 하여 행함으로 구원받는 율법주의자나 이방종교라고 부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요.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한 것이구요. 그렇다고 하여 우리 인간이 예수를 주로 믿고 고백할 수 있는 선택권조차 없다는 것은 지나친 망상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비롯하여 많은 사도들이 왜 목숨을 버려가며 선교사업을 했단 말인가요?? 선교사업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이들은 전부 구원시킬텐데 말입니다.
그럼 이중예정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몇가지 근거 성구들을 볼까요?
1.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4-5)
이 구절을 보세요. 특히 ‘우리’에 초점을 주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말미암아”..라는 부분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즉 그리스도인들을 선택하시고 예정하셨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며 그분의 공로를 의지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그냥 구원받을 이들을 마음대로 선택하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적에 구원 하기로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장 13절에서도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하여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을 때에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입는다 했죠. 복음을 듣기로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믿음을 갖기로 한 자가 바로 창세 전에 예수께서 예정하신 사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선택권이 없다니요??
2.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1)
이게 어찌 구원받기로 선택받았다는 이야기입니까?? 야곱이 장자의 권을 이어받도록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이죠. 즉 구원과 무관한 사명에 관한 구절입니다.
3.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30)
전 구절도 보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28절),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절) 여기서 부름을 입은 자들이란 일방적으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한정시켜주고 있죠. 또한 단순히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 맏아들이라는 장자권(사명)과 관련된 설명임을 또한 알 수가 있습니다.
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 1:12-13)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한 자입니까?? 아니죠. 앞 구절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고 영접하기로 결정한 자들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란 말입니다.
5.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이 구절은 구원의 문제가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들을 그분의 종으로 불러서 사명을 감당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게다가 같은 장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이라고 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을 준다 했나요? 전도라는 다소 미련한 방법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기로 기뻐하신다 했죠.
6. “...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3)
보세요...진리를 믿음으로...구원을 받게 한다 합니다. 어디서 일방적인 선택으로 구원을 준다 합니까??
7.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벧전 1:2)
여기서도 구원을 예정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순종하고 속죄를 권세를 얻도록 택함을 받았다는 말이죠. 같은 장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7절) 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각 행위대로 심판하시고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22절)라고 하여 우리가 순종했을 때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는다 하였습니다. 여기 어디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구원 선택이 있습니까?? 오히려 순종을 이야기하지 않나요?
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윗 구절을 볼까요?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13:46-47)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알려줍니다. 즉 그들은 구원받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버렸으며.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했다고 합니다. 즉 그들은 구원의 기회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버렸기 때문에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를 얻은 것이며 그것을 기뻐하고 말씀을 찬송했다고 하죠. 그렇게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계획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말씀은 결과를 예정한 것이 아니라 결과를 보고 해석을 해준 것입니다.
만약 구원이 일방적인 선택이라면 어찌 유대인들은 그것을 버리고, 따르지 않기로 작정할 수 있겠습니까??
9.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요한복음 6:40절 보세요.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즉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 이끄는 자란 바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 아니라 “아들을 보고 믿는 자”에 한정하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도 이중예정설을 옹호한다고 말하는 성구들은 하나같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는 경우에 한정되거나 문맥의 흐르 상 개인의 선택으로 예수를 믿기로 결정한 자들을 하나님의 관점과 예지로 풀이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어느 구절에서도, 사람이 선택할 수가 없어서, 도무지 아무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과 멸망을 예정하셨다고 볼 만한 곳은 없었습니다.
이중예정설을 믿는 분들이여...
하나님은 모든 이들이 멸망하지 않고 회개하여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시인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끝까지 견딜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자 하는 자들은 값없이 복음이 주어집니다. 이러할진대 어찌하여 하나님은 구원을 일방적으로 선택했다 하시는지...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 3: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딤전 2:4)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태 10:22)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요한1서 4:15)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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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알지 못합니다.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어떤 분들이 표현하는 “신적본질의 단일성”이니 “상호교류가 가능한 구별되는 인격적인 면” 운운하며 늘어놓는 난해한 표현들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요한 14:28)는 분명한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보다 더 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셨고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히브리 5:8)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모르지만 하나님만 알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마태 24:36) 이렇게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성경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의 관계를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이걸 이해 못하고 복잡한 이론으로 이해불가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 이들을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삼위일체를 믿지 않으면 이단이라 정죄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 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분들을 전부 하나님이라 지칭하면서 말이죠, 그럼 어떻게 이해를 해야할까요? 제발 성경에도 없는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하지 마세요. 요한10:30에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했다 하여 이 두 분이 결국 한분이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 의미를 예수께서 알려주셨지 않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 17:21,22)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가 각 성도도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하나가 능력이나 본질에서 동일하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뜻과 목적 면에서 온전한 일치를 말하는 것인가요? 전 하나님과 예수님이 비록 능력 면에서나, 서열 면에서는 다를지는 몰라도 목적과 뜻에 있어서는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 분의 하나님으로 이해합니다.
인용하신 요한복음 1장을 볼까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 1:1)
상식적으로 생각할 일입니다. 말씀으로 표현되신 하나님(예수님)이 하나님(하나님 아버지)과 함께 계셨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에서는 두 분이 서로 개체적으로 존재하는 분임을 알려줍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 1:2,3)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 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죠.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즉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유의 상속자로 임명하셨으며 “그분을 통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며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 1장에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하신 겁니다. 그 어떤 구절에서도 삼위일체를 주장할 만한 내용을 발견하기 힘듭니다.
저도 동일하게 표현하지요...저도 이 모든 것을 체험적으로 압니다. 그리고 복잡한 이론 다 무시하고 성경에 기록된 것만 믿습니다. 님이 만나신 선교사들이 이런 복잡한 이론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말을 아무리 잘한다 한들 한계가 있을 수밖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다른 분이며,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던 아들임을 믿고 따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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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왜곡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스스로 순종만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분께서 내 죄를 씻기셨음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들에 대한 순종이 참됨 믿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수 없는 부류란 말 그대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말로만 주여주여 외치고는 있지만 주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마태 7:21,22) 이들에게 주님께서는 구원을 베푸실 수가 없습니다. 이건 그분의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라는 불변의 원칙을 보호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로마서 3:10절에서는 의인은 없고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건 스스로의 힘으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힘과 행위로만 구원받을 만한 의를 행한 자가 없단 말입니다. 그런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신 것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사람이 스스로 순종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줄 아십니까? 만약 사람이 스스로 순종할 수가 없이, 그저 일방적인 선택과 예정에 의해 순종이 프로그램된 것이라면 순종을 가르치는 다음과 같은 성구들은 전부 엉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 (요한 3:36)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히브리 3:18)
여기서는 아들을 믿으면 영생,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그분의 안식에 이르지 못한다다 했습니다. 순종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한 여부에 따라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데 이걸 순전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보시는 건가요?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사도 19:9)
이 구절에서도 나오죠. 어떤 이들은 마음이 굳어서 순종하지 않고 비방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개개인의 자유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인 건가요?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내리는 성령의 경우도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주어지기 보다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에게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사도 5:32)
그리고 순종에 대한 다음 구절도 보세요.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 6:16)
우리를 죄나 사망에 방치해 둘지, 아니면 순종을 통해 의에 이를지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아브라함도 보세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히브리 11:8)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 잘 몰라도 순종해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가 의인이라 불린 것은 바로 이렇게 믿음을 갖고 순종해서가 아닌가요?
물론 순종할 수 있는 마음과 힘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마음과 힘을 온전히 받아들여 순종할지 안할지에 대한 여부는 각 개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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