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원한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 이외의 영역, 특히 “외모”가 중요하며 실제 경전 기록에서도 매력적인 용모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
한 사람이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 외모를 염두에 두고 심지어 교회 지도자들조차 외모를 보고 배우자를 얻거나 자녀의 배우자를 선택하였다는 말에 대해서는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나름대로 판단 기준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중에 하나가 외모일 수도 있습니다.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고 아무리 외친들 형제님 역시 매력적인 용모의 자매를 보면 기분이 좋지 않나요?
하지만 “영원한 배우자”로서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외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성격과 성품,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앙의 여부입니다. 매력적인 외모는 시간이 흐르면 변하게 마련인데 그것을 기준으로 “영원한 결혼”을 선택할 수는 없겠죠. 아무리 외모가 출중하다고 한들, 성격이 나와 맞지 않거나 책임감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없는 배우자와는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사시는 분들께 물어보세요. 시간이 지나가면서 외모는 아무런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답니다.
그리고 형제님께서는 경전에서도 매력적인 용모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았다고 하시는데요....물론 그런 경우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외모에 빠져서 하나님을 저버리다가 결국은 파멸의 길로 갔던 솔로몬과 삼손의 예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경전을 보실 적에 몇몇 이들의 외모에 대해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의 관점으로 배우자를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삼상 16: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신명기 10:17)
(경전에서도 인정한 것처럼) 사람은 외모를 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의 중심을 봅니다. 우리는 비록 연약한 인간들인지라 각 사람의 외모에 관심이 갈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면 외모보다는 그 중심이 더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 더욱이 영원을 함께 할 배우자를 선택함에 있어서 인간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그래서 배우자를 위해 하나님의 관점을 갖고 선택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본인 역시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합니다. (물론 배우자를 찾음에 있어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한 단정하게 준비하는 것은 중요하겠지요.^^)
경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외모 이야기가 나와서 몇 마디 할까 합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어떠했을까요? 성화나 교회 영화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외모가 참 출중하십니다. 하지만 아시겠지만 그것은 전부 상상화죠. 예수님이 실제 그렇게 생겼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외모는 부활하여 변형되셔서 눈처럼 희게 되신 모습 외에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예언한 이사야서를 보면 어느 정도 예수님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사야 53:2)
이 구절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이목을 끌만한 매력적인 모습이 전혀 없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것이죠. 죄도 없으시고 완벽하신 분이시지만 외모가 출중하지 않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고 하시니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보셨죠. 예수님은 잘생김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평범한 유대 아저씨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상당수를 기록한 사도 바울의 외모는 어떠했을까요?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조셉 스미스가 사도 바울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는 약 5피트(152cm)의 키와 검은 머리, 검은 피부를 가진 자였고, 큰 로마 코와 날카로운 얼굴과 작고 검은 눈을 가졌는데....”(조셉 스미스의 가르침 169페이지)
실제 2세기 문헌(《바울과 데클라 행전》)은 바울의 외모에 대해 “체구가 작고 양 눈썹이 붙었으며 코가 좀 크고 머리는 벗겨졌으며 다리가 구부정하고 단단한 몸을 가진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때때로 바울은 천사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바울은 키가 작고 큰 코에 대머리였고 다리가 구부정한 안짱다리였습니다. 남들 이목을 끌 외모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무시당할 외모였음에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쓰셔서 큰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뿐만 아니라 영원의 관점에서 배우자를 찾는 중요한 자격 중에 “외모”가 있다는 말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일 뿐이며 하나님의 생각이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2. 성전 성약의 기회조차 받지 못한 이들은 영원의 길에서 도태되는가?
형제님께서 인용하신 교리와 성약 구절을 다시 보지요.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장가들거나 시집가는 일이 없고, 다만 하늘에서 천사로 임명되나니, 이 천사들은 섬기는 종들로서, 훨씬 더 크고 뛰어난 영원한 영광의 무게에 합당한 자들을 위하여 섬기는 자들이니라. 이는 이들 천사는 나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그들은 커질 수 없고 모든 영원에 걸쳐 승영함이 없이 구원 받은 상태로 따로 떨어져 홀로 있게 되나니, 이후로는 신이 아니요, 다만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천사니라.” (교리와 성약 132편 16, 17)
영원한 결혼을 하지 못해서 천사가 된다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단지 성전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천사로 전락(?)하게 된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제가 표시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보세요. 이들은 “주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서 충분한 기회가 있었지만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이유로 인해 성전 결혼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구절이 아닙니다.
우리는 회복된 복음을 통해 생전에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자들에게는 영의 세계에서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뿐입니까?
조셉 스미스는 시현을 통해 해의 왕국의 상속자들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중에 어린 시절 사망한 그의 형 앨빈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 형은 침례를 받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런 기업을 얻었을까 의아해 합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같이 주의 음성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기를, 이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은 자로서 만일 머물기를 허락 받았더라면 그것을 받아들였을 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되리라...이는 나 주가 모든 사람을 그들의 행위에 따라, 그들 마음의 소원에 따라 심판할 것임이니라.”(교성 137:5,7)
만약 복음이 전할 기회가 있었을 때 받아들였을 자들은 모두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말씀이죠. 그리고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 뿐만 아니라 그 마음의 소원에 따라 심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정말 마음을 다해 의로운 배우자와 성전에서 결혼하고 싶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한 아들 역시 “그들 마음의 소원”에 따라 결정되어 해의 왕국의 상속자가 된다는 구절로 이해했습니다.
실제 로렌조 스노우 회장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충실한 생활을 한 후기성도로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어떠한 일들을 하지 못했다고 해서, 죽은 뒤에 잃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만일 한 젊은 남녀가 결혼할 기회가 없었고, 그들이 죽을 때까지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다면, 다른 남녀들이 이러한 기회를 받아 그것을 향상시켜서 얻는 모든 축복과 승영과 영광을 그들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확실하고 분명합니다.” (로렌조 스노의 회장의 가르침 138쪽)
정리를 하자면 이런 저런 이유들로 인해 영원한 결혼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만 신앙 안에서 충실하고, 그들 마음에 영원한 가족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갖고 있다면 모든 축복과 승영과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지자의 약속입니다. 승영에 이르지 못한, 천사처럼 된다는 교리와 성약의 구절은 자신의 선택으로, 그 결과를 알지만, 그리고 충분한 기회가 주어졌지만 영원한 결혼을 하지 않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러지 못한 이들을 모두 싸잡아 모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님의 “장막의 이편이나 저편에서 주어질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할 어떠한 방법으로도 자신의 표준을 타협하지 마십시오.” (리아호나 1999년 7월호 31쪽)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영원을 위한 표준을 절대로 타협하지 마십시오.
'교회의 역사와 교리 > 결혼과 가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성애자 자녀들의 침례 제한에 대해... (0) | 2015.11.26 |
---|---|
미국의 동성애 결혼 합헌. (0) | 2015.07.01 |
교회 모임을 통해 가정이 강화됨... (0) | 2013.06.09 |
교회의 부름은 가족과의 유대를 약화시키는가?? (0) | 2013.02.10 |
몰몬교는 동성애자들을 증오하는가?? (0) | 2013.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