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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이버의 주인장은 지금껏 제기한 반론에 대해선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그저 본인의 생각을 근거로 한 비판을 지속적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교리와 성약 132편을 나름대로 분석하면서 “거짓 계시” 혹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다른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리와 성약 132편의 전문을 올리고 몇몇 구절에 대해 본인의 생각을 너무나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핵심을 잡기 어려웠기에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나서야 몇 가지 심각한 오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점들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 성경, 특히 구약에 나오는 결혼은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비롯한 몇몇 이들의 다처 결혼은 그리스도의 아내가 많은 성도들로 구성될 것임을 나타내는 모형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건이나 등장 인물들이 신약 시대의 예수님을 표상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구약의 모든 부분이 주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하여 구약의 모든 사건이나 인물들이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무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5:14절에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되어 있다고 해서 그의 아내 이브를 예수님의 신부, 혹은 성도들로까지 확대 해석을 해버린다면 아담과 이브의 타락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타락으로 설명하게 되어야 할까요? 그리고 그 사이에 나온 가인과 아벨은 또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 역시 예수님을 상징한다고 하여 그의 모든 행적들을 예수님과 연관하여 해석을 해야 한다면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이야기나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결혼하여 타락한 이야기는 또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순결의 법을 어기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던 것일까요? 아니면 이방 여인들, 그것을 이방종교(교회)로 해석해서 예수님이 우상숭배자들과 관계를 맺고 타락했다는 의미입니까?
구약이 예수님을 모형으로 한다는 전제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세부점 모두에게 적용했을 경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해석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령 창세기에 나와 있는 남녀간의 결혼이란 원칙을 에베소서 5:31에서 교회와 신부로 설명을 했다고 해도 아담과 이브의 결혼 자체가 실제 결혼이 아니라거나 구약에 등장하는 모든 결혼을 “예수님과 그분의 성도”로 일괄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 전체를 왜곡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다가 구약에 등장하는 일부다처가 예수님과 그분의 성도들이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해석은 다른 개신교회조차 그렇게 해석하지 않은, 기괴한 해석일 뿐입니다. 특히 “아브라함은 많은 아내를 가진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라는 표현은 그 어느 곳에서도 뒷받침되지 않은 님만의 해석일 뿐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친,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용된 “아브라함의 품”(누가 16:22)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를 상징합니다.
조셉 스미스는 예수님을 대표하는 표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실제로 구약 시대에 이루어졌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비롯한 구약의 선진들이 왜 많은 부인들을 두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그에 대해 간구하는 가운데 교리와 성약 132편의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2. 교리와 성약은 예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의미가 아니라 소위 새로운 율법을 제시한다.
로마서 10:4에 나오는 “율법의 마침”에서 나오는 “율법”이란 구약 시대의 의식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예표하는 의식에 한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를 구속할 수가 없습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 2:15,16)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로새 2:14)
윗 구절에서도 설명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폐한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진 수많은 지침들(법조문)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이후로는 아무런 계명이나 율법도 주어지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말씀하시되 주께서 이르시되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과 더불어 새 언약을 맺으리라 또 주께서 이르시기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히브리 8:8,9)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죄를 이루신 이후부터 우리를 구속하는 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언약(성약)과 같지 않은 새 언약(새로운 성약)입니다. 그러한 새 언약 하에서도 여러 가지 법(율법)들이 주어졌는데 실제로 살인, 간음, 도둑질, 탐심 같은 모든 것들도 새로운 법에 의해 금지된 것입니다. (요한1서 3:5, 데살로니가전서 4:3-7, 에베소 4:25, 28. 고린도전서 6:9-11, 골로새 3:5)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하여 그분의 사도들을 통해서 주어진 많은 명령과 지시 사항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현대에도 계시를 통해 주어진 계명들도 이에 포함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한1서 5:3)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들은 예수께서 모든 율법 및 계명들을 성취했고 완성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행함도 필요 없으며 따라서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을” 행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라는 것일까요?
3.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정죄 받는다는 말은 거짓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식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2절에서 보면 알겠지만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했기 때문에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이 무엇인지는 로마서 7장 6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여기서 말하는 ‘죄와 사망의 법’은 “우리가 얽매어 있던 것” “율법의 조문의 묵은 것”으로 표현되는 모세 율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모세 율법으로 인한 정죄함은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의도와 무관하게 예수님만 믿으면 그 어떤 정죄함도 없다는 말은 결국 어떤 일을 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디모데전서 5: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 (야고보 5:12)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로마 14:23)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로마서 2:1)
최소 위에 인용한 구절만 보더라도 정죄함 받을 이유들이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의 첫 믿음을 저버리거나, 거짓된 맹세를 했을 때, 믿음으로 하지 않을 때, 그리고 남을 판단할 때도 정죄함의 대상이 됩니다.
4.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용서 받지 못할 죄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다.
이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주장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누가 12:10)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마가 3:29)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한1서 5:16)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 6:4-6)
성경에서는 이처럼 성령을 모독한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은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도 있죠. 여기서 말하는 “성령을 모독한”이란 말의 의미는 히브리서에서 언급한 것처럼 빛과 하늘의 은사를 맛보도 성령에 참여하고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하여 고의적으로 거부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어리석은 것으로 보는 님은 성경을 고의적으로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5. 아브라함의 일부다처는 사라가 원해서 진행한 것이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은 아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창세기 16:2)
“사라는 내가 아브라함에게 하갈을 아내로 취하라 명하였을 때 율법에 따라 아브라함을 받들었느니라.” (교리와 성약 132:65)
창세기에는 사래가 “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교리와 성약에서는 하나님이 사라에게 명한 것이라 표현했다고 하여 모순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수많은 예를 찾아볼 수 있지만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이 보인다고 해서 이를 거짓의 증거로 본다면 성경은 말 그대로 모순투성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태 27:5)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사도 1:18)
가롯 유다의 죽음을 묘사하는 두 구절인데 마태복음에서는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 사도행전에서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이 내용을 근거로 우리는 성경이 모순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유다가 목을 매어 죽었는데 끈이 끊어져 떨어져 배가 터졌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누가 23:39-4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마태 27:44)
누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태복음에서는 두 강도가 전부 예수님을 욕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무엇이 진실일까요? 이 두 구절은 서로 모순일까요? 아니면 처음에는 두 강도가 전부 예수를 욕했다가 나중에 한 명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봐야 할까요?
이처럼 성경 내에서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구절들은 입체적으로 이해하면 충분히 정황을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교리와 성약과 창세기의 구절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에게 명한 것을 사라는 진실로 “원해서”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말했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4장에서 바울은 사라와 하갈을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상징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하갈을 맞이한 것을 사라의 개인적인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훗날 새 언약과 옛 언약을 상징해서 설명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마련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입니다.
6. 현대의 일부다처
이 부분에 대해서는 블로그의 많은 글들을 통해 이미 설명하였기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블로그 일부다처란 참조)
핵심은 일부일처가 하나님의 원래 방법이었으나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일부다처가 허용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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