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우리는 왜 교회에 가야하나요?

모로나이 2019. 11. 2. 00:36






우리는 교회에 왜 오나요? 일요일 이른 아침에 불편한 복장을 하고서 교회에 와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깨우느라 일요일마다 고군분투해야 하는 부모님들의 지친 모습을 볼 때마다, 부모님의 등살에 못 이겨 억지로 교회에 오긴 했는데 모임이 재미도 없어서 그저 구석에서 핸드폰이나 하고 피곤에 절어 잠이나 자고 있는 청소년들을 볼 때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어 잠시도 붙어 있지 못하고 움직여야 하는 우리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번 딸 아이가가 교회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이유를 물어보니 늦잠도 못자고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야하고, 일요일에 맛있는 것도 못 사먹고 TV도 못보고 놀러다니지도 못하고...그래서 가기 싫다는 겁니다. 일요일에 그런 것 못하니까 토요일만 되면 이곳저곳 놀러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먹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은 했지만 얘가 벌써 이렇게 생각하니 나중에는 어쩌지라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교회에 나와야 합니까? 물론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성찬을 취함으로서 우리가 맺은 성약을 새롭게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 나와서 영생즉 승영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축복을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일요일 아침의 단잠을 포기해야 하고, 우리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쳐야 하고 교회의 이런 저런 재미없는 모임에 참석하도록 권유 받습니다.

 

그럼 정말 우리는 내세의 그 축복을 위해 현세에서 희생만 해야 하고, 고통을 자처해야 하며,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도 자제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하나요? 만약 그런 것이 전부라고 하면 정말 신앙생활은 불행할 것 같습니다. 영생의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내세의 축복을 위해서는 네가 무조건 희생해야 하고 이것하지 말아야 하고 저것 해야 하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 아이들에게 참으로 고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의 주제를 내세에서의 영생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복음을 통해 현세,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런 주제로 이야기한다고 하여 내세에서의 영생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밝힙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이유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실제 교리와 성약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배우라. 의의 일을 행하는 자는 자기 상을 받으리니, 곧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으리라.” (교성 59:23)

 

이 구절에서는 의를 행하는 자, 즉 복음대로 생활하는 자들은 자기의 상을 받게 되는데 이 세상에서는 평화, 그리고 장차 올 세상, 즉 내세에는 영생을 받으리라고 알려줍니다. 저는 이 구절에 나오는 복음을 통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평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이 평화의 개념은 단순히 심적인 평안함을 의미하기 보다는 갈라디아서 5: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디모데후서 31절을 보면 바울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세상은 분란과 어려움, 그리고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뉴스를 보기가 참 무섭고 앞이 보이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진저리를 치기도 합니다. 가치관의 혼란으로 무엇이 참인지 구분하기 힘든 시기가 되었습니다. 청소년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가치관의 실종으로 인해 방황합니다.

 

이럴 때 예수께서 보혜사 성신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한 14:27)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단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릴 뿐이거나 육적인 만족을 일시적으로 충족시키는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이후에는 더욱 공허해지는, 그래서 더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시는 평안은 지속적이며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며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위로와 함께 특별한 약속을 더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 8:32)는 말이 있지요. 진리가 무엇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까?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털끝만치의 죄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를 죄로부터 온전하게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속죄가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이 계시는 보좌 앞으로 자유롭고 떳떳하게 나갈 수가 있습니다.

 

진리는 인생의 목적에 대한 무지함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왜 태어났으며 왜 살아야 하고 죽은 이후에 어떤 삶이 주어지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몰라 방황할 필요도 없으며 이런 저런 가르침에 휩쓸릴 이유도 없습니다.

 

진리는 이 세상이 주는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빌립보서 46,7절에 나온 것처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 4:6,7)는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많은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상한 마음과 애통하는 심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야곱서 29절을 보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기쁜 말씀, 곧 상한 영혼을 치료하는 말씀을 듣고자 모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한 고후 1:4절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란 중에서 위로하시는 분이라고 알려줍니다. 진리는 힘들고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하는 길르앗의 유향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영생의 길에 이르게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세에서도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인간이 존재함이 기쁨을 누리게 함이기에 주님께서 세우신 이 교회는 단지 성도들에게 내세를 위한 고통과 인내만을 요구하기 보다는 우리를 존재 목적에 따른 것처럼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이 모든 축복과 평안,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복음대로 생활할 때 현세에서 우리가 누릴 그 행복과 평안, 기쁨은 어떻게 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기쁨과 행복을 찾아보면 참 세상의 방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례로 세상적인 방식으로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기쁘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방법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고 알려줍니다. 세상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라고 하지만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 버리지만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면 영생하도록 보존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을 봐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의를 위해 핍박받고 비난받는 것이 나쁘다고 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에 대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애통하는 것이 힘들고 괴로운 것이지만 주님은 위로를 받을 것이기에 복이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역설의 축복이라 불리는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의 눈으로 봤을 때는 이상하고 모순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주님은 그런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더 큰 축복과 기쁨을 주고자 하십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단지 편안하게 모임을 줄이거나 재미없는 영적인 모임을 줄이고 가능한 즐거운 활동 위주의 모임을 많이 도입하고 청소년들의 재미를 위해 획기적인 것을 도입한다고 해서 될 것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잊고 봉사할 때, 주어진 부름에 충실할 때, 애통해 하는 사람과 같이 애통해 줄 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심령이 가난하여 의에 주리고 목말라 경전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풍족하게 먹고 영적으로 배부름을 느끼게 될 때 비로소 주님께서 약속하신,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모든 축복과 평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에 오면 이런 축복들과 평안함을 누립니다. 죄와 세상이 주는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1주일 동안 받았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온전히 치유함 받습니다. 자신을 잊고 봉사하시는 회원들의 모습을 통해 감동을 받으며 힘을 얻습니다. 그분들이 전하는 간증이나 공과를 통해서 영적으로 풍족함을 누립니다. 비록 부모님 때문에 억지로 끌려 나올 수 있겠지만 안식일 모임에 빠지지 않고 제 자리에 참석해 있는 청소년과 초등회 어린 아이의 모습 속에서도 대견함을 느낍니다. 지금은 힘들어하지만 언젠가는 복음의 참된 기쁨을 맛보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곧고 좁은 길에 끝까지 머물 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영생의 길에 이르게 될 것임을 확실합니다. 그런 곧고 좁은 길에서 끝까지 남아 있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복음을 통해 기쁨을 누려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