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성찬식 말씀: 첫사랑을 회복하자

모로나이 2021. 3. 22. 23:36

 

아마 책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황순원의 소나기라는 소설에 대해서는 들어봤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소설은 국어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소설이고 1953년에 발표된 이후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재탄생되어 왔습니다. 솔직히 극적인 이야기나 재미를 줄만한 요소는 별로 없지만 소년과 소녀의 순수하고 깨끗한 첫사랑을 다룬 작품이라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첫사랑을 경험했을 것이고 첫사랑이 주는 설렘과 두근거림, 그리고 당시의 순수한 감정이 생생하게 그려질 것입니다. 특히 첫사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것이기에 유독 강렬한 설렘과 두근거림이 찾아옵니다. 비단 첫사랑만이 아니라 첫 여행의 즐거움이나 첫 월급의 뿌듯한, 그리고 첫째 아이의 출생 등 누구나 첫 번째 경험이 주는 느낌은 우리는 오래동안 특별하게, 그리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억하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서두에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는 제 첫사랑이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고 여러분의 첫사랑의 설렘에 대해 그려보라고 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경전에서 우리에게 첫사랑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초반부에 보면 아시아의 일곱교회가 언급되어 있는데 주님은 각 교회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잘하는 점들은 칭찬하시고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질책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히 에베소 교회에 대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첫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요한계시록 2:4,5)

 

요한을 통해 주신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인내하는 점에 대해서는 칭찬할 만하지만 주님에 대해 처음 가졌던 사랑을 버렸기에 책망하신다고 하시면서 도대체가 어디서부터 그 첫사랑을 버렸는지 살펴보고 회개해서 처음 가졌던 그 마음과 행위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할 때 복음은 전한 곳으로 나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 회원들에게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는 말씀처럼 그들에게 간곡히 권고하였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지도자들을 지지하며 신권의 권세로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은 이들이 소아시아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주님께 사랑받는 제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첫사랑에 빠진 이들처럼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에 대해 처음 들었을 때 유독 강렬한 설렘과 두근거림을 느꼈서 도저히 남들에게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 첫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은 점점 그 첫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고 그저 형식적으로나, 의무감으로 주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니 점점 감사와 감격을 잃어 버리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영화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예수님은 이러한 태도에 대해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언급한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사랑할 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순수하고 뜨겁고요 사랑하는 이에게 오는 연애편지는 읽고 또 읽습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것이 첫 사랑 아닐까요?

 

예수님에 대한 첫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처음 회복된 복음을 듣고 선교사를 만나 토론을 듣고, 침례를 받았을 당시를 떠올려 보면 어떻습니까?

 

처음 회복된 복음을 들었을 때 온 세상이 정말 행복으로 가득 찬 것 같았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가 알게 된 복음을 막 전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경전을 읽으면 그건 또 마치 달달한 사랑의 문구로 가득 찬 연애 편지 같았습니다. 교회 모임이 있는 안식일이 정말 기다려졌구요 교회 건물만 봐도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난 정말 복음 안에서 끝까지 견딜 것이다 다짐 또 다짐했습니다. 주님과 회복된 복음에 대한 사랑은 정말 환경과 조건을 초월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요? 과거의 뜨거웠던 사랑과 열정을 지금과 비교해 보면 어떻습니까? 저도 과거 침례를 받았을 당시와 비교해 보면 참 부끄러운 것이 많습니다. 처음 침례 받고 정말 미칠 듯이 경전을 연구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복음을 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제 신앙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하셨고 몰몬경을 보는 족족 버리셔서 책장 깊숙이 몰몬경을 숨겨두고 다 잠든 밤에 몰래 일어나 몰몬경을 읽으면서도 감사해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사랑에 빠지니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열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 우리 모두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예수님과 첫 사랑에 빠졌던 당시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코로나로 인해 한동안 교회 모임을 할 수가 없었으며 다행히 지금은 제한적인 방식으로 모임을 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칫 이런 일들이 우리의 신앙을 위태롭게 하거나 주님과의 첫 사랑의 그 설렘을 흐리게 할 수 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 하지요. 아무리 열렬히 사랑하고 없으면 죽을 것처럼 굴다가 남자 친구가 군대에 가버리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것이 일반입니다. 일단 눈에서 멀어지면 나도 모르게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 세상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 모임을 제한적으로 갖게 되면서 말 그대로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 멀어지는 일들이 벌어질까 심히 우려됩니다. 처음에는 온라인 모임을 할 때 교회에 참석하는 마음으로 일찍 준비하고 옷차림도 경건하게 하던 것이 시간이 흐르고 일상이 되면서 시간 제대로 준수하는 것도 귀찮고, 그냥 늦게 일어나 잠옷 차림으로 누워서 감상하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켰다고 만족해하고, 이제는 그마저 귀찮아 미루고 주일학교나 신권회 상호부조회는 그냥 패스해 버리는 일들이 벌어질까 우려가 됩니다. 정말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에 멀어지는, 첫사랑의 그 설렘과 감격이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질까 우려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주님의 다음 말씀을 다시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어디서부터 내가 주님과의 첫 사랑의 감격에서 멀어지게 되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고 이에 대해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다시금 가져보도록 해야 합니다. 눈에서 멀어졌으니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다시금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이 비대면 시기에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3가지 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예쁘고 멋있게 단장을 하고 일찍부터 서두르지 않던가요? 너무 설레서 잠조차 잘 못 이루지 않던가요? 그렇기에 대면으로 참석하거나 비대면으로 참석하거나 주님이 마치 내 앞에 계신 것과 같은 태도와 마음 가짐으로 시간에 맞춰서 성찬식 모임에 참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사랑의 달달한 문구로 가득 찬 연애편지는 한 번 읽고 끝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까지 희생 제물로 주신 기록으로 가득 찬 연애편지인 경전을 부지런히 읽고 상고하십시오. 그럼 복음을 처음으로 들었을 당시 느꼈던 그 설렘을 다시금 느끼게 되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연인과의 통화는 시간 가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카톡이나 문자로 밤을 지세워도 피곤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해..라는 한 마디에 너무 설레서 밤잠 못이루고 며칠을 설레었으 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주님께 기도로 대화하고 그분의 고요하고 세밀한 음성을 들어보면 어떨까요?

 

그럼 이렇게 질문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나의 선택이 아닌 부모님 때문에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기억도 못한 8살에 침례를 받아 주님과의 그 첫 사랑이 없는 것 같다고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몰몬경을 번역하고 싶어했던 올리버 카우드리에게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보면 주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네 생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만 하느니라. 그러고나서 그것이 옳은지를 내게 물어야 하나니, 만일 그것이 옳으면, 내가 네 가슴을 네 속에서 뜨겁게 할 것이라. 그러므로 너는 그것이 옳은 줄 느끼게 되리라." (교성 9:8)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하셨느지, 그리고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알고 싶으시면 의식적으로 경전을 연구하고 하나님께 간구해서 물어봐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가슴 속에서 뜨겁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뜨겁다는 말이 “조용한 확신과 위안과 따뜻함의 의미”이긴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첫 사랑에 빠질 때 느꼈던 그 열정과 가슴 설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은 처음 봤을 때 뿅 가는 그런 의미의 첫 사랑이 아니라 자세히 알아보고 그분와의 관계를 지속했을 때 느끼는 확신의 토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건, 나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한들, 우리는 의식적인 노력과 시도를 통해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음 구절을 읽고 의문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15)

 

이상했습니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들이 있었을 텐데 왜 바울은 굳이 그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복음이란 믿지 않은 이들에게 전하는 것 아닌가 말이죠. 그런데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다시금 복음을 전해 그들이 처음 복음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격과 기쁨을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말입니다. 특히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16)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복음은 구원을 주는 능력입니다. 불완전하고 부족한 나를 불러서 주님의 도구로 삼으시고 구원을 주신다는 그 복음을 들을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특히나 수많은 교회들 사이에서 어느 교회가 참된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회복된 복음을 알게 하시니 그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럼 감격을 다시금 깨닫게 하기 위해 바울이 그토록 로마 교회 회원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복음에 대한 감격과 확신, 그리고 사랑이 다시금 가슴에 불붙어 뜨거워지면 좋겠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지면 두려울 것이 없고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발 벗고 나서기 마련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부분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과의 그 뜨거웠던 첫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금 감격한다면 이 모든 시련들은 우리에게 진실로 가르침의 순간이 되며 새로운 것을 향하여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