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비롯하여 교회 초기 역사에 기록된 몇몇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 혹은 특정한 경륜의 시기가 저물거나 시작될 당시, 현재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보면서 의문을 품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신 장면이 있습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창세기 22:2)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지금도 그러하겠지만 과거에도 잔인한 일이며 하나님이 “가증한 행위”라고 부른 것입니다. (신명기 18:9,10) 그런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사랑하는 아들인 이삭을 산에서 번제(생명체를 통째로 태워 제물로 바친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주신 것이죠. 그저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을 가지고, 그리고 현대의 사고 방식을 가지고 이 사건을 판단해 본다면 사람을 불에 태워서 바치라고 명령한 여호와라는 존재는 잔인무도한 악신일 뿐이며 그것을 무조건 맹신해서 실제로 행하려 했던 아브라함은 맹신의 대표적인 인물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례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주십니다.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호세아 1:2)
음란에 대해 그토록 싫어하셨던 하나님이 호세아라는 사람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음란이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 (유다서 1:7)을만큼 하나님이 극도로 싫어하는 죄악이며 “음란과 온갖 더러운 것과 욕심은 여러분 가운데서 이름조차 부르지”(에베소 5:3)말아야 할 것인데 여호와라는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선지자에게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또 그것도 모자라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혹자들은 이런 명령을 내린 여호와라는 존재는 음란 마귀가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따질 수가 있습니다.
신약에는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자신의 모든 재물을 다 팔아 교회에 바쳤는데 그 중에 일부는 감추어 두었나 봅니다. 그의 모든 재물을 다 팔아 교회에 헌납한 것만 봐도 이 부부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있는데 그 중에 일부를 내지 않았다고 하여 “사탄이 마음에 가득한 자요 성령을 속인 자”로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는 자며 자기 것을 다 바치되 그 일부를 내지 않았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부부의 목숨을 빼앗아 간 것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해석하는 이들에 대해 눈을 부라리면서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냐며 이빨을 갈고 분노의 눈초리를 쏟아 부을 수는 없겠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왜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그러한 일들을 몇몇 이들에게 명하고 행하실 수 있었을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디모데 후서 3:16)하다고 했는데 ‘도대체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하고 말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런 일을 일어나게 하면서 또 그것을 기록하게 하여 우리 시대를 위해 남겨 두었단 말인가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변하지 않은 특정한 교훈(진리)을 위하여 일시적이며 특수하게 선정된 사례요 본보기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께서는 반의 분위기를 위해 본보기로 한 명을 선택하여 혼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본보기로 선택된 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처럼 억울한 일은 없을 수 있으나 결국 그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 자리에 있는 다른 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교훈을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 성경에서도 사도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고전 10:6)
사도 바울은 당시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신앙으로 광야에서 모두 죽임당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그것을 본보기로 삼아 악을 즐겨하지 않도록 강력한 권고를 전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보기로서 일회적이며 특수한 사건은 주로 역사적으로 분기점이 되는 시점에 주어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모형으로 한 예비적인 표징임과 동시에 아브라함을 통한 경륜의 시대와 그의 자손을 통하여 성약의 자녀들이 축복을 받게 되는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호세아가 음란 아내와 결혼하고 음란한 자녀를 낳아야 했던 상황은 결혼 성약으로 묘사되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표현하며 죄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과 죄에 대한 심판 및 용서하시는 그분의 사랑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상징이며 본보기였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는 이제 막 시작된 신약 교회에 본보기로 주어진 사건이며 자기 자신과 성령, 그리고 하나님을 비롯한 교회 공동체를 속이는 것의 엄중함을 보여주기 위한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정한 메시지를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하시고 명하신 몇몇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교훈을 배우고 유익을 얻는 것이 성경이 기록된 목적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목적에 대해 무지하거나 숲을 보지 않고 그 숲에 속해 있는 나무들에 달려 있는 송충이의 징그러움만을 강조하려는 이들에게 이 모든 사례들은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불가해한 존재, 아니 악의 화신으로까지 왜곡하게 만드는 일까지 이어집니다.
반의 분위기를 위해 일시적으로 본보기로 세워 혼을 낸 선생님에 대해 졸업하는 그 날까지 의심과 증오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하며, 정작 그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보여준 관심과 사랑에 대해 눈이 멀게 만드는 그 편협한 시각이 성경과 그 속에 담긴 가르침을 왜곡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본보기로서 여겨지는 몇몇 사건들이 회복된 교회 초기 역사에서도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일부다처와 관련하여 초반기에 있었던 몇몇 사건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의 원리를 거부하려 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 그에게 검을 휘두르며 명했던 사건들, 몇몇 남편이 있는 여성들에게 인봉의 개념으로 복수 결혼을 소개한 일 등등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 봤을 때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초기 교회 역사에 존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특정한 교훈을 주기 위해 일시적으로 명하고 시행된 본보기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천사가 검을 휘두른 사건은 세상적인 시선이 두려워 하나님이 명하신 것들을 따르지 않은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인봉의 개념으로 교회 초반에만 몇몇 사례들에게 보여준 다처 결혼의 형태 역시 훗날 성전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는 인봉과 영원한 가족의 중요성을 드러내기 위해 일시적으로 허락된, 어떻게 보면 극단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방법으로 크게 각인 시켜준 사건이 아닐까요?
교회의 추한(?) 역사에 대해 지나치게 쉴드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몇몇 사건을 이해 못하는 것처럼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초기 교회 역사의 일부 사건들 역시 이해 못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저는 그러한 이해 못함에 대해 비난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이해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비롯하여 초기 교회 역사에서 보여준 그 사건들을 그 시대에 한정된, 단편적인 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그 이후 전개되는 사건들의 큰 맥락 속에서 바라봤을 때 분명 이해할만하며, 그 사건 사건 하나들은 일회적이며 특수한 사건들이기에 더 이상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구가 일어나지 않을 것임에 안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하여, 조셉 스미스 초기에 몇몇 사건들이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입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를 불에 태워 번제로 바치라는 요구도, 음행하는 여자를 만나 음행의 자녀를 낳으라는 요구도 없을 것이며, 우리가 바치는 헌금의 일부를 내지 않는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일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가 나타나 우리에게 다른 여인을 아내로 취하라는 요구도 없을 것입니다. 왜나고요? 그런 사건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로 일시적이며 특수하게 허락되었을 뿐이고 더 이상 반복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러한 본보기로서의 사건들은 특정 경륜의 시대가 열리거나 닫힐 경우에 주어지는 것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더 이상의 대배도로 신권이 사라질 우려가 없는 “마지막 경륜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 자체에 집착하여 그것을 현대식 버젼으로 해석하여 비판하느라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그런 본보기로 통해 주어진 교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러한 교훈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계획하는데 어떻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고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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