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성찬식 말씀) 복음 안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모로나이 2021. 5. 30. 22:29

이런 저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우리를 사로잡곤 합니다. 1년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로 인해 여러모로 지쳐있으며,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이런 저런 문제들로 인해서 개인이나 가족이 표현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가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오늘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니파이후서 2장 25절을 보면 사람이 존재함은 기쁨을 갖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기쁨, 즉 행복을 누리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또한 교리와 성약 59편 23절에서 보면 복음이 주는 궁극적인 혜택은 이 세상에서는 평화를 장차 올 세상에서는 영생을 받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낍니까? 넓은 평수의 집으로 이사 가면 행복할까요? 평균 이상의 수입으로 돈 걱정하지 않고 여유 있게 살면 행복을 느끼십니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면 행복을 느끼십니까? 자녀들이 속 썩이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면 행복할까요? 물론 이 모든 것들은 행복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위해 우리는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을 합니다.

 

하지만 경전에서는 인간의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인 행복의 원인으로서 이런 것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1서 2장 16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면서 우리가 멀리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기에 화려한 것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면서 나 이렇게 살아서 행복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버지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기에 영원하지 않으며, 영원하지 않기에 우리 주변 상황에 따라 우리는 쉽게 불행하게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할 때 주된 화제 거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혹시나 이런 세상에서 온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대화의 주제로 삼지는 않았던지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있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행하고 걱정을 많으셨을 상황 속에서도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요한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누리기를 바라시는 행복은, 바로 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이 열망하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을 충족시키는 것들로서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 평안이나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구대륙과 신대륙에서 동일하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몰몬경에는 제3니파이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이면 구대륙과 신대륙 백성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전해주셨을까요?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 내용은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흔히 산상수훈이라 불리는 장면입니다.

 

이 기록에서는 총 8가지의 행복한 상태가 나옵니다. 이런 행복의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성도로서 우리가 기르고 누려야 할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예수께서 언급하신 이 행복의 과정은 우리의 본성과는 상당수 거리가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태어나자마 얻을 수 있는 성품도 아니며 오로지 복음 안에서 거듭난 이들만이 닮아가고 소유할 수 있는 주님의 성품입니다. 그런 행복의 상태를 우리가 어떻게 누릴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다 언급할 수는 없고 그 중에 몇가지만 말해보고자 합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의 저들의 것임이라. (마태 5:3)

 

몰몬경에서는 동일한 가르침을 심령이 가난하여 “내게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가난일 것입니다. 영국의 문학가 사무에 존슨은 ‘가난은 행복의 적’이라고 했던 것처럼 가난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고 갖가지 사회악을 키우는 온상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가난이라는 단어를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즉 그분 앞에 우리의 욕심을 버리고 철저하게 낮아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심령에 무엇인가를 잔뜩 갖고 있어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꾸 뭔가를 자랑하게 만들고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는 가운데 나는 저 사람보다는 거룩하고 이 사람보다 더 합당한 것 같고 이렇게 나아가다보면 남들을 비판하게 되고 영적으로 교만한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가득 차게 되면 아쉬울 것도 없고, 기댈 데가 많기에 경전을 읽고 선지자들의 말씀을 들어도 마음 속 깊이 새겨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심령에 기쁨이 없고 감격이 없고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것을 드리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재미있겠습니까? 부름에 대해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겠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대단한 것을 가지고 있고 교만한 가운데 상당한 긍지를 느꼈던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했습니다. 심령 속에 담겨 있던 모든 것들을 싹다 비우니 예수께서는 그 빈 공간을 천국으로, 즉 말로 표현 못할 기쁨과 행복으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내게, 즉 예수께로 나오는 자가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 5:4)

 

흔히 눈물을 나약함의 표시라고는 하지만 모세서 7장을 보니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불순종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나오고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시면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약함의 표시라고만 볼 수는 없을 듯 합니다.

 

또한 모사이야서 18장을 보면 침례를 받을 사람들의 자격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또한 위로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것인데 슬퍼 우는 이들과 함께 울어주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성도의 진정한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감정적으로 흘리는 눈물은 각종 스트레스의 호르몬 혈중 농도를 내려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슬플 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일종 중 하나가 눈물을 통해 배출된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애통해 하는 자들이 마음이 안정되고 위로를 받으며 또한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면서 그들을 위로할 때 우리 스스로도 위로를 받고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우리의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는 자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행복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니파이후서 2:7을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상한 마음과 애통해하는 심령을 지닌 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셨다고 하였습니다. 경전 안내서를 보면 상항 마음을 갖는 것은 겸손해지고 통회하며, 회개하고 온유해지는 것으로 곧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애통해 한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서 벌거벗은 서 있는 자신을 볼 때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슬퍼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을 씻겨 주시고 나를 의롭다 선언해 주시고 그분의 나라로 인도해 주실 것임을 확신할 수 있기에 기쁨과 행복, 그리고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니파이의 시편으로 알려진 니파이후서 4장 17절을 읽어 보면 니파이는 “참으로 나의 마음은 나의 육신으로 인하여 슬퍼하며 나의 영혼은 죄악으로 인해 비통해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는 그 놀라운 일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유혹과 죄로 인해 슬퍼했습니다. 그렇게 애통해 하는 니파이에게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낮추어 내려오사 그토록 많은 자비로 사람들을 찾아 주신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닫고는 위로를 받고 행복을 회복하며 의의 반석이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죄와 나약함으로 슬퍼하고 애통해하지만 주님의 속죄가 있기에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우리의 죄가 양털처럼 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말로 표현 못할 행복을 누리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3.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니 배부를 것임이요. (마태 5:6)

몰몬경: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다 복이 있나니 그들이 성신으로 충만함을 입을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목마름이나 배고픔은 단지 약간의 시장기를 느끼는 정도의 배고픔이나 갈증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극심한 배고픔과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가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고통이 느껴질 정도의 느낌을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 배고파 죽어가는 자가 빵 한 조각을 찾듯이, 목이 말라 죽어가는 자가 물을 애걸하듯이 의를 구하는 자가 성신을 통해 충만함을 느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정말로 이와 같은 절박한 심정의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을 경험하고 있습니까? 이 회복된 복음에 대해 오랫동안 들어왔고 접해 왔으니 그저 당연히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그저 매일 듣는 이야기라 그런지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까?

 

영적인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지 못하는 분들은 교회에서 듣는 말씀들이 참 지겹게 느껴질 것입니다. 차라리 모임 시간에 핸드폰을 하거나 다른 책을 보는 것, 아님 잠을 자는 것이 시간을 활용하는 것처럼 느껴질 지도 모르죠, 지금과 같은 비대면 시대에 그저 핸드폰으로 접속하여 틀어놓고 다른 일과들을 진행하는 것도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영적으로 배고픔과 갈증을 느끼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목이 탈 정도로 갈증을 느끼는 이들은 작은 물 한 방울에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정말 배고픈 이들에게는 작은 사탕 하나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영적으로 정말 배고픈 사람이라면 한 말씀 한 말씀 놓치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참석하는 것 자체가 감격스러운 일이며 주님의 참된 복음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혹시나 교회의 모든 모임들이 지루하고 나에게 영양가 없다고 생각이 드실 때가 있습니까? 내가 여기에 왜 있나 싶거나 주어진 부름이나 임무가 하나같이 짐으로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교회에 다니면 행복해야 하는데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에 빠진 적이 있으십니까?

 

그럴 때 주님께 기도하시고 나에게 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을 달라고 요청해 보면 어떨까요? 복음을 처음 듣는 구도자의 심정으로 다시금 복음의 기본 원리에 대해 공부해 보면 어떨까요?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 여겼던 것들을 되돌아봄으로서 우리가 받은 복을 세워보는 것은 어떨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해 보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신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의에 대한 굶주림과 갈증을 더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갈증과 굶주림을 느낄 수 있는 것 역시 축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그들이 성신으로 충만함을 입을 것임이요.”라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신으로 인해 충만함을 입는다는 말은 우리가 주님의 모든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되겠지만 갈라디아서 5:22,23절에 나오는 것처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하여 영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모든 열매들이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런 영의 열매를 맛본 이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맛보고 ”나의 영혼을 심히 큰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었다“고 고백한 리하이의 심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기쁠 것이고 부름을 수행하는 것이 고역이 아니라 행복한 일임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구대륙과 미대륙 백성들에게 행복한 자의 상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상이 주는 기쁨은 일시적인데 반하여 주님께서 약속하신 기쁨은 영구적이며 우리 주변 환경에 의해 쉽게 좌우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후기성도 모두가 주님께서 주시는 이 행복한 상태에 대해 묵상하고 생활에 적용함으로 가장 행복한 분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 모두가 영속적인 행복을 누리고 즐기는 상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