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이 여러 계명을 받은 자들이 이 교회의 기초를 놓으며, 온 지면 위에서 유일한 참되고 살아 있는 교회를 희미한 데서 그리고 캄캄한 데서 이끌어 나아오게 할 권능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나 주는 이 교회를 매우 기쁘게 여기노라.” (교성 1:30)
현대 계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는 이 지상 위에 <유일하고 참되며 살아 있는 교회>라고 불리우고 있으며 실제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적인 흐름 중에 ‘관용의 정신’이라든지 ‘종교 다원주의’가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에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표현 자체가 편협하거나 교만하며 독선적이고 오만한 주장이라고 비춰지기 쉽습니다. 실제 교회 회원 중에서도 ‘유일한 참된 교회’라는 표현에 대해 불편하게 여기고 시대 착오적인 것이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믿음이 시대착오적이고 불필요한 것이라면 굳이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시설도 잘되어 있고 사람도 많고, 까탈스럽게 요구하는 것도 별로 없고, 세상 사람들이게 이상한 시선을 받을 필요도 없는 교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말이지요.)
실제 관용의 사전적인 의미는 ‘너그럽게 용서하거나 받아들인다’는 것이지만 왠지 이 시대에는 모든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다 나름대로의 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거나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만이 이 지상의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고백들이 편협함이라는 악덕으로 취급받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가 요구하는 관용의 정신, 즉 모든 것을 다 좋은 것으로 수용해야 하며 자기 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 논리적으로 정당화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후기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만이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고 말을 했을 때 “자기 교회만 유일하고 참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한 주장이며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자기네 교회만이 옳다고 하기 때문에 후기성도가 편협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오만하고 배타적이고 편협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관용적인가요? 아니면 모든 것을 수용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엄밀하게 말해서는 배타적이라고 봐야 합니다. 후기성도의 고백을 편협하고 오만하다고 규정함으로서 본인의 주장 역시 관용적이지 않고 배타적이고 또 다른 의미의 편협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엄밀한 의미에서 관용적으로 반응을 하려면 유일하고 참된 교회 운운하는 발언조차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누구든 자신의 것만이 진리라고 믿으면 자동적으로 오만하거나 비관용적이 된다’는 주장을 해버리면 이 역시 배타적이 되며 표현만 달리했을 뿐 자기 주장만이 옳다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또한 그런 의미의 관용의 정의를 들먹이면 자기 관점이 옳다고 믿고 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오만하고 관용적이지 않다고 규정해애 합니다. 또한 모든 종교는 자동적으로 오만한 것이 되어 버리겠지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행합니다. 그런 이들을 전부 오만하고 편협한 악덕으로 행하는 이라고 봐야 할까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다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각 종교의 주장들을 보면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불일치가 있거나 핵심 교리에 있어 상호 모순점이 드러납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교리들이 있어서 아무리 인위적으로 조화를 시키고 일치를 시키려 해도 일치될 수 없는 근본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각 종교들의 주장들을 모두 동일한 진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만일 모든 종교가 서로 모순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논리적인 선택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모두 틀리거나 아니면 오직 한가지의 진짜 종교가 있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교회를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고 믿고 가르친다면 비관용적인 것인가라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학자 모어랜드(.P. Moreland) 교수에 따르면 전통적인 의미의 관용이란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내 생각에 상대방의 의견이 매우 잘못되었고, 내가 그것에 열렬하게 반대해서 논쟁할 지라도, 나는 상대방이 자신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 주겠다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비록 내가 상대방의 견해에 반대를 해도 상대의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것이 전통적 의미의 관용의 정신인 것입니다.
1843년 조셉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몰몬교’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각오를 한 것처럼 보여졌다면, 저는 그와 똑같이 장로교, 침례교 또는 다른 많은 교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늘 앞에 담대히 맹세를 합니다. 왜냐하면 후기 성도들의 권리를 유린하는 같은 원리가 소수이거나 그들 스스로 방어하기에 너무 약한 로마 카톨릭 또는 다른 교파들의 권리도 유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영혼에 영감을 주는 것은 자유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자유는 모든 인류에게 시민권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인 자유가 보장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신앙개조 11조에서는 비슷한 구절이 있습니다.
신앙개조 11.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양심의 지시에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할 특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또 모든 사람에게 그들이 어떻게, 어디에서, 혹은 무엇이라도 예배할 수 있는 똑같은 특권을 허용한다.
이것이 조셉 스미스가 말한 관용의 정신이 아닐까요? 첫 번째 시현에서 주님께서는 조셉에게 “그들의 모든 신조는 그가 보시기에 가증하며 그 신자들은 모두 부패하였다고 말씀하시고 ‘그들이 입술로는 나를 가까이 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으며, 그들은 사람의 계명을 교리로 가르치고,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은 부인하는도다‘ 라고 하셨.”지만 (조역 1:19) 그들의 권리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을 각오까지 했던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관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면서도 상대방의 권리를 보장하고 존중하는 것, 그리고 비록 우리와 믿음이 같지는 않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무엇이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혹 듣기 좋거나 혹 칭찬할 만한 일이 있으면 우리는 이것들을 구하여 마지 않는”(신앙개조 13조)것, 이것이 참된 진리를 소유한 자들의 올바른 태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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