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바이블의 "바울은 예수를 몰랐다"부분에 대한 반박
바울은 예수를 몰랐다는 글을 보면서...처음에 무슨 이런 글이 있었나 싶었다. 별다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체 몇몇 학자들, 대표적인 볼트만의 글이나 추측하는 식의 __일 가능성이 많다는 식으로 기술을 해놓았으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당시의 사도들은 예수를 보지 못한 영지주의적 메시야를 기대한 이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니 실제적인 증거가 없다.
사도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그의 복음을 세상에 널리 전하는 임명을 받은
자들이다. 그 사도의 구성은 12명으로 이루어져 있고 유다가 자살을 함에 따라 그 공석을 맛디
아로 임명하게 된 것은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물론 그 후대에 한 사도가 죽을 때
누가 다시금 그 공석을 차지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지만 바울이나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경우는 그 후대에 공석을 채우기 위해 임명된 사도일 것이란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이런 방
식의 사도 임명은 사도들이 흩어져 그 조직을 구성하지 못할 때까지 이어졌다.)게다가 사도행
전 9장을 읽어보면 예수 신화파에서는 바울이 먼저 전하고 그 후에 예수가 조작되었을 가능성
이 있다고 하는데...자세히 살펴보길 바란다. 바울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다. 또한
바울이 박해했던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신봉했던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예수께서는 바울에게 "네가 왜 날 박해하느냐"고 물으심으로서 그를 질책하셨던 것이
다. (마태 25:40 참조) 그런데 어찌 이 구절로 "복음서속의 예수는, 영지주의적인 사도들이 메
시아를 전파하고 난 후에 등장한 가상의 인물임을 추측해 볼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논
지를 펼치기 위한 증거가 너무 빈약하다.
또한 그 글에서 말하기를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의 환상을 접한후 예루살렘에 가서 바나바의 소개로 제자들을
만난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개종후에 삼년동안 예루살렘에 방문한적이 없으며 베
드로와 야고보외에는 만난 제자가 없다고 한다." 고 하면서 바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혔다.
그러나 인용된 갈라디아서 1장 17~20절을 보면 알겠지만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
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고 말함
으로서 그가 본 "사도"는 야고보와 베드로 밖에 없었다는 것이지 다른 제자들을 만나지 못했
다는 말이다. 잘 알겠지만 사도란 제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임무를 위하여 선택된 자들이지 제
자들이라고 하여 전부가 사도는 아니다. 안티들의 비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단어의
몰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
다." [고린도 전서 15장 20절]는 구절을 인용함으로서 복음서의 예수가 무덤속의 나자로를
부활 시켰으며, 그가 십자가형에 처했을때 무덤들이 열리며 한 떼의 성자들이 살아 나왔다고
기록 되어있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라고 반문을 했다.
그러나 이 역시 부활의 의미조차 모르기 때문에 하는 비판들이다. 성서에서 우리에게 구체적
으로 제시하는 부활의 희망은 한 번 죽다 살아나서 다시금 죽게 되는 부활이 아니다. 나사로
나 과부의 아들을 살린 경우에 행하신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망을 이길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한 일시적인 기적이였지 사망의 사슬을 영원히 끊게 되는 부활은 예수의 부활이
후에 부분적으로 일어나다가 재림 후에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살전 4:16-18)
그리고 본 글에서 예수가 십자가 형에 처했을 때 무덤이 열렸다고 하는데 성경을 자세히 보길
바란다.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마태 27:53)
십자가 형에 처했을 때 무덤이 열린 것이 아니라 예수의 부활 후에 무덤이 열린 것이다.
또한 바울이 장자의 권세를 팔아버린 에서를 인용한 구절을 들이내면서 변절자를 지적하고자 한
다면 가롯 유다가 적격이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는데....잘 살펴보길 바란다. 에서가 변절자인가?
에서는 자기에게 주어진 축복을 무가치하게 여긴 자를 대표하는 것이지 변절자를 말하는 것이 아
니였다. 에서가 무슨 변절을 했다는 것인가? 바울이 경고한 것은 변절자를 조심하라가 아니라
진정한 가치를 하찮은 것들과 바꾸어 버리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이다. 오히려 이 구절을 통해
서 바울 역시 구약 성경을 존중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글에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공동번역판]을 인용하면서 바울이
왜 주기도문을 몰랐냐는 질문을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 우스운 반박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는 말이 기도의 유형, 방식을 모른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로마서에서는 "성령이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신다"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어떻게 기
도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말은 주기도문을 알고, 기도의 방식을 아는 자들이라도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있고 정말 말로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들도 많은데 그
것을 어떻게 기도로 하나님께 아뢸까 고민하는 것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고민이
다. 나의 경우도 정말 간구할 것이 있고 고민도 많아 기도를 할 때가 있는데, 정말 어떻게
말을 하고 탄원을 해야할지 몰라 속으로만 끙끙거릴 때가 있다. 바로 그 고민과 신음소리에
도 응답하시고 기도를 받아주시는 분인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놀랍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데 내가 과연 기도의 방법을 몰라 그렇게 끙끙거렸던 것일까?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해 본적
이 없는 사람들이 저런식으로 비판을 하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모든 권세에 순종하라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는 말도 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중세기의 왕권신수설의 근거가 된 것일까? 사도행전을 보면 알겠지만 바울
역시 복음을 전파하면서 통치계급의 반대를 많이 받아왔다. 그렇다고 하면 과연 모든 권위
에 순종하라는 바울이 그 통치계급에 지시에 따라 복음 전하기를 그만 두었다는 말인가? 그
러지 않음은 성경을 보면 알게 된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인들의 충성 문제와 관련하여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사람들보다 통치자로서 하느님께 순종해야 합니다."(사도 5:29)
하나님의 법과 세상적인 법이 대치를 하였을 경우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자연스럽게 바울의 발언은 국가에 대하여 상대적인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
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사자라는 말을 하였을까. 로마서 8장을 보면 알겠지만 악인에게 보
응을 하는 수단으로서는 하나님의 사자의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바로 국
가에서 제정된 "법"이란 수단으로 인하여 악인들을 처벌하고 선인들을 포상하는 식의 통치
를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포악한 나라라고 하여도 악인을 처벌하여 범죄를 근절하는 식의
법률은 제정되어 국민들을 보호한다. 국가라는 단체가 없고, 법이 없고, 그것을 집행할 단
체가 없다고 한다면 무법천지로 인하여 사실상 인간이 살아갈 여지가 없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를 지칭하여 하나님의 사자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예수께서도 가이사랴의
것은 가이사랴에게 돌려주어라 지시하고 있다. 가이사랴, 다시 말해 국가 체제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것을 돌려주고, 지지할 것은 지지하라는 말이다. 그렇기
에 한 나라와 그 제도가 불법적이고, 인간을 파멸시키고, 복음을 반대하는 것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지지해야할 것들이 요구되는 것이다. 노예제도 역시 당시 사회의 제도였다.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한 것은 노예제도를 찬성한 것이 아니다. 맡겨진 책무속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것
이다. 골로새 3:10,11절에서는 노예라는 신분이 다른 계층과 구분이 있을 수 없고, 모두 그
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다는 말을 하였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노예였다 하더라도 조금도 마음 쓸 것 없습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몸이 될 기회가 생기면 그 기회를 이용하십시오." (고전 7:21)
복음을 들었을 때 노예라는 신분이라도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노예라는 신분
은 사회적 구속력에 의한 지배는 받을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선 의미가 없음을 말한다.) 게다가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이용하여 자유의 몸이 되라는 말도 하였다. 이것이 노예제를 찬성
한 사람의 말이라고 보는가? 그저 사회체제가 돌아가기 위해선(당시의 사회와 경제는 노예를
중심으로 한 노동력 공급으로 이루어졌다) 맡겨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지 그렇다고
하여 노예제도를 찬성하거나 지지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여성을 비하했다는 문제도...약간 논란의 여지가 많을 듯 싶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
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7,28)
인종, 신분, 성별로 인하여 차별되는 것은 바울의 가르침도 아니였다. 그들이 누구이건간에 그리스
도 안에서 하나인 존재이며 값진 존재들이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고전 11:11)
게다가 남자 홀로 존재할 수 없고 여자 홀로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등한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일 뿐이다.
교회에서 여자가 "말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교회에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 아니라 성직의 의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단순히 남녀 차별 문제가
아닐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였다. 바울이 이와 같은 말을 하게 되면서 하나님은 무질서
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에서 주어지는 직분에 질서를 세우기 위하여 여
성은 조용히 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왜 그러한 질서를 세워야만 했던 것일까...그 문제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설명을 한 학자의 주장을 통해 살펴보자.
파게트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에페소 공동체에는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는(1디모 1,3~4 참조) 무리가 있었는데,
이 거짓 교사들은 영지주의 경향을 가진 그릇된 이설들로 신앙심이 약한 여성그룹을
지도하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엇이든 배우기를 좋아하던 그 여인들은 이들의 교설에 넘어갔다,
특히 젊은 과부들이 이런 유혹에 빠져서(1디모 5,6~12 참조), 이상한 것을 받아들이고,
결혼을 반대하고, 자기 친척이나 가족을 돌보지도 않았다.
또 수다를 떨며, 남의 일에 참견하고, 해서는 안 될 말로 공동체의 평화를 깨뜨리고,
시기와 다툼, 비방, 못된 의심, 분쟁을 일으켰다. 즉 바울로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모든 여인이 아닌, 에페소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한 무리의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의 의한 계시나, 사도들의 의한 당시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 중에서 절대성을 취하는 것
도 있지만 시대적 상황에 적합한 교훈들도 있다. 그 시대적 맥락 하에서 이해하지 않고 성경을
보는 것 역시 성서 해석의 전형적인 오류 방식이라고 불리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재림에 대하여 이야기 한 적이 없다고 하는데...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반박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바울은 히브리서를 통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실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이것
이 초림의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보는가? 그 외에도 여러 성구를 통해서 바울은 예수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고전 15:2, 살후 2:1 참조)
원어적으로 분석을 하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는데...아마도 재림으로 번역된 단어인 에피파
네이아나 파루시아를 근거로 말하는 듯 싶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경우 그
단어들에 대하여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고는 있지만 문맥을 통하여 살펴보면 그 단어
는 모두 동의어로 사용되었음을 볼 수가 있다. 한 단어도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전
체적인 문맥하에서 생각하고 추론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것은 전부 무시한 체 이해한다는 것은
모순에 빠질 우려가 크다.
도무지...바울이 재림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말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바울이 예수를 사람의 아들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당시의 예수를 영지주의적인 관점에
서 본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바울은 예수를 영적인 존재로만 이해하였나?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로마서 1:3)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로마9:5)
분명히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예수가 다윗의 혈통에서 난 "인간"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그저
인간의 아들(인자)라는 표현이 없다고 하여 그를 영지주의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 아
닐 수 없다.
바울 서신에는 기적에 대한 언급이 없는가??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히브리2:4)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고 여러분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신 것
이 여러분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까?" (갈 3:5, 공동번역)
"나는 그분에게서 기적과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힘 곧 성령의 힘을 받아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말과 활동으로 그리스
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로마15:19, 공동)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백방으로 참고 견디면서 표징과 놀라운 일
과 기적을 행하여 내가 진정 사도라는 증거를 보여 주었읍니다."(고후12:12, 공동)
이 뿐이 아니라 많은 성구에서 기적과 기사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슨 근
거로 바울 서신엔 기적이 없다고 말하는가??
또한 그 비판글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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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덧붙여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이 과연 성경에 능통했는지도 의문이 든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로마서 9장 17절]
출애굽때 여호와가 파라오에게 내린 재앙중에 위의 바울의 말과 어울리는 대목이 과연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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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설명은 참조 성구만 찾아봐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
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9:16) 바울도 출애굽기의 내용을 인정하고 있었다.
또한 사도행전의 두 구절(9장 7절, 22장 9절)이 서로 모순이라고 말을 한다. 과연 그런가?
"사울이 떨며 심히 놀라 이르되, 주여,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시나이까? 하매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 그러면 네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듣게 되리라,
하시니 같이 여행하던 사람들은 음성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행9:6,7)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니 그분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참으로 그 빛을 보고
두려워하나 내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하더라."(행22:8,9)
이런 구절들을 보고는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도행전 9장에서는 여행하던 사람들이 음성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22장에서는
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성경이 틀린 것 아니냐는 말이다.
답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들은 음성을 들었으나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분 즉
예수님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 음성은 들었을 진 모르나 바울에게만 하셨던 말씀은 듣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오류인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는 말이 없음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니 설명은 하지 않겠다...
1. 바울의 개종에 대한 기록의 모순..
래용은 안티들의 주장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모순"이라고 단정을 지어 버렸다. 난 래용에게
안티들의 주장만을 듣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지 말고 다양한 자료들을 찾아서 연구해보기
를 권유하고 싶다. 솔직히 이 문제는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찾아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사도행전 9:7절을 흠정역 성경으로 보자.
"And the men which journeyed with him stood speechless, hearing a voice,
but seeing no man."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22장 9절을 보자.
"And they that were with me saw indeed the light, and were afraid; but
they heard not the voice of him that spake to me."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개역 한글판)
영어로 읽어보라. 그 의미가 분명해지는가? 9:7절에서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말은
seeing no man으로서 어떤 사람도 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22장 9절에서는 빛을
보았다는 말을 했다. 래용은 "빛=사람"이라는 구도로 이해해서 이 구절들을 모순이라
고 하는 것인지...다시금 종합해서 이해를 하자면 바울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도 볼 순 없었지만 빛을 보았다. 그리고 무슨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바울에게 말씀
하시는 것은 듣지 못했단 말이다. 제발 안티들의 말이라고 전부 받아들이진 말길 바
란다....
2.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과 관련하여...
난 어찌 이것조차 모순으로 받아들이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겠다. 이는 정말 말장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전혀 관계가 없는 두 가지를 연결해서 해석, 비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 년 후에 나는 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
름 동안을 지냈습니다." (갈1:18)
"그 뒤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 신도들의 모임에 끼어 보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개종한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모두 무서워하였다."(사도9:26)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베드로를 만나기 위함이였으며 사도 행
전에서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신도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분명히 그 목적
자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시기적으로도 차이가 있음이 분명하거늘 왜 이런 것조차
모순이니 어쩌니 하며 비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에 나온 것은
개종 직후의 일이나 갈라디아서에 나온 경우는 개종 직후라는 증거가 없다. 바울이
간증을 하면서 개종 이야기와 선교와 관한 다른 이야기를 함께 했기 때문이다.
3. 파루시아와 재림
파루시아란 말은 말 그대로하자면 '파루'(곁에) '시아'(있음), 곁에 있음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한 단어는 문맥과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 단어의 원 뜻을 가지고 모든 문맥을 무시한 해석을 내려서는 안된다.
또한 재림으로 번역된 단어 중에는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도 있는데 이는 "나타남"이란
원뜻을 가지고 있고 에피파네이아의 경우 원뜻은 "출현"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는 파루시아라는 단어를 임재라고 번역하여 그리스도가 1914년에 보이지 않게
임재해 있고 아포칼립시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심판이 개입되는 사건을 지적하는데 사용
하기도 한다. 그러나 래용이가 지적한 경우는 이 모든 단어를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해석
하여 모든 것을 "초림"이라고 이해하려는 것 같은데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라
고 말할 수 있다.
고린도 전서 1:7절에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심을 기다림이라"고 하면서 소
망을 표현하였는데 이미 인간으로 오셨던 주님을 두고 다시금 초림을 기대한다는 것은 말
이 안된다. 그런데 그 "나타내심"이라는 단어의 원어는 '아포칼립시스'이다. 그런데 그 아
포칼립시스라는 단어는 파루시아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다.
마태 24: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파루시아)도 그러하리라." 이와 동일한 의미로
누가 27:26,30 "노아의 때에 된 것 같이...인자의 나타나는 일(아포칼립시스)에도 그러하리라."
다시 말해서 파루시아와 아포칼립스시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후서 2:8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 때에 불법한 자들이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파루시아)
하여 나타내심(에피파네이아)으로 폐하시리라."
파루시아나 에피파네이아가 초림이라고 볼 증거가 있는가? 오히려 그 날은 예수께서 입의 기운
으로 불법한 자들을 없앨 날들인 것이다. 게다가 디도서 2:13절에서 "복스러운 소망인 그리스도
의 나타내심(에피파네이아)"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 역시 같은 의미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파루시아,아포칼립시스,에피파네이아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동의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히9:28)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단 번에 드리신 바 된 후에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내신다
고 말한다. 두 번째로 나타나는 것조차 초림이라고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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