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고 오로지 비판과 반대를 위한 목적을 가진 분들의 공통점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시 하에 일시적으로 진행된 특별한 경우를 과대 해석하고 부풀려서 본질을 흐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예를 들어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거부하는, 자칭 반기독교 단체들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전쟁 기사나 신약 성경에 나오는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문제꺼리로 만들어서 부풀립니다. 특히 구약에 나오는 전쟁 기사를 근거로 하여 여호와를 잔인 무도한 신으로서, 질투와 분노로 가득한 이스라엘 부족 신으로 격하합니다. 그렇기에 그러한 부족신을 믿으면서 불신 지옥을 외치는 개신교회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현대적인 입장으로 보면 그러한 비판은 정당합니다. 사실 저 역시 과거 구약을 읽었을 때 솔직한 심정으로 구역질을 하고 싶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하나님은 명하셨는데 그러한 것들이 구약 성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을 버리고 신약 시대에 나오는 따뜻하고 사랑 많으신 하나님만을 믿고자 했던 적도 있었지요.
그런데 신약은 어떻습니까? 구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을 보면 재산의 일부를 바치지 않았다 하여 두 부부를 즉살시키지 않나(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5장) 이방인을 비하하는 듯 한 발언이 나오기도 하죠. (마태
자 지금까지 제가 인용했던 부분은 성경에서도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현대의 잣대를 근거로 하여판단을 해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 이러한 부분들이 성경의 기본 흐름과 그 속에 담긴 구세주의 성역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라 봐야 할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록된 역사적, 지역적 상황과 인간의 뜻과는 다른 하나님의 뜻을 인정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성경에 담긴 영생의 메시지를 놓치기 쉽습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8,9)
솔직히 이 구절. 인정하기 싫은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는다 하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순종해야 한다니…이거 참 곤란한 부분 아니던가요? 물론 엉터리 같은 내용을 만들어 놓고는 “이것에 순종해라. 하나님의 뜻이 너희들보다 높다.”는 식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악용하는 사례가 있다 하여 위 구절에 담긴 하나님의 진리 자체를 부정할 근거는 될 수 없겠지요.
성경을 피상적으로 읽어 보면, 그 핵심 내용(복음의 원리)이 아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무대나 배우, 사건들에만 집중하게 되며 결국은 실망하고 심지어 하나님과 성경을 부인하게 이르릅니다. 우리의 이해와 맞지 않는 것들은 하나님을 아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이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 한 중앙에 이름 모를 돌이 박혀 있는 것입니다. 생각 있는 사람이라면 그 돌에 대해 그리 신경쓰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지나쳐 우리가 나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돌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 나머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왜 이 길에 놓여 있는지, 돌의 종류는 어떠한 것인지를 지나치게 파고들어 결국에는 우리의 목표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만 그 자리에 눌러 앉고 맙니다.
우리 중 상당수 사람들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행동을 취합니다. 진리의 길은 분명하지만 그 중간 중간에 돌과 같이 중요하지 않으면서도 때에 따라 큰 장애물의 역할을 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의 원리라는 분명한 길이 제시되어 있음에도 그리 중요하지도 않은, 복음의 핵심과 관계가 없는 여러 가지에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고 의문을 품어 결국 주님의 뜻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그만 주저 앉게 되는 불행한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구약 시대에 나오는 전쟁기사가 있죠. 그 속에 담긴 원리는 의를 사랑하시고 죄를 미워하시는 주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집중하여,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이들을 죽이라고 하셨는가…에만 골몰하다가는 진정한 의미의 사랑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령 우리의 기본 상식과 일치되지 않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것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을 무턱대고 부정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그분을 의지하게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후기성도와 관련하여 일부다처라는 부분은 이러한 거치는 돌의 역할을 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성경에서 나온 바와 같이) 하나님이 과거에 일시적으로 허락된 것일 뿐, 우리는 그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1800년대의 교회 지도자들이 “순종”이라는 원리에 초점을 맞추어 일부다처를 행하기는 하였으나 그 자체는 복음의 핵심이나 원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비판하기에 눈이 혈안되어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일부다처 문제만을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여 그것을 후기성도의 핵심 교리로 오해, 곡해하거나 후기성도가 거짓 종교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로서 채택하여 즐겨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회복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구원의 계획이 무엇인지와 같이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 자체를 보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기독교, 혹은 반몰몬과 대화를 나누어 보면 복음의 기본 원리에 대해 논하기를 원치 않으며 오로지 몇가지 이해 못할 문제들에만 초점을 맞추어 비판하려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부다처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하여 옹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옹호는 현대에도 일부다처를 해야만 한다, 혹은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개념이 아니라 과거에 분명 하나님은 일부다처를 승인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로 인정하지 않는 부분이었고, 또한 그것을 승인하셨다면, 현대 우리의 기존 생각과 아무리 다르고 우리의 정서와 맞지 않는다 하여 그것을 부인할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었죠.
사실 저의 생각과 정서, 그리고 성경 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개념을 보면 일부일처제가 맞습니다. 다만 그 예외로 둔 상황이 등장하기 때문에 인정하고 있을 뿐이지요. 사실 저도 그 개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왜 그래야만 했는지 구체적인 이유라도 알려주셨다면 좋았을 것을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저에게도 일부다처는 길거리를 막는 걸림돌이 되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걸림돌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주님의 길을 향한 제 발걸음을 막지도 않습니다. 설령, 만에 하나 조셉 스미스를 위시한 초기 지도자들이 행한 일부다처가 주님의 길이 아니었다 하여도 저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며 몰몬경이 참되다는 기본 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후대에 이방여인들을 만나 주님을 부인하였다 하여도 그가 영감 받아 기록한 잠언 및 전도서가 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비록 조셉이 잘못했다고 하여도 주님은 그를 통해 몰몬경을 번역케 하셨으며 여러 계시들도 우리에게 주셨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길거리에 놓인 돌덩이에 매달려 영생을 향한 그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분들에게 권고합니다. 눈 앞에 놓인 것들에 연연하지 말고 저 멀리 보이는 하나님의 도성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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