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와 교리/성전과 프리 메이슨

죽은 자들을 위한 대리침례 의식

모로나이 2008. 11. 3. 11:02

 

    솔트레이크 성전의 침례탕, 후기성도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침례도 받지 못하고 죽은 분들을 대신하여 침례를 행한다.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침례는 신약시대에 행해졌던 비기독교적 관습인가 아니면 초기 예수 그리스도 교회에서 실제로 행해진 것인가??

 

죽은 자를 위한 대리 침례 의식은 과거 예수 그리스도교회에서 실제로 실시되었다. 그 의식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집행되었으며 우리 시대에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이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기원후 56년에서 57년 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헌은 종교 문학의 걸작인 동시에 구세주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놀라운 간증이기도 하다.


특히 고린도전서 15장의 경우는 사도 바울의 서신 중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하여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특히 복음의 핵심,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으며 제 3일에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부분이다. 이 가르침을 조셉 스미스는 “우리 종교의 핵심 원리”라고 설명하였으며 그 외 다른 교리들은 이에 부속된 것이라 하였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일어날 필요성에 대해 언급을 하며 그리스도의 아들 되심에 대한 증거를 그분의 부활이라고 설명하였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일어나시지 않았다하면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도들의 신앙은 헛된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 15:19)

 

주님께서 죽음을 비롯하여 모든 적들을 멸하신 이후에 있을 상황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침례를 받느냐” (고전 15:28,29)

 

29절의 내용은 많은 학파의 신학자들에 의해 참으로 다양한 해석들을 낳게 하였다. 많은 이들은 이 구절의 본 의미를 가장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것으로 여겼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 구절은 사도 바울이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하여 고린도 교회에서 실시한 관습을 언급한 것으로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럼 개신교회의 성경 주석에서는 이 구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1)어떤 주석가들은 말하기를, 이것이, 산 사람으로서 별세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침례를 받음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리적 침례는 이단에 속하는 것이니, 바울이 그것을 인정하는 듯이 여기 관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2) 이것은, 거의 죽어가는 자가 그의 불신(不信) 가족이나 친척이나 친구더러 예수를 믿고 침례 받으라고 한 부탁대로, 그 부탁받은 자들이 순종하여 침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3)이것은, 죽은 자들 위해서(=무덤 위에서) 침례 받음을 의미한다고 한다. "위하여"란 말이, 이 해석에 있어선, "위에서"라고 생각되었다. (4)그리고 또 한가지 해석은, 이러하니, , 여기 "죽은 자들을 위하여"란 말씀이 "죽은 자들(침례받는 자신도 포함시킴)의 부활할 것을 염두에 두고"란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은 "부활할 것"이란 말을 보충하는 것이나 자연스럽지 않다.

이 밖에도 학자들이 거의 30내지 40여개의 다른 해석을 이 말씀에 붙인다고 한다. 어쨌든, 침례 받는 자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받는다는 것이 바울의 염두에 있은 것은 사실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사람들이 세례받을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활 소망을 가지고 침례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이 주석들에 의하면 그 어떤 해석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며 다만 여러 학자들의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별세한 사람을 위하여 대신 침례 받는 것이 이단에 속한 것이다’라고 표현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그것을 인정하는 듯이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성 발언도 포함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설명도 하지 못하면서 성경에 나온, 그것도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임을 믿는 신앙으로 대신 침례를 행하는 관습을 이단 사설의 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쉽게 번역된 다른 성경은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죽은 자들을 위해 대리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세례를 받는 것입니까? 죽은 사람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이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쉬운 성경)

“그런데 죽은 이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까? 만일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습니까? (공동번역)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절대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표준 새번역)

 

복잡한 신학적인 논의나 기존 개념에 대한 편견을 무시하고 읽어 본다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침례를 받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 언급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의식의 집행은 바로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 어느 곳에서도 복음의 핵심 원리와 일치하지 않는 가르침을 전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윗 구절은 오해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분명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왜 개신교회의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을 단순히 이단 사설의 것으로 치부한 것일까???

 

바울이 죽은 자들을 위한 대리 침례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그것을 부활의 증거로 삼았다는 것으로 보아 명확하다. 분명하게도 부활이 없다면 대리 침례 의식들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가르침을 당시 이교적인 관습들, 즉 바빌로니아나 그노시스트의 관습과 연관짓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바울의 말을 들었을 사람들이 그 관습에 익숙해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사실로 인하여 더욱 명확해진다. 아니 성경에 대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서 사도들이 이교도의 의식을 부활의 증거로 삼았다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일까??

 

그럼에도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침례 의식을 행하는 자들을 “they"라고 표현했다 하여 이들은 당시 성도들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이교도들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Else what shall they do which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rise not at all? 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고전 15:28 킹제임스)

 

그러나 그리스어로 이 구절을 보면 대명사인 they는 사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구절은 수동의 분사인 "the being baptized [ones], 즉 정관사가 포함된 명사형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보통 분사는 성이나 수를 반영할 뿐 사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어 본문에서는 3인칭 복수형인 they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리 침례 의식을 집행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을 제외한 다른 이방신 숭배자들이라 말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오히려 죽은 자들을 위함 침례 의식이 초기 몇몇 기독교 공동체에서 실시되었다는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3-5세기에 걸쳐 열린 카르타고 공의회(Council of Carthage)에서 그리스도교 내에서 죽은 자들에게 세례(침례)를 주는 의식을 금지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교회에서는 침례 대신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나 미사를 드리는 의식으로 변경했다. 다만 콥트 교회를 비롯한 이라크, 이란 내의 교회는 죽은 자들을 위한 침례 의식을 계속 진행하였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침례는 그의 무덤을 넘어선 영광의 순간으로 여겨졌으며 물의 침례는 죽은 자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여겨졌다. (Odes of Solomon 6, 24). 죽은 자들의 영혼과 그들의 부활된 몸체를 위한 침례는 예수께서 영의 세계로 내려가신 이야기와 함께 종종 언급되는 주제였다.  5세기 사도들의 문헌 27 (The fifth-century Epistle of the Apostles 27)에 의하면 부활하신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그가 물로 죽은 자들을 침례한 일에 대하여 이야기한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5세기 문헌인 빌라도의 행적 (the Acts of Pilate)에 의하면 지옥으로 내려가심이란 참고 자료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지옥으로 내려가실 때 의로운 자들의 영혼을 구속하는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 위경인 바돌로매 복음서에도 사도 도마의 아들인 시오파네스가 죽었을 때 천사장 미가엘이 그의 영혼을 옮겨서 호수에서 3번 씻는 장면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이 외에도 많은 증거들은 이 죽은 자들에 대한 구원의 교리가 고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널리 알려지고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회의 변증론자였던 순교자 마르틴의 경우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무덤에 누워있는 죽은 이스라엘 민족들을 기억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내려가셨다” (The Ante-Nicene Fathers, 10 vols.)고 기록하였다. 이레니우스의 경우도 “주께서 땅 아래 있는 지역(죽은 자들의 세계)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이 있을 것임을 전하셨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4.27.1, cited in J. B. Lightfoot, The Apostolic Fathers (Grand Rapids, Mich.: Baker Book House, 1962), pp. 27778.) 그리고 현재 모든 가톨릭과 개신교회에서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에서도 “he descended into hell" (주님이 지옥으로 내려가셨다)는 표현이 남아 있어 고대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그 부분만이 삭제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베드로전서 3:19(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에 있는 말씀의 흔적으로서 성경의 원리임과 동시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도 가르쳐지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몇몇 사람들의 주장처럼 죽은 자들을 위한 대리 의식은 당시 이교단체들의 관습이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진행되어 왔으며 카르타고 공의회의 결정으로 폐지된 이후에도 몇몇 단체에서는 그 의식을 지속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바울이 가르친 원리가 몇몇 공의회를 통해 폐지되었다는 것은 성경에 예언된 배교의 성취된 과정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과거 죽은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남녀들이 복음을 듣고 이를 선택할 기회를 받게 되리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과 관련하여 보면 마땅한 일이다.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 태어나 복음을 들을 기회도 전혀 없이 살다 죽는다 하여 영원한 불구덩이에 떨어져 고통 받는다는 것이 과연 가당치나 한 일인가?? 그것은 사랑과 공의의 속성을 지닌 하나님을 잔인하고 불공정한 하나님으로 멸시하는 가르침일 뿐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이 살다가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고 있으며, 우리가 그들을 위하여 침례 의식을 대행하는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명확한 주님의 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르친 이 아름다운 복음의 원리를 부정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트집거리들을 만들어서 부정부터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특히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진다면 현재에는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 일평생을 그냥 하고 싶은대로 살다가 영의 세계에서 복음을 들으면 되지 않느냐는 둥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것이 대리 의식의 부당함을 옹호하는 것으로 들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이 대리 의식의 원칙은 분명하다.

 

바로 이 대리 의식들은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들을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적용되지 아니하며 시대나 장소, 여건과 관련하여 복음을 듣고 선택 혹은 거부할 기회를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 그리고 그분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고 경이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