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역사를 이해하는 틀

모로나이 2011. 9. 6. 01:24

 

 

 

 

 

 

 

언젠가도 밝힌 것처럼 역사란 그것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당연시 되던 역사적 사실이 후대에 시대가 변하고 주류 사상이 변함에 따라 점차로 그 이해의 틀도 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해방 이후에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부국강병론에 근거하여 근대 우월적인 사관이 학계 내에서 주류를 차지하였는데 저항적 민주주의나 일제식 국가주의가 우리 인식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겁니다. 당시 그러한 사관이 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오랜 시간동안 일제의 점령을 받아왔고 그 이후에도 외세의 의해 점령을 당해왔기에 주체적이고 우월적인 사관을 통해 민족적 자부심을 키우고 국가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그런던 것이 최근에는 이러한 흐름에서 탈피하여, 이러한 사관에 의해 무시되어 왔던 소수자와 개인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탈민족적, 탈국가적, 탈근대적인 역사 해석이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어느 부분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동일한 역사에 대한 해석이 상반되게 나올 수 있음은 역사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역사는 각 시대가 처한 상황이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들의 인식틀에 근거하여, 때로는 필요에 따라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가 있다. 요즘에는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자신들의 역사관을 근거로 하여 상대방의 사관을 향해 비판의 소리를 높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으나 실제적으로 역사에 대한 해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에 사실 모든 이들은 그들에게 맞는 역사 해석을 선택할 자유가 있고 자신만의 진실을 역사 해석을 통해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박노자 교수의 말처럼 역사학자들은 시민들에게 역사를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을 소개하는 소개자, 내래이터이자 과거 일의 많은 해석자 중의 한 명일 따름이다.

 

교회 역사를 이해하는 틀도 그러합니다. 어떤 이들은 몇가지 역사적인 기록을 근거로 교회는 철저한 기만 위에 세워진 단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그에 대한 증거로 내세우는 것도 실제로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존 관념을 반영하는 역사 해석에 불과합니다. 누구나 경험했겠으나 동일한 사건을 두고 상반되는 해석이 나오는 것을 이상하다고만 볼 수 없는 것은 그 해석의 차이는 그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사고관의 다양성에서 기인하기 때문인 겁니다. 그렇기에 역사에 대한 특정한 해석을 실제 역사적 사실이 철저한 기만에 기초를 두었다고 단정 지을 근거 자료로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를 극렬하게 드러내는 세가지 사례들을 들어 보지요.

 

 

1.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시현의 다양성

 

지금 반몰몬 자료를 한국어로 열심히 옮기면서 열정적으로 활동하는 어떤 분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그분이 인정하신 것처럼) 바로 이 첫 번째 시현의 기록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부터입니다.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값진진주에 속해 있는 조셉스미스 역사를 통해 조셉 스미스가 참된 교회를 찾는 과정에서 기도를 하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본 놀라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문헌에 따르면 교회에서 인정하는 기록 외에 다른 세부점들이 담긴 첫번째 시현에 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한 역사적인 증거들은 교회가 철저한 기만 위에 세워져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나 그처럼 놀라운 일이라면 하나같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사고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셉 스미스의 이야기는 후대에 조작된 것이다라는 해석이 도출됩니다.

 

하지만...조셉 스미스의 선지성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이러한 다양한 기록들은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준 그 풍요로움에 놀라게 되며 그 사건의 진실성을 확인하게 됩니다. 또한 법정에서 증언자들의 증언이 너무나도 완벽하게 일치하면 오히려 그 증언들이 사전에 모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의심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모든 기록들이 일관적이지 않으면서도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기록한 기록에 대해 신뢰심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행적으로 기록한 복음서들이나 바울이 다마섹으로 가던 도중 경험했던 기록에도 차이가 있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시현의 다양성에 대해 오히려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란 말입니다.

 

 

 

 

2. 조셉 스미스의 대통령 출마

 

조셉 스미스를 기만자에 세상적 욕망으로 불타오르는 사람으로 믿는 사람들이나, 종교인이라면 정치적 활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조셉 스미스의 대통령 출마는 분명 그의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종교의 힘을 빌린 대사기극에 불과할 것이라고 해석할 줄 모릅니다.

 

하지만 조셉 스미스가 대통령 출마를 결심하기까지의 전후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단지 그의 출마는 그의 야망을 충족시키 위한 행위가 아니라 성도들이 당하는 고통과 환난을 언론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고자 했던 조셉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실제 조셉은 얼마 안 있어 자신이 죽을 것임을 알았기에 대통력직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조셉이 출마할 당시 대통령 후보로 올라간 다섯 명의 후보들이 주변 사람들에 의해 미주리 성도들이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조셉은 자신이 출마하여 성도들의 어려움을 분명히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칫 무모해 보이는 행동이긴 했지만 실제 이와 같은 행동은 교회의 어려움을 외부에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선교사업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조셉은 선거도 해보지도 못하고 1844년에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3. 몰몬경의 고고학적인 증거들

 

성경에도 고고학적 증거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몰몬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고고학적인 증거들이 많이 나와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성경과 비교했을 때 정말 초라한 증거들밖에 없는 몰몬경은 조셉 스미스가 만들어 낸 소설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성경의 고고학적 발견과 몰몬경의 고고학적 발견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성경과 몰몬경의 역사적 증거들을 비교하는 것이 사실상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성경의 고고학적 발견은 천년 이상 지속되어 왔지만 몰몬경에 대한 발견은 100년도 채 안되었다는 점. 그리고 성경이 기록된 이스라엘 지역의 특성과는 다르게 중세 유럽 세력들에 의해 대규모로 진행된 미대륙 문명의 파괴를 생각해 본다면 성경의 고고학적 증거를 근거로 몰몬경의 고고학적 증거를 판단하는 것이 사실상 공평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 인정하게 됩니다.

 

 

이처럼 동일한 사건이나 역사적인 자료들도 보는 사람들에 따라 정말 극렬하게 대비되는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의 역사적인 자료들을 근거로 교회는 조셉 스미스에 의해 만들어진 사이비 종교라고 단정짓는 것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객관적이니 논리적이니라는 말을 같다 붙여도 애초에 역사적 해석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기에 진리를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해석이 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가갈 수는 있어도 특정 해석만을 근거로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라고 단정짓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역사관을 드러낼 뿐입니다. 아무리 저명한 학자가 자신은 아무런 편견없이 객관적 자료만을 근거로 해석한 것이라 한들, 이는 박노자 교수가 말한 것처럼 시민들에게 역사를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을 소개하는 소개자, 내래이터이자 과거 일의 많은 해석자 중의 한 명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죠.

 

물론 제가 복음의 원리들을 연구하고 적용한 다음, 성신의 확증케 하는 증거를 받지 못했더라면 저 역시 조셉 스미스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비관적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조셉 스미스의 역사에 대한 간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도 불완전하고 몰몬경도 불완전하고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현대의 모든 선지자들도 부족하기에 각각의 모든 구절들과 말씀들이 전부 영감을 받았다거나 오류가 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자료들과 말씀 속에서 공통적으로 흘러나오는 깊은 복음의 원리들은 오염되지 않은 생수로서 제 영혼을 온전히 적시고 있습니다. 게다가 전에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 주변에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들과 그 신비들, 성신이 내 맘 속에 고요하게 속삭이는 음성들은 너무나도 일관되게도 경전의 가르침을 확증해 주며 우리의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고 그분의 아들 예수가 모든 인류의 구세주 되심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인할 수 없는 간증들이 제가 역사를 해석하는 한가지 로서 작용하고 있음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더욱 공정을 기하기 위해 비판자들이 해석하는 교회 역사 해석들을 전부 오류나 편견, 왜곡으로 부정하지도 않으려 합니다. 다만 그 증거들에 대한 해석 틀에서 그들이 아무리 객관적이니 논리니 떠든다 한들 실제로는 그들 역시 특정한 사고관에 근거하여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했으면 합니다. 제 역사관이 신앙이나 개인적 체험을 근거로 한 주관적이라 비판하실 분이 있으리라 보지만 그렇게 말하는 분들 역시 부디 자신의 의견만이 논리적이라고 자찬하지 말길 바랍니다. 제가 봤을 때도 그 틀 역시 지극히 개인적으로만 보입니다..

 

특정 주장이 논리적인지 합리적인지는 그것을 바라보는 제 3자의 판단에 맡겨두시기 바라며 스스로가 자신의 글을 논리적이라며 구차하고 애처롭게 중얼거리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