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문/댓글에 대해서...

zelkova님이 올리신 글에 대하여....

모로나이 2012. 6. 18. 01:44

zelkova님이 올리신 댓글에 대한 답변입니다.

 

1. 성경이 말하는 도덕이 과연 몇자나 되는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대해서....

    

괜히 타종파를 비판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이트나 뒤적거리지 마시고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도덕의 세 요소기본 덕목도덕과 정신 분석과 같은 부분들도 읽어 보셨으면 합니다. 제가 감히 요약할 수도 없고 따라할 수도 없이 탁월한 논증으로 님과 같은 분들의 의문에 명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특정하게 어떤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지만 태생적으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마치 이러한 도덕적 규범이나 인간 내부에 있는 양심에 대해 마치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낸 것처럼 쉽게 판단을 내려버리지만 신기하게도 그러한 필요성이 요구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의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모든 이들에게 있습니다. 역사상 존재해 온 모든 인간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도덕, 즉 일정한 행위에 대해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표현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런데 더 놀랍게도 그러한 경험들은 일정한 형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루이스는 고대 이집트인, 바빌로나이안, 인도인, 중국인, 그리스, 로마인의 도덕적 교훈을 비교해서 그것들이 서로 아주 비슷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도덕과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죠. 이처럼 시대와 문화에 따라 변하지 않은 도덕률이라는 것은 모든 인간들 내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법칙에 대하여 느끼는 정도나 한 문화 또는 개인이 그 법칙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절대적 선과 악이라는 기준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은연중에 자신들의 표현 속에서 이건 잘못되었다...”는 식으로 내뱉는 것을 보면 심각한 모순을 발견합니다. 잘못되었다고 단정지을 경우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을터인데, 도대체 그 판단 기준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로마 2:14,15)

 

이는 보라, 그리스도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져 선악을 분별하게 하였은즉,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판단하는 길을 보여 주노니, 무릇 선을 행하도록 권유하며, 권하여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권능과 은사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것이라, 그런즉 너희는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을 완전한 지식으로 알지니라” (모로나이서 7:16)

 

경전에서는 모든 인류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도덕률을 일러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하는 것이나 양심혹은 모든 이들에게 주어져 선악을 분별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정의합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간에 이 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 인간들에게 심어준 것으로서 모든 문화나 지역, 종교와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발견이 됩니다. 물론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들에 따라 표현이나 이해 방식에서 차이가 발생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게 존재합니다.

님은 성경을 보실 적에 그저 특정한 역사적 상황이나 모순되어 보이는 몇가지 사실들에 초점을 맞추는 바람에 성경에 가득 차 있는 영원한 도덕적 법률에 대해선 눈이 멀어버리신 것 같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 가치관도 변화하는 이 시기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명확한 가르침과 표준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 머물러 움직이지 말 것을 원합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에베소 4:14)고 표현합니다. 님은 과연 세상적으로 온갖 교훈이라는 바람에 흔들리고 싶으십니까? 그러한 가치관의 혼란 상태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싶으십니까? 부디...지극히 예외적인 것,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한 일시적인 것들이 마치 복음이나 경전의 전반적인 주제인 것인 양 오해하거나 왜곡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님은 지금까지 경전에 대해 전체적으로 비틀린 시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2. 조셉 스미스가 회복한 것은 일부다처를 비롯한 괴상한 결혼 관습이 전부였나??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을 보면, 죄송합니다만, 님은 지금껏 교회에서 시간을 헛되게 보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경전을 진지하게 연구해 보고 묵상해 본 시간이 없었던 것이구요. 조셉 스미스를 통해 회복된 놀라운 진리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신다는 것인지요. 그 많은 것 중에 3가지만 인용해 드릴테니 다시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그 속에 거하는 거민들을 그분의 아들과 딸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실로 인해 인간은 단지 믿어야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개신교회나 애초부터 인간은 미생물에서 출발한 생명체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부정합니다. 님이나 저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신성한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을 위대하게 평가하는 가르침이 있습니까??

    

(2) 하나님과 예수님, 성신은 한 분이 아니라 개체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대다수 교회가 삼위일체라는 신비한(?)내용의 교리를 가르쳐 그분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게 했으나 조셉 스미스를 통해 그러한 신회의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17:3에서 말해줍니다. 그분을 제대로, 명확하게 이해해야 영생에 이른다는 점은 놀랍지 않습니까?

    

(3) 우리는 아담과 이브로 인해 모든 인류에게 왔다는 원죄라는 유전으로 정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담으로 인한 죄는 예전에 주님이 용서해 주셨고 우리가 심판받아야 할 죄악은 현재 우리가 선택의지로 인한 것에 한정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인이기에 정죄 받을 수밖에 없다며 끝없는 죄의식에 빠져 있는 인간을 해방시켜주고 오히려 자신의 현 상태에 대해 명확하게 바라보고 책임감 있게 살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내용입니다.

 

제가 언급한 이 세 가지만을 보더라도 복음의 회복이 얼마나 놀랍고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지 (요한 8:32) 알 수가 있을터인데 어찌 이런 기본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잊어버리고 조셉 스미스의 일부다처, 그것도 몇가지 단편적으로 전해져 온 기록들을 전후 문맥과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현대적 잣대로 평가해놓고는, 그것을 마치 조셉 스미스 가르침의 전부인양 왜곡하는 일은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19세기의 사건을, 그것도 어떤 맥락에 이루어졌는지 이해 할 수 없는 상황에서, 21세기의 시점을 가지고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하니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3.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행위가 식인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내용을 보고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살과 피를 취함으로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이 아름답고도 숭고한 의식을 고작 미개인들의 식인관습과 연관 지으시다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고전 10:16,17)

 

성찬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우리 죄가 사함 받았음을 기억하는 의식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몸을 우리가 취함으로 그분과 하나가 되고, 그 몸을 취한 이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상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처럼 경전에서 사용하는 표현들이 어떠한 맥락에서 이해되고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그저 수박의 겉을 핥아 먹는 식의 이해밖에 못합니다. 그렇게 영적이고 숭고한 의식 내내 예수의 속죄가 아닌 식인행위를 연관지었을 님의 태도를 상상해 보면 참 쓴 웃음이 나올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8)

십자가 사건이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에 따라 멸망을 하거나 하나님의 능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우리가 주의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요 저와 님과 같은 불완전한 사람이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님은 그토록 교회에 다니셨으면서 이 속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 의미조차 모르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물론 우리가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지극히 적은 이해나마 저에게 기쁨과 희망을 가져다 준 이 놀라운 사건을 님은 정녕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까? 그럼 후기성도가 아니였지요...성도라는 말은 그 대속을 통해 의롭게 된 자들을 의미하는데 그 의미조차 모르고 있었다면 그저 회원 기록에 이름만 남아 있는 회원이었을 뿐이란 겁니다.

 

4. 고기를 먹는 것은 생명존중 사상을 어기는 일??

    

이제는 고기를 먹는 것 까지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로 평가하시는군요. 고기를 먹느냐 안먹느냐는 각 사람의 양심에 따른 것일 뿐, 님이 이에 대해 종교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식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님과 같은 논리라면 군대를 가는 것은 생명의 가치를 무시한 행위라고 하는 정죄하는 여호와의 증인도 참된 종교가 되겠군요. 아니면 지나가는 벌레를 밟아 죽일까 우려하여 항상 큰 빗자루로 길을 쓸며 지나가는 몇몇 불교 단체가 참된 종교가 되겠구요, 님은 군대도 기피하고 한 마리의 벌레를 죽이면 안되어 모기가 온 몸을 뜯어도 살충제도 안쓰고 길을 지날 때마다 빗자루로 쓸어야 하겠습니다.

 

그러하도다. 또한 짐승과 공중의 새의 고기도 사람이 감사하면서 사용하도록 나 주가 정하였느니라. 그러할지라도 그것들은 조금씩 사용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겨울철이나 추울 때나 기근 때 외에는 이를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느니라.” (교성 89:12,13)    

 

님이 잠시 인용한 구절을 보니 고기를 감사하면서 사용하도록 정하셨다고 했습니다. 겨울철이나 추울 때나 기근 때 외에는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은 당시 냉동 시설이 없던 시절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잘못 이해될 부분입니다. 날씨가 더워지면 고기가 쉽게 상하기 때문에 가능한 겨울이나 추울 때 사용하라고 권유한 것이며 그렇게 심한 기근이 아니면 가축을 아껴야 할 당시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서 취하라고 한겁니다. 이처럼 시대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무조건 현시대의 관점으로만 보려고 하니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들만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략적으로 님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 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황금 송아지를 만든 것과 교회에서 소농장을 운영하는 것과 연관지으려는, 그 안타까우면서 한심스러운 논리적 비약에는 차마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생략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이런 말도 안되는 궤변과 논리적 비약이 가득한 글에는 이런 식으로 답글을 달지 않으려 하오니 이해하시기 바랍니다.지금도 이 글을 쓰면서 후회 많이 했습니다...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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