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 전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장면)
최근에 입이 험하고 감정 통제를 못하는 어떤 분이 계속 이 블로그에 도배를 하고 반말에 비아냥, 그리고 소름끼치는 듯 한 비웃음이 가득한 글로 자신의 블로그를 도배하는 분이 이곳에서는 글을 쓰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처음 침례받고 하이텔 유니텔을 비롯하여 현대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분들과 직간접으로 만나서 복음 토론을 해왔지만 그분처럼 막무가내에 분쟁의 영이 가득한 분은 만나본 적이 없는 듯합니다. 토론의 기술은커녕 기본적인 대화의 자세도 되지 않은 분이라 더 이상 상종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기에 부득이 차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계속 도배를 하고 그것을 삭제하는 것도 일이라..^^;;)
저도 더 이상 그곳에 가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곳의 글들을 유심히 살피면서 꼬투리를 잡고 가십 거리로 만들어 즐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자신은 진리를 전하고 싶었는데 제가 그 진리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막았다면서 의기양양 떠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식으로라도 자기 만족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셔야겠지요. 그건 그 분의 자유요 선택입니다. 암튼 덕분에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다시금 묵상하고 기본 원리를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제가 시편 110편과 관련하여 다양한 학자들의 의견들을 살펴볼 수 있었는데 그 해석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시편이 단순한 예언서나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양한 시적 허용이나 기교가 사용된 시(詩)라는 것을 감안하면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해석이 다양하게 나올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가장 논의가 되고 있는 구절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그 구절은 보통 “신탁”의 의미로서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왕이신 다윗에게 전하는 식의 구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즉 여기서 말하는 화자인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선지자로서 그가 ‘주’(여기서 말하는 주는 왕을 부르는 칭호임)라 부르는 당시 다윗 왕에게 그가 적들을 승리하여 영광을 얻으리라는 축복의 말씀을 전하는 겁니다. 이런 구조가 다소 낯설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시편 전체의 흐름을 보면 온전한 조화를 이룹니다. 예를 들어 시편 2편 2절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특히 여기서 말하는 “그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해 호크마 주석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기름 받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어 '메쉬야'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란 의미로 여기서는 이스라엘 왕 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왕들(특히 다윗 계열의 왕들)은 대관식 때 기름부음을 받았다(왕상 1:45). 이 기름부음은 하나님의 왕직을 대리하기 위하여 그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출 28:41;민 3:3;삼상 10:1;16:3).
즉 여기서 나오는 기름 부음받은 자란 당시 이스라엘의 왕, 특히 시편에서는 다윗 왕을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하지만 본 구절의 메시야는 궁극적으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윗을 지칭하는 단어가 신약에 와서는 예수를 의미하는 구절로 둔갑(?)하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의 해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4:18에서도 예수께서는 이사야61:1절에서 나오는 구절 중 이사야에게 해당되는 부분을 당신에 대한 예언이라 선언하십니다. 이처럼 예언이 일차적 의미와 이차적 의미로서의 성취된다는 독특한 개념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믿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당시 성경에 정통하다는 사람들이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당신이 메시야임을 선언하셨을 때도 쉽게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시편 110편과 관련하여 예수께서 풀이하시면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다”(마가 12:37)고 설명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37절 후반부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즐겁게 들었을까요? 그것도 비난에 혈안이 되어 있던 서기관의 질문에 대해 예수께서 답변하신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그 당시의 문화나 정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추측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말장난이나 언어유희로 받아들이지 않았을까요? 즉 다윗이 주님이라 부른 분이 어찌 다윗의 후손으로 내려왔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예수님의 해석이 우리가 쉽게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비웃었던 것은 아니였을까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성경 구절들이 예수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임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수많은 구절들에 대해서는 단순히 침묵하거나 무시하면서 논쟁의 여지가 될 만한 몇몇 구절들을 과대 해석하고, 그것이 마치 모든 문제의 열쇠인양 침소봉대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사람이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110편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의 중심과 핵심은 여호와와 예수가 다르다는 사실이 아니라 예수가 예언에 따라 오신 그리스도요 구세주라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다”는 말의 핵심은 다윗왕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를 그토록 갈망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다윗이 말한 주가 여호와인지 아니면 “나의 주”에 나오는 ‘주’인지에 대한 퍼즐 맞추기 식의 해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시편 110편 자체가 다윗의 시기 때문에 “여호와(주)께서 내 주께”라는 표현을 두고 여호와를 주로 표현하지 않았냐고 하면 또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내 주”라는 말에 나오는 내(my)라는 표현을 다윗으로 한정해서 후반부에 나오는 ‘주’를 예수라 칭하느냐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학자들이 다윗의 시이긴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my)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나 제사장을 의미한다고 하는데 님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하여 단순히 그것을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의견으로 치부하는 것은 또 무슨 근거입니까?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이사야 44:24)
“만물이 그(예수)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예수)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 1:3)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면서 왜 이 두 구절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십니까? 여호와는 함께 한 자 없이 만물을 창조했다고 하는데 왜 예수님은 당신을 통해 만물이 창조되었다고 했습니까?
“너희가 성경(구약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예수 그리스도)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 5:39)
구약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한 기사가 담겨 있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그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증언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께서 유대인들에게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 1:11)
자기 백성, 즉 여호와(예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분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이사야 43:7, 열왕기하 11:17, 역대하 23:16)이라 칭하지 않던가요?
왜 이러한 핵심적인 구절에 대해서는 나몰라라...하면서 그저 몇 구절들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시도한 뒤에 그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엉터리니 헛소리니 하면서 날뛰는 모습은 너무나 눈물겨울 뿐입니다.
들을 귀가 없는 이들에게 아무리 말을 한들, 그것은 소귀에 경 읽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충분히 설명해 드렸지만 이에 대해 읽지도 않으려고 하고 그저 반말에 비아냥만 일쌈고 도배하기에 차단한 것이지 누구의 착각처럼 진리(?????)를 못듣게 하려고 글을 삭제하고 차단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논쟁이 되는 것들을 말끔하게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게 몰몬경이 주어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몰몬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소개합니다. (니후 6:9) 이처럼 성경과 몰몬경은 온전히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교리를 명확하게 해줍니다.
“네 허리의 열매에 의해 기록될 것(몰몬경)과 또한 유다의 허리의 열매에 의해 기록될 것(성경)이 함께 자라 거짓 교리들을 무너뜨리며, 다툼을 가라앉히며, 네 허리의 열매 가운데 평화를 이루며, 후일에 그들로 하여금 그들 조상에 대하여 알게 하고, 또한 나의 성약에 대하여 알게 하리라,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니파이후서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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