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이런 이들이 있습니다. 난 교회가 참된 줄 알고 있지만 회원들 중에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아서 교회에 안 나간다고..말입니다. 그 말을 들을 때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긴 합니다. 저 역시 지금껏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교회 내에 위선적인 사람들을 종종 보곤 하는데 ‘참된 교회에 왜 저런 사람들이 있지?’라는 생각에 때론 의문을 품기도 하고 자칫하다가는 몇몇 회원들 때문에 교회의 모든 회원들을 색안경 끼고 보는 경향도 있었기 때문이죠. 처음 침례 받고 청남 회장으로 부름 받았을 당시, 부모님의 반대로 참 교회 오기가 힘들었고 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하던 시절이었는데 자유롭게 교회에 다니면서도 공과 시간에 장난만 치고 세상적으로 노는 아이들을 보며 감독님 앞에서 “왜 참된 교회에 저런 아이들이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펑펑 운적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하고 냉철하게 시비를 논할 수 있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감정적인 면들은 이 모든 것을 넘어서 인간을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위선적인 사람들을 보고 울분을 터트리고 싶을 때도 많으나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나는 얼마나 합당한 사람이던가..” 그러면서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제 가슴속을 날카롭게 쑤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 7:3)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위선적이고 냉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과 말로로 범한 죄만 해도 하나님 앞에 감히 나갈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런 내가 누구를 일러 위선적이니 뭐니 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런 몇몇 회원들 때문에 교회에 나갈 수가 없다니...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누가 5:31)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하지 못해서 고침을 받아야 하는 병든 자들이 진정한 의원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고침을 받고자 환자들이 모인 곳에서 어찌 완벽함을 찾겠다는 것인가요?
저도 한 때는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 당시는 그것이 왜 이리 크게 보였던지 그 회원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올라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 교회에 빈 교실에 들어가 한동안 울면서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제발 제 이 모진 마음을 치료해 달라고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결국 나 자신을 파멸시킨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지어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군가를 심하게 미워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보는 것 자체가 껄끄러워 누군가를 피한 적은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제 자신을 힘들게 할 정도로 증오에 휩싸인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내에서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나갈 수 없다고 선택한 이들은 누군가를 향한 증오가 바로 자신의 영적인 건강에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걸 누가 노리는 것일까요? 정말 그 모진 회원들 잘못인 것일까요? 아니면 그릇된 선택을 한 자신을 이용한 영원한 적대자인 것일까요?
그리고 제가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납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참되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건 서로가 결합될 수 없는 모순적인 말일 뿐이며 자신의 상처난 마음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교회가 참된 것을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탄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행동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적대자가 된 것입니다. (야고보 2:19) 야고보서를 보면 행함이 없으면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 2:20) 교회가 참되다는 것을 알면 그대로 행동해야지 진정한 앎이며 신앙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 10:25)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 18:20)
경전은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고요. 오직 그 날(예수의 재림)이 가까워 질수록 더욱 그렇게 하라고 권유합니다. 또한 두 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예수께서도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혼자서 예배를 보고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들어 주시겠지만 결국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그 모임을 중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유명한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요한 15:5,6)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그 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속해 있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결국에는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게 될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맺혀 있는 것에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교회에 와서 성찬을 취함으로 예수의 삶과 피를 우리 몸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에베소 1:22,23)
그렇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며 머리가 되십니다. 당연히 교회를 당신이 몸으로 삼으신 예수와 한 몸이 되기 위해서는 교회에 속해서 그분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성찬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참되고 예수님은 살아 계심을 믿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는 것은 예수라는 포도나무에서 스스로를 잘라 말라가는 나무 가지가 되도록 방치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영적 생명에 얼마나 치명적이며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교회가 참됨을 알지만 교회를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1. 그렇게 회원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실 유일한 의원 예수님께 나아가십시오. 상처를 받아 안 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심하게 다쳤음에도 병원에 가서 치유하지 않다가 결국은 더욱 질병이 심각하게 방치하는 경우에 다름 아닙니다.
2. 교회 회원들이 전부 위선적으로 보이신다면 한 번 곰곰이 자신의 내면을 살펴 보십시오. 나는 과연 다른 이들 눈에 완벽한 사람인가...하고 말입니다. 나의 작은 행동과 말 한마디로 인해 다른 이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적은 없는가...하고 말입니다.
3.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교회가 참되다면 그 참됨을 행동으로 보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입니다. 교회 내에 부당한 일이 발생하거든, 그것을 보고 상처 받아 스스로 움츠리지 말고 개선해 보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십시오, 설령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꼴이라고 여겨진다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이야기를 읽어 보도록 하십시오.
4. 교회 회원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다고 했던 몰몬경에도 실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신약 전서를 읽어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했던 그 12사도들도 서로 질투와 질시로 싸우거나 부적절한 행동들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현재 12사도들을 비롯한 총관리 역원들이라고 전부 완벽하겠습니까?? 그분들 사이에 예수님 당시 12사도들이 행한 것과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볼 근거가 없지 않을까요? 그런데 세상살이의 힘들고 거친 환경에서 살면서 신앙하는 이들은 어떨까요? 그것이 그렇게 우리의 영적 생명을 중단하게 만들 만큼 큰 일일까요??
5.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그 자리를 떠났을 때 예수께서 다음과 같이 물으십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 6:67)
교회를 떠나고 하는 분들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해 보십시오. “너희도 가려느냐?”
이러한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요?...주님..저 회원이 나를 힘들게 해서 교회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해야 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 6:68,69)
그렇습니다..“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고 답변합니다.
우리의 대답도 이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생의 말씀이 이 교회에 있는데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이 교회가 참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데 우리가 과연 어디로 가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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