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 길에서 예수님을 만남) (조셉 스미스가 숲에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남)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시현에 대해 생각하기에 앞서서 만약 우리가 특정한 경험을 했고 그것을 묘사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과연 어떨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편견을 갖고 비판하려는 의도를 가진 이들에게 조셉 스미스가 목격했다는 그 놀라운 경험에 대한 기록이 여러 가지라는 사실을 비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셉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경험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지요. 아마도 우리가 경험한 특별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그 세부점들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마련일 것입니다. 나의 경험을 듣는 이가 누군지에 대해 강조하고자 하는 점들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며 그 사건과 관련된 우리의 목적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제가 침례 받게 된 과정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칩시다. 한 때 제가 가지고 있었던 신앙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설명하는 것이라면 종교적인 경험을 초점으로 설명하면서 어떻게 개종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다면 저를 침례의 물가로 인도해줄 여러 회원들의 사랑과 관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구요, 침례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침례의 과정과 그 이후 진행되는 사항에 대해 언급할 것입니다. 아니면 개종하기 전에 느꼈던 개인적인 갈등이나 두려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면 남들에게 말로 전하지 못했던 내밀한 이야기들이 포함될 것입니다. 이처럼 저 개인의 침례를 묘사함에 있어서도 관점과 듣고자 하는 이의 관심 사항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에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저는 조셉 스미스가 성스러운 숲에서 경험한 일들을 묘사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더욱 진실성이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시현은 많은 진리들을 이 지상에 회복하게 만든 전초전이자 압도적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황홀하고도 성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각기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관심사항을 가진 다양한 대상들을 염두에 두면서 조셉은 그의 경험을 묘사함에 있어 각기 다른 방법으로 사건의 세부점들을 해석하고 강조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강조점에는 그의 개인적인 죄의 용서함이나 어느 교회에 속해야 할지,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개별적인 분이심을 보았다는 점들이 포함될 수 있겠죠. 특정한 부분들을 강조하느라 다른 몇몇 세부점들을 생략했다고 하여 그것을 거짓의 증거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조셉 스미스가 동일한 경험을 묘사함에 있어 어떤 부분은 강조하고 어떤 부분은 생략한 기록의 다양성을 근거로 그를 사기꾼으로 단정한다면 그와 동일한 논리와 잣대로 성경 역시 거부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24:4에는 두 명의 천사가 무덤가에 있는 여러 여인들에게 나타났다고 기록하는데 마태 28:2에서는 오직 한 명의 천사만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부점들이 몰몬경이나 첫 번째 시현처럼 역사적인 기록에 차이가 나면 교회를 적대시하는 이들은 그것을 모순이나 거짓의 증거로 내세우지만 마태와 누가가 동일한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 차이가 발생하는 것을 보면 자연스럽게 시점이나 관점의 차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또한 이와 동일한 논리와 잣대를 사용하다면 우리는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사건을 묘사한 기록의 차이점을 근거로 그의 기록 역시 거짓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바울은 그의 놀라운 경험을 기록했는데 성경에 총 3번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9,22,26장)
그런데 잘 읽어 보면 각 사건에는 차이점, 심지어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등장합니다. 세 기록 사이에는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예가 다음과 같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도 9:7)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사도 22:9)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도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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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은 소리를 들었던 것일까요 못 들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땅에 엎드려졌나요 아니면 그냥 서 있었나요? 이런 차이점들이 정말 중요한 것일까요? 교회를 적대시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몰몬경이나 조셉 스미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이런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비판의 증거라고 두 눈 밝히면서 덤비지만 정작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 보이는 차이에 대해서는 함구령으로 일관할 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그 세부점들 사이의 차이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메시지와 그가 목격한 사건이 중요한 것이라고 말입니다...이렇게 사도 바울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왜 조셉 스미스를 비롯한 몰몬 교회에 대해서는 그토록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난을 하시는지요? 이걸 이중 잣대라고 하지요.
그 세부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 수는 없어도 사도 바울의 기록에서 발견되는 차이점들을 다음과 같은 내용들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길에 가던 사람들이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해 서 있다가 나중에는 빛을 보게 되면서 땅에 엎드려지게 되었고 그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메시지는 듣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연속적으로 발생한 사건을 세분화 하여 설명하는 가운데 마치 모순처럼 보이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물론 그 세부점이 어떠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목격했고 그 이후 그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선교사업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세부적인 면에서 다른 차이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9장과 22장에서는 그저 사도 바울이 목격한 빛이 그 주위를 둘렀다는 말로 되어 있지만 26장에서는 그 빛이 그와 그와 함께한 자들 주위를 둘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구절에서는 전부 주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질문에 “주님 누구시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유독 9장 5절에서는 바울이 대답한 이후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26장에서는 바울이 대답하기 전에 하신 말씀으로 되어 있고 22장에는 그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도 9,22장은 바울이 어떻게 시력을 되찾게 되었는지 언급하면서 결론을 내지만 미래의 선교사로 봉사하게 되리라는 주님의 명령은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26장으로 오면 바울은 그가 눈이 멀었다가 기적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으면서 주께서 그를 이방인 가운데 사도로 부름을 주셨다는 기록이 나올 뿐입니다. 만약 바울이 조셉 스미스였다면 비판자들은 이 기록들을 근거로 이 이야기들은 서로 모순되니까 믿을 수 없다고 난리를 쳤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나 조셉 스미스는 그가 경험했던 그 놀라운 사건을 묘사함에 있어서 다른 관점에서 다가갔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초기에 바울은 그의 눈이 기적적으로 고침받은 개인적인 사실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더라면 초기 조셉 스미스도 그의 개인적 죄에 대한 용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후 이방인들에게 선교사로 나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되면서 사도 바울은 그의 경험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언급했다면 조셉 스미스의 경우도 그를 통해 복음을 회복하게 되는 점을 강조했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그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이 다마스쿠스에서 주님을 만나고 난 지 수년이 지난 뒤의 일(약 24년 정도가 흘렀을 것이라고 추정함)이었던 것처럼 조셉 스미스 역시 그가 초기에 처했던 어려운 상황이나 학문의 부족과 그 경험을 나눔으로 받게 된 주위 사람들의 반대 등으로 한동안 기록을 하지 않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첫 번째 시현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상대방을 쉽게 판단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직하게 이해하기를 구할 것이지 단지 비방할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어떤 이는 이 블로그에 올라오는 글을 반박한답시고 눈물겨운 애를 쓰고 있지만 정직하게 진실에 다가가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비방할 대상으로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실제 무슨 말을 뭐라고 하는지 이해하기도 어렵게 오락가락합니다.
몇가지 문제점이나 차이점이 있음에도 성경은 참되고 그 성경이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처럼 조셉 스미스의 시현 역시 차이점이 존재하긴 해도 그 사건에서 드러나는 진리, 즉 하나님과 예수님은 개별적으로 존재하시면서 그분의 교회를 다시금 회복시키셨다는 사실 역시 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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