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들은 완벽한 사람들인가? 참 우스운 질문이지만 이에 대해 그릇된 생각을 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는 것 같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이다. 그들 역시 불완전한 사람들이며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필멸의 존재들이다.
곧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나아와 힘 있고 강한 것들을 부수리니,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이웃을 권고하지 않게 하며, 육신의 팔을 의지하지 않게 하려 함이요...나의 복음의 충만함이 연약한 자들과 단순한 자들에 의하여 세상 끝까지 그리고 왕들과 통치자들 앞에 선포되게 하려 함이니라.보라, 나는 하나님이요, 이를 말하였노라. 이들 계명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요, 연약함 가운데 있는 나의 종들에게 그들의 언어의 방식에 좇아 주어진 것이니 이는 그들로 이해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교리와 성약 1:19,23,24)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 1:27)
경전을 보면 주님께서는 그분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을 하나같이 “세상의 연약한 것들” “단순한 자들” “연약함 가운데 있는 나의 종들”이라 부르셨다. 왜 그러셨을까? 기왕 그분의 종으로 부르셨으니 상대적으로 완벽한 자들을 불러주시고 "너는 대단한 이들이다"라고 치켜세워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부족하고 연약한 자들을 들어 그분의 도구로 사용하시는가? 이에 대해 조셉 필딩 스미스 회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주님은 조셉 스미스와 그의 보좌들을 택했다. 그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 열국의 위대하고 강한 자 들은 그들의 교만과 독선 때문에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었다. ……주님의 방법은 인간의 방법과 다르며, 주님은 스스로 자신이 가르침을 받기에는 너무 현명하다고 판단하는 사람을 택하시지는 않으신다. 따라서 그분은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는 사람을 택하여 그들을 능력 있고 강한 자를 쳐부술 만큼 강하게 하신다. …… 우리의 선교사 제도를 생각하면 어떻게 약한 자들이 강한 자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힘 있고 강한 자들이 교회의 겸손한 장로들에게 압도되어 왔다.” (교회사와 현대 계시, 1:255)
스미스 회장의 지적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이들은 회개하고 겸손한 자들이어만 하며 기꺼이 가르침 받고자 하는 자들이어야만 한다. 인간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을 온전히 의존하고 부족한 가운데 충실하게 임하는 자들이어야만 한다. 실제 고린도전서 1:29에서도 이에 대하여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치 못하게 하려고" 불완전한 사람들을 사용하셨다고 알려준다. 너무 잘난 사람을 부르면 자신이 하는 부름에 대해 "내가 잘나서, 내가 아니고서는 이런 걸 할 수 없다"며 뻐길 수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자들은 겉으로는 훌륭해 보일지는 몰라도 인간적으로 볼 때 충분히 결함이 많을 수도 있다.
이 말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즉,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 받은 자들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한다면 이는 경전에 담긴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경전에 대한 그릇된 이해, 그리고 육신의 팔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은 결국 복음의 길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크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사도라고 한다면 베드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후기성도들에게 있어 베드로는 신권의 열쇠를 가진 교회의 첫 번째 회장이며 가톨릭에서는 첫 번째 교황이니 말이다. 이 베드로는 정말 생전에 흠이 없던 사람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생애가 성경에 전부 기록된 것은 아닐테지만 성경에 기록된 것만 봐도 그는 여러 차례 사고를 친 불완전한 사람이었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은 정말 그에게 있어 치욕스러운 과거일 것이다. 물 위를 걷다가 주님의 온전히 의지하지 않아 물에 빠지기도 했으며 언제나 최고가 되기를 열망하는 속물같은 성격도 있었다. 그 뿐인가? 사도 바울은 그의 태도에 대해 책망하는 일도 있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바울)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갈 2:11-13)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할례를 받은 이들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베드로는 할례받은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가 않아 그 자리를 떠났는데 이 때문에 남은 유대인들이나 바나바도 동일하게 외식. 즉 위선적인 행동을 하도록 영향을 받게 되었다. 계시를 통해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모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선포했던 이(사도 10:34,35)가 오히려 사람을 무서워하고, 자신의 체면을 중시해서, 또한 이방인들과 있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 자리를 떠났던 긋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한들 결함이 있고 실수를 하며 개인적인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다. 그러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그 마음의 올바른 뜻을 받아들이시고 도구로서 사용하신다.
이처럼 우리는 경전에서 불완전하고 실수도 범하고 개인적 편견에 사로잡혀 비겁한 짓을 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가 있다. 그렇기에 그런 선지자나 지도자들을 계속해서 연약한 자들, 세상의 미련한 것들, 단순한 자들이라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경전을 오해하고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마치 선지자들을 완벽한 사람이나 결함이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를 등진 몇몇 이들은 과거 선지자들의 결함이나 개인적인 편견이 섞인 몇몇 발언들을 근거로 해서 교회는 거짓되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린다. 게다가 선지자들의 불완전성이나 개인적인 사견이라는 말을 하면 그것을 그저 비겁한 변명이나 핑계거리에 불과하다고 말을 한다. 본인들이 정작 선지자들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갖고 있고 그 개념과 뭔가가 어긋나자 그에 대해 불만을 품고 비난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저 자신의 의견만이 올바르고 합리적이며 경전에서 여러 차례 가르치고 밝힌 내용에 대해서는 비겁한 변명 운운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울 따름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선지자들이나 지도자들은 미련하고 연약하며 단순한 자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단한 것 같고 존경할 만하지만(물론 존경할 부분이 많다.) 사실 그들 역시 불완전하고 개인적인 편견이 있으며 실수를 범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주님께서 들어 사용하시지 않으면 뒷방 노인네들에 불과하다. 선지자를 따르라는 말은 그 개인의 말과 행위를 따르라는 말이 아니라 그를 들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왜 이런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가 없어 선지자를 따르라는 말을 그의 행동거지 하나하나, 그의 말씀이나 글 하나하나 완벽한 것으로 따르라는 식으로 오해하는가?
왜 그들에게서 완벽을 기대하는가? 그들 스스로를 일러 완벽하다고 한 적도 없는데, 그들이 하는 모든 말들이 주님의 영감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하지도 않는데, 단지 경전과 복음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내세웠다 하여 그것을 꼬투리 잡고 늘어서는 모습이 참 우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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