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해 잘 알지 못하거나, 혹은 한 때 교회에 속해 있었으나 잘못된 신념으로 교회를 떠난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대표적인 경우는 후기성도들이 갖고 있는 간증이 지식이 아닌 단순한 주관적인 감정에 기초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기에 후기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신을 통해 알게 된 몇몇 것들에 대해 증언할 때 이를 비난한다. 게다가 이러한 간증들은 논리나 이성, 그리고 객관적인 근거와는 무관하게 그저 개인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뭐 하늘의 지식에 대해 부정하고 신적인 특성들을 거부하는 무신론자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들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 2:14)
하나님께 속한 것들은 영적인 것이기에 영적으로야 분별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그분에 대해 알 수 있도록 방법(도구)들을 마련해 주셨는데 그런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고 엉뚱한 방법으로 알려고 하니 그게 알아지겠느냐는 것이다. 특정한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주었는데 엉뚱하게 그 열쇠는 사용하지 않고 자동차 열쇠로만 열려고 하니 그게 열어지겠냐는 것이다. 자신의 열쇠는 탓하지 않고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하여 애초에 그 문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단정하는 어리석은 일들을 범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다.
성경을 봐도 하나님의 일을 알기 위해서는 그분이 주시는 방법을 근거로 했을 때 가능했다. 예를 들어 베드로가 예수를 주로 고백한 것은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온 계시였다고 밝혔다. (마태 16:15-17) 오순절 날 사람들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림을 받아 무엇을 더 해야할 지 요청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사도행전 2:37,38)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누가 24:32)
엠마오로 가는 도중 예수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께서 풀어주신 경전의 말씀을 듣고는 “마음이 뜨겁게 된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물론 이러한 감정들은 쉽게 속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다. 하지마나 후기성도들은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를 밝혀 주신다는 것이며 복음이 참되고,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며, 그분이 살아계신 선지자들을 통해 이 교회를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신다는 점이다. 이는 성경에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진리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
성신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지식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기도로 영을 구하는 것만으로 진정한 의미에서 앎을 얻을 수는 없다.
“너는 네 생각으로 그것을 연구해야만 하느니라. 그러고나서 그것이 옳은지를 내게 물어야 하나니..,” (교성 9:8)
“너희가 이 기록을 읽게 되거든, 너희는 아담이 창조된 때로부터 너희가 이 기록을 받게 될 때까지 주께서 사람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자비로우셨던가를 기억하고, 그것을 너희 마음에 깊이 생각하라.” (모로나이서 10:3)
특정한 지식이 옳은 것임을 알기 위해 기도하기 전에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 그것을 연구해야 하며,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이다. 후기성도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단순한 기도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그 전에 이미 철저한 연구와 과거의 기록들을 기억하며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추론한 다음, 최종적으로 영의 확증과 그로부터 주어지는 명확한 지식을 근거로 하여 “이것이 참됨을 안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마태 7:7에서도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주시기 전에 이미 우리들은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르리는 과정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연구하고, 기억하고, 깊이 생각하는 과정과 연관 지을 수도 있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시며 우리는 그러한 앎을 “이것이 참됨을 알고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선언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앎의 과정에 대해 잘 모르는 회원들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간증을 할 때 사용하는 문구 그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간증 모임에서 심심치 않게 보는 것처럼 여행담이나 자기 자랑, 신세 타령과 같은 것들을 늘어놓으면서 간증합니다..운운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지식일 뿐이며 경전에서 밝힌 것들을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아무리 반복한다 한들, 그것이 개인의 신앙을 강화한다거나 그것을 듣는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성찬식 모임이나 간증 모임이 자주 맥빠지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면 이런 잘못된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어떤 이들은 “간증을 하면 간증이 강화된다”는 말을 그릇 이해하여 거짓을 반복하면 거짓을 진실로 믿어 버리게 된다..는 식으로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이는 후기성도들이 가진 간증을 애초부터 거짓이라고 단정하고 나온 결론이기 때문에 신뢰할 가치가 없다.
예수께서는 달란트 비유에서 각기 다른 달란트를 맡기고 그것을 배로 늘이지 않는 이를 정죄하는 유명한 비유가 나온다. 그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그저 묻어둔 이를 향하여 “악하고 게으른 종”(마태 25:26)이라고 부르며 그나마 있던 달란트 마저 빼앗은 장면이 나온다. 흔히 이 구절을 각자에게 맡긴 재능과 관련해서 이해를 하지만 간증 역시 하나님에서 온 은사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달란트를 개인이 가진 간증이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개인마다 간증이 깊이가 다르다. 어떤 이는 정말 산을 옮길 만한 신앙이 있을 수 있으며 또 어떤 이는 믿고자 하지만 여러 의문이나 환경으로 인해 미지근한 신앙을 가질 수도 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의 깊이가 어떤 것인과는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을 어떻게 배로 만들었냐는 것이다. 그저 땅에 보관한 이는 자신이 가진 간증을 나누지 않고, 그저 입을 다물고 수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이에 비할 수 있다 이런 이들은 결국에는 그 남아 있던 것마저 빼앗겨 버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간증이 깊이가 어떻게 되는지 상관없이 입을 열어 그 간증을 전할 때 우리가 가진 간증의 깊이가 두 배 세 배가 되는 것이다. 알지도 못하는 것을 ~압니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함으로서 그 간증이 성장한다는 의미다. 알고 있는 지식이 지극히 미약하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것을 입으로 고백하여 나의 것으로 삼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하여 더 많은 것으로 보상하신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단순히 마음으로만 믿을 것이 아니라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에 이르는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알도록 마련해 주신 도구들인데, 실제 이런 도구들을 사용해 보지도 않은 자들이 “간증을 하면 간증이 커진다.”는 말을 곡해하여 비방하고 있으니 가슴이 아플 따름이다.
“하나님에게서 온 것은 빛이니, 빛을 받아들이고 계속하여 하나님 안에 거하는 자는 빛을 더욱 받아들이나니, 그 빛은 점점 더 밝아져 마침내는 대낮이 되리라.” (교성 50:24)
하나님에서 온 빛을 받아들이고 계속 거하는 자들이야 더 많은 빛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는 달리 과거 아무리 빛에 속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그 빛에 계속 머물지 않은 자들은 있는 빛마저 빼앗겨 결국엔 어둠에 속하게 된다. 나는 이런 모습을 교회를 떠나 비방하는 자들의 모습에 발견할 수 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 6:4-6)
한 번 빛에 거하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으나 결국 그 길에서 벗어난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드러내 놓고 욕을 하기 때문에 과거 그들이 받았던 그 지식이 지금에는 어리석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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