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역사와 교리/일부다처

조셉 스미스와 다처에 대한 오해들.. McLellin의 주장을 중심으로...

모로나이 2015. 7. 29. 18:05

 

                                     (조셉 스미스와 일부다처를 왜곡하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서 그린 그림)

 

 

조셉 스미스와 일부다처에 관한 글을 올렸을 때 특히 어떤 분께서는 조셉 스미스의 첫 번째 다처로 알려진 페니 엘거에 대한 이야기를 올리면서 조셉은 그녀와 성적 관계를 맺었다는 식의 주장을 계속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증거라면서 http://josephsmithspolygamy.org에 올려진 글들을 반복해서 올리고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라는 식의 논지를 계속 펼쳐 오셨습니다. 하지만 주장하는 근거를 보면 대부분이 당사자들에 의한 글이 아니라 제 3자에 의해서, 그것도 조셉 사망 이후 수 십 년이 지난 뒤에 교회를 떠나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자들의 증언이 상당수일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반복해서 사용합니다.

 

#Available evidences provide no record of the chronology of the interactions between Joseph and Fanny

(이용할 수 있는 증거들은 조셉과 페니와의 관계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들을 제공하지 않는다.)

 

#What Emma witnessed is not specified. Whether it was the plural marriage ceremony, an exchange of affection, or even sexual relations we are not told

(에머가 목격한 것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것은 복수 결혼의식이었던지 애정을 주고받는 일인지 아니면 성적인 관계인 것인지 우리는 들은 바 없다.)

 

#No contemporaneous documentation of the association has been found.

(관련된 동시대적인 문서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However, there is no additional evidence supporting a pregnancy or that Fanny had a child.

(그러나 페니가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지지해줄 만한 추가적인 증거는 없다.)

 

즉 홈페이지는 증언이라고 알려진 몇몇 이들의 기록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그것을 명확하게 뒷받침해 줄 증거 기록들은 없고, 페니가 조셉 스미스와 사이에서 아기를 가졌다는 증거도 없고, 에머 스미스가 목격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알려진 바도 없다고 설명할 뿐입니다.

 

심지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페니 엘저의 오빠와의 인터뷰에서 조셉과 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것은 전적으로 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That is all a matter of my own. And I have nothing to communicate.)라고 해서 그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한 적도 없습니다. 당사자마저 그에 대해 개인의 이야기라 할 말이 없다고 한 것을 가지고 교회를 대적하는 이들은 이것마저 그녀가 자신과 조셉의 성적 관계를 인정한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올리버 카우드리가 동생과의 서신에서 조셉과 패니의 관계를 더럽고 불결하며 추악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18381월 편지) 이전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은 일부다처가 소개되었을 때 다들 거부하거나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브리검 영의 경우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내가 지금처럼 무덤으로 내려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Brigham Young, "Plurality of WivesThe Free Agency of Man," Journal of Discourses, reported by G.D. Watt (14 July 1855)라고 말할 정도로 거부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올리버의 입장에서 일부다처에 대한 교리가 처음 소개되었을 당시에는 그 일이 더럽고 불결하고 추악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란 점이죠. 그 이후 올리버는 조셉 스미스에게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 유지하다가 결국은 1838412일 파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올리버 카우드리는 조셉 스미스의 선지자로서의 부름 및 몰몬경의 참됨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에 184810월에 재침례를 받고 충실한 동료로서 끝까지 복음 안에서 견디었습니다. 조셉 스미스가 정말 미성년자를 유린하는 호색한이었다면, 그래서 일부다처 교리가 정말 더럽고 불결한 것에 불과했다고 했다면, 그래서 그것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파문을 당한 것이라면, 왜 올리버는 파문된 지 10년 이후에 다시금 교회에서 재침례를 받고 충실한 회원으로 생을 마감했던 것일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불결한 행위를 폭로했다고 자신을 추방시킨 교회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시금 교회에 들어간다고 해서 자신이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 그런 상황에서 왜 그는 다시금 침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갔을까요? 어떤 이들은 이미 종교가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지도자가 무슨 짓을 하건 교회에 남아 있으려 하는 심리가 있다는 식으로 풀이를 합니다. 물론 일부는 그런 경우가 있겠지만 올리버의 경우는 파문되고 10년 이상을 비회원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선택으로 교회를 떠난 경우가 아니라 교회에 의해 파문된 상태입니다. 그런 그가 어찌 종교가 삶의 일부가 된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해석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식솔의 문제요? 올리버는 교회를 통해 수입을 얻거나 주거 시설을 양도받은 사람도 아닌데 식솔의 문제로 교회로 돌아오다니요?

 

가장 자연스럽고 논리적인 해석은 올리버 카우드리는 조셉 스미스의 선지자됨과 몰몬경에 대한 간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며 그렇기에 조셉과 의견이 맞지 않아 교회를 대적하다가 파문이 되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갖고 있던 그 신앙의 품으로 다시금 돌아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머 스미스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그녀 역시 초기 일부다처 관습에 대해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며 불쾌하게 생각했던 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평생에 걸쳐서 남편을 지지했으며, 남편이 받은 선지자로서의 부름에 대해 부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남편 사후에 브리검 영과 의견이 맞지 않아 유타로 이주하지 않았으며 다른 교회 목사의 재혼을 했지만 그녀가 남긴 여러 기록들을 보면 조셉 스미스의 선지자로서의 역할 및 몰몬경의 참됨에 대해 끝까지 인정해 왔었습니다.

 

 

                                                                   William McLellin

 

그리고 조셉과 페니가 헛간에서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에머 스미스가 목격했다는 식의 글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에머 스미스의 증언이 아니라 William McLellin이라는 파문된 사람이 쓴 편지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사도로까지 부름 받았던 William McLellin1847년에 에머 스미스를 방문해서 조셉과 페니의 관계에 대해 토론한 적이 있다는 식의 편지를 에머의 아들인 조셉 스미스 3세에게 보낸 것입니다. 특히 이 편지의 의도는 조셉 스미스 3세가 186046일 복원 교회의 회장으로 지지받았을 때 자신의 아버지 조셉 스미스는 일부다처를 한 적이 없다고 선언한 것을 부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1861년 보낸 편지에 따르면 당신의 어머니(에머 스미스)께서 제가 나부에 있었을 때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만들어진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를 비방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다만 이 편지에서는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라는 계시를 받고 그것을 행했다는 식의 언급만 할 뿐입니다.

 

11년 후(1872)에도 McLellin은 조셉 스미스 3세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냅니다. 그 편지에서도 그는 어머니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물어볼 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녀에게 물어 본다면 에머가 자신의 말이 진실임을 확인해 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만약 그녀가 다른 주장을 한다면 당신의 어머니는 거짓말쟁이라고 설명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바로 이 편지에서 McLellin은 한 때 제일회장단이었지만 파문된 프레데릭 윌리엄스(Frederick G. Williams)에게서 들었다면서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것은 조셉 스미스가 1832년 후반부에 미스 힐”(Miss Hill)이라는 한 여성과 부도덕한 행위에 빠졌고 에머 스미스가 이 문제를 해결할 도움을 구하고자 윌리엄스, 올리버 카우드리, 그리고 시드니 리그돈을 불렀다는 이야기도 포함합니다.

 

또 한가지 이야기를 포함하는데 그것이 바로 조셉과 페니 엘거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페니와 조셉 스미스가 헛간에 있는 것을 에머 스미스가 틈으로 봤는데 그들이 교류(transaction)하고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편지의 후반부에서 그는 조셉 스미스 3세에게 조셉과 관련된 이 두 여성에 대하여 어머니인 에머 스미스에게 물어보라는 조언까지 합니다.

McLellin3년 뒤인 1875년 신문사에도 동일한 내용을 제보합니다. 즉 어떻게 인봉 의식이 헛간에서 집행되었으며 에머 스미스가 문 틈으로 그것을 목격했는지,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에머 스미스를 방문했을 때 그녀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한 내용이 포함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McLellin이 이런 기사를 제공했으면서 조셉 스미스 3세에게 언급했던 또 다른 여성인 미스 힐에 대한 언급은 그 이후에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어떤 자료에서도, 그것이 비판적인 내용을 가진 자료라 할지라도, “미스 힐에 대한 자료는 찾아볼 수가 없게 되는데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아마 McLellin이 나이가 많아 뭔가 혼동하고 있었거나 1749년에 발표된 존 클레렌드의 소설에 나오는 페니 힐페니 엘거와 착각한 것이 아닌가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에머 스미스가 그 이야기를 1847년에 자신에게 증언해 주었고,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조셉 스미스 사망 이후에 에머 스미스의 그 어느 기록에서도 그가 일부다처를 행했다거나 가르쳤다는 점을 인정한 기록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에머와 그의 아들인 조셉 스미스 3세는 조셉 스미스가 일부다처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죽기까지 부정하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실제 그들이 설립한 복원 교회에서는 조셉은 일부다처를 행하지 않았고 브리검 영이 처음 시도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머가 (우호적인 관계도 아닌) McLellin에게 페니와 조셉이 헛간에서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목격했다며 말한다는 것이 과연 자연스럽다고 봐야 할까요? 그것도 그 의미조차 불분명한 교류(transaction)’라는 단어를 쓰면서 말입니다.

 

그럼 이 McLellin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1831820일에 침례를 받았고 4년 뒤에 장로로 성임 받았습니다. 1025일 그는 조셉 스미스를 통해 한 계시를 받는데 그것은 음행을 범하지 말라. 그 유혹으로 인해 너는 곤경에 처하게 되리라.”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선교사업 동안 창녀와 시간을 보냈다는 이유로 183212월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1833년 재침례를 받은 그는 1835215일 사도로 성임을 받지만 그의 문제는 계속 됩니다. 그는 제일회장단을 지속적으로 비방한 편지를 써서 1835년 징계를 받습니다. 925일 복귀가 되고 커틀랜드 성전 헌납식에도 참석하지만 교회지도자로의 위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그는 1838511일 교회에서 파문됩니다.

 

그는 계속해서 순결의 법과 관련하여 어려움이 있었으며 교회 지도자들과 일치하지 않아 종종 공개적인 장소에서 그들을 비판하곤 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프레데릭 윌리엄스에게서 들었다던 미스 힐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런 확인도 없이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하는데 사용했으며 실제 그가 목격했던 일보다는 그가 들었다는, 이런 저런 소문들을 근거로 해서 교회 지도자들을 비판했습니다.

후에 그는 제임스 제이 스트렝 파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지만 그곳에서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얻지 못하자 다시 그곳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스트렝을 비판하고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그의 거짓들은 폭로가 되었을 뿐이죠.

 

그가 파문된 이후부터 McLellin은 성도들을 습격하고 물건을 빼앗는 일에 주된 역할을 합니다. 일례로 조셉이 리버티 감옥에 갇혀 있고 에머 스미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물건들이 도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시대의 일기에 따르면 McLellin조셉 형제의 집으로 들어가 그의 물걸들은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셉의 상자에서 그의 보석들을 가져갔으며 그의 옷도 가져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머 스미스가 McLellin에게 왜 그의 물건을 가져갔느냐 물었을 때 그는 내가 할 수 있기 때문이죠.”라고 답변할 뿐이었습니다.

 

조셉이 리버티 감옥의 추위에서 고통받고 있을 때 에머에게 이불과 깔개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합니다.

 

 

그 때 에머 스미스는 울면서 몇몇 이들이 하나의 이불과 담요를 제외하고 그녀의 모든 옷가지들을 가졌다고 말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 외치면서 법적인 보상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조셉이 미주리 리치몬드 감옥에 있는 동안 키가 크고 활발한 McLellin은 군 보안관에게 가서 선지자 조셉 스미스를 매질할 권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허락은 조셉이 싸울 것이라는 조건하에 주어졌죠. 보완관은 조셉에게 McLellin의 요구를 알려주었으며 이에 조셉은 무기만 없다면 괜찮다고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McLellin은 곤봉을 가져갈 수 없다면 그와 싸울 수 없다고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이는 어떻게 하면 조셉에게 해를 끼칠까 노심초사하던 사람입니다.

 

McLellin이 제시한 제 2차 자료를 권위있고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교회에서 파문되어 그에 대한 악의로 에머와 그 가족들의 물건을 훔치고, 조셉을 해코지하고 싶어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했던 그에게, 조셉이 리버티 감옥에 있는 동안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에머가 걱정하는 그 원인이 바로 McLellin이 그녀의 침구류를 다 훔쳤갔다는 것인데, 그런 그 자에게 에머가 남편과 페니가 은밀하게 관계를 맺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교회를 대적하는 마이클 퀸과 같은 몇몇 이들은 조셉 사망 이후 에머 스미스가 McLellin에 대하여 좋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에머 스미스가 186622일 그녀의 아들인 조셉 스미스 3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그 증거 자료로 꼽습니다. 그 구절은 이렇습니다.

 

나는 McLellin이 그의 오래 묻힌 재능을 발휘하기를 소망한단다. 그리고 너무 늦어지기 전에 그것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어...왜냐하면 그는 확실히 재능이 있는 사람이거든,”

 

그런데 과연 이 구절이 에머 스미스가 McLellin을 칭찬한 내용일까요? 오히려 그녀는 그에게 큰 재능이 있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거나 낭비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였을까요?

 

이처럼 조셉 스미스와 다처와의 성적 관계 운운하는 증언(?)들은 하나같이 제 3차자료며 사건이 일어났다고 알려진 시기 훨씬 이후의 자료며, 그나마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이들은그 주장들이 어디서 기원했는지에 대한 고려나 전후 문맥과 관련없이 그저 "역사적인 자료"라면서 그것을 기정 사실화 해서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만들 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