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더 관대하다는 식의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습니다. 관대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어떻게 가정해 두고 이런 평가를 내렸는지 모르겠지만 6개 나라에서 5-12세 어린아이들 1170명 대상으로 한 실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 스티커 10장을 기준으로 평가해 종교없는 아이들은 4.11장, 기독교나 무슬림 배경에 자란 아이들은 3.3장을 다른 학급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결과로 종교적 배경을 가진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도 덜 관대하다는 식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도 지나친 비약은 아닐까 싶었습니다.
사실 몇 개의 표본집단을 근거로 한 통계조사가 우리의 이해를 돕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통계자료 자체가 사회나 현상을 정확하고도 명확하게 대변하지 못합니다. 통계의 맹점을 보여주는 현상으로서 ‘통계적 착시’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이는 정부나 주요 기관들이 발표한 통계가 실상과 차이를 보일 때를 의미하는 현상입니다. 예를 들어 UN 마약 범죄 연구소(UNDOC)가 매년 초 인구 10만명 당 성폭력 발생 비율을 집계한 자료를 보면, 스웨덴․노르웨이 등 복지국가들의 성폭력 피해자 발생비율이 다른 나라들보다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근거로 “복지 제도가 잘 구비된 나라에서는 성폭력이 많이 발생한다”라고 결론을 내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성범죄와 같은 특수한 경우 피해자가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면 드러내지 않는다는 특성 때문에 착시 효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죠. 혹은 국가의 처벌 규정이나 국민들의 신고정신의 부족을 그 원인을 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본질상 이기적인 특성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비록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실제 그 부모들이 종교적 가르침에 충실했는지, 아이들에게 그 가치관을 가르쳐 주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전혀 알 수 없이, 그저 종교적 배경이 없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의 스티커 10장을 가지고 “종교는 사람들을 비관용적으로 만든다”는 식의 어처구니 없는 결론으로 나아가는 것은 정말 지나친 확대화, 심각한 통계적인 착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종교를 비판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역시 이거다!”라며 달려들만한 엘로우 페이퍼 같은 자료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근본주의를 표방하는 몇몇 단체에서는 관용보다는 독선적인 가르침을 더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비단 종교단체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종교와는 관련이 없는 단체나 이념을 추구하는 곳에서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무신론을 표방한 공산주의에서 벌어진 그 독선적이며 폭력적인 행위를 근거로 “무신론은 애초에 폭력적이다”라고 결론을 내릴 근거가 되어야 할까요? 종교가 있거나 없거나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특정한 사상이나 이념 혹은 이익추구에 있어서 관용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할 여지가 많습니다.
후기성도는 어떻습니까? 단지 “유일하고 참된 교회”라는 주장을 한다고 하여 독선적이며 이기적인 가르침을 아이들에게 주입합니까? 물론 어느 단체나 조직에서나 볼 수 있듯이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후기성도들이 대부분 모여사는 유타주 몇몇 곳에서도 타 교단 사람들에게 그러한 느낌을 줄만한 행동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차례에 걸쳐서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 원리에 따라 그러한 일들이 그릇된 것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예를 들어 관용과 관련하여 힝클리 회장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 적이 있습니다.
“[다양한 종파에 속해 있는] 우리는 설혹 하나님에 대해 각기 다르게 해석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각자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믿는 교리나 철학에 관계없이 서로에 대한 존중심과 넓은 아량, 관용의 태도를 기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Gordon B. Hinckley, Teachings of Gordon B. Hinckley (1997), 665.)
교회의 교리를 요약한 신앙개조에서도 이에 대해 잘 나와 있지 않습니까?
11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양심과 지시에 따라 예배할 수 있는 특권이 있음을 인정했으며
13조에서는 우리는 정직, 진실, 순결, 인자, 유덕, 그리고 만만에게의 선행을 믿는다 표명하면서 무엇이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거나 칭찬할 만한 것이 있으면 이를 구하여 마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주장이건, 어떤 사상이건 자신의 양심에 따라 생활할 자유와 특권이 있음을 인정하면서, 어느 곳에 있든지 유덕하고 사랑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 있다면 이를 구하겠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인데 이를 어찌 비관용을 조장하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을 것인가요?
오히려 교회를 떠나 교회를 대적하는 몇몇 이들이 보이는 태도는 관용이나 사랑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겉으로는 이해가 많고 관용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듯 하지만 실상 교회와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을 전부 왜곡되고 부정적인 것으로만 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를 떠난 몇몇 이들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설과 가족에 대한 모독, 그리고 비아냥이 가득 찬 식의 메일이나 글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분노로 반응해서 법적인 대응까지 할 수 있는 그러한 상황이었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방법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참고 넘어갔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게 되었을 뿐입니다. 전 이것이 복음이 주는 용서와 관용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칭 엑스모들은 교회의 몇몇 가르침에 동조하지 않아 이에 분노하거나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관과 의식들을 조롱하고 있지만 교회는 이에 대해 특정한 법적인 조치나 물리적인 행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서 하는 것이라고는 몇몇 글들에 대한 “게시 중단 요청”일 뿐입니다. 그들은 이런 작은 상징적인 행위조차 벌벌 날 뛰면서 분노하지만 단지 침묵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작은 몸부림을 뿐입니다. 다른 단체에서는 이러한 일들을 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조그만 찾아봐도 교회가 하는 이런 게시 중단 요청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텐데 말입니다.
누가 더 관용적일까요? 종교를 가진 이? 아니면 종교가 없는 이? 저는 이를 두고 칼로 두부 자르듯이 어느 단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는, 특히 후기에 회복된 이 복음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며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선한 것이 어느 곳에 있던 간에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사랑과 이해, 용서를 가르쳐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자녀들도 이러한 복음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잘 이해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있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보잘 것 없지만 상대방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라면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알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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