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글/개인적 생각들

교리적인 논쟁은 그릇된 일일까??

모로나이 2016. 2. 4. 16:53






흔히들 논쟁이라고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부터 떠오릅니다. 처음에는 얼굴에 가득 미소를 머금고 각자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이야기하는 것 자체는 좋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서로의 입지가 좁혀지지 않을 때는 얼굴에 당황함과 불쾌한 표정이 서서히 나타났다가 결국에는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쏘기도 하고 언성이 높아지는 일들로 끝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논쟁에 대한 이미지가 이러한 것이며 실제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그런지 교리적인 논쟁하면 다툼과 감정 싸움, 소모전과 같은 이미지만 떠올라 주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친구끼리는 종교, 정치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하죠. 그만큼 이 두가지 주제는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그 관계를 소원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도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예수께서도 미대륙 백성들을 방문하셔서 교리의 요점에 대해 논쟁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다투는 정신을 가진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요 분쟁의 아비인 악마에게 속한 자임이라,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서로 노여움으로 다투게 하는도다. 보라, 노여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충동하여 서로 대적하게 하는 이것은 나의 교리가 아니요, 그러한 일을 없이 하는 이것이 나의 교리이니라.” (311:29,30)

 

십이사도 정원회에서 봉사하셨던 마빈 에쉬튼 장로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입장과 의견을 달리할 때, 우리는 논쟁을 하거나 앙갚음을 하거나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입장을 이성을 가지고 우정 있는 설득과 분명한 사실로써 설명하는 것입니다.ㆍㆍ우리의 책임은 도덕적인 일과 복음의 영원한 원리 위에 굳건히 단호하게 서는 것이지, 어느 누구와도 어느 조직과도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분쟁은 벽을 쌓고 장애물을 놓습니다. 사랑은 문을 열어 줍니다.ㆍㆍ다툼은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결코 발전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마빈 제이 애쉬튼, 성도의 벗, 197810월호, 8)”

 

그래서 우리는 우리 교회의 원리와 가르침, 그리고 신성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왜곡하고, 일부의 진실을 부풀려서 그릇된 결론을 내어 회원들이 복음에서 멀어지도록 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을 미덕이나 복음의 방법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실제 교리적인 이야기로 토론을 하게 될 것 같으면 시작부터 부정적으로 보거나 분쟁의 아비가 좋아할 일은 아닌가 싶어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때에 따라 감정적으로 다가오는 주장에 대해 침묵으로 반응할 때가 필요하긴 합니다.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 (누가 23:9)신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저 비판을 위한 비판에, 두 눈을 붉히고 덤벼드는 이에게는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디도 3:10)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침묵은 능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앞서 언급한 애쉬튼 장로님의 권고처럼 논쟁을 하거나 앙갚음을 하려고 다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입장을 이성을 가지고 우정 있는 설득분명한 사실로서 설명할 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인 것입니다. 몇몇 이들이 그릇된 사실을 가지고 인터넷을 통해 회원들을 미혹하고 신앙을 위태롭게 하고 있는데 분쟁은 사탄이 좋아하는 일이란 이름으로 그저 침묵만 지키거나 그저 게시중단 요청만 한다고 해서 될 일일까요? 오히려 그럴수록 그들은, 그리고 그들의 영향으로 의심을 품는 이들은 교회가 뭔가 구린 일이 있으니 아무 말도 못하고 이렇게 중지만 시키지...”라며 그들의 의심을 더욱 강화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정말 교리적인 토론은 불필요한 것이며 논쟁만 불러일으키고, 서로의 힘만 빼는 소모전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저 침묵을 지키고 때에 따라 간증만 전하면 되는 것일까요?

 

“Defending the faith intelligently is only one kind of aid we might offer our far-flung brothers and sisters, ” (지적으로 신앙을 옹호하는 것은 우리의 멀어진 형제 자매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종류의 도움입니다.)

제프리 알 홀랜드 장로 (1988)

 

분명한 사실을 가지고 지적으로, 현명하게 신앙을 옹호하는 것은 이런 저런 이유로, 특히 그릇된 정보로 인해 우리로부터 멀어진 형제 자매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도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이들의 의문에 대해 단지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간증만 전한다고 해서 그들이 그 문제들을 잘 극복하게 될까요? 간증이라는 것은 이런 의문들에 대해 분명한 사실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잘 설명해 준 다음 최종적으로 해야 그 마음에 영이 임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과거 우리의 선지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사도 9:25)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사도 17:17)

 

여기서 변론하다로 번역된 “disputed” 는 분쟁이나 논쟁을 한다는 의미도 있으며 반박하고 이의를 제기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그들이 복음을 전할 적에 단순하게 간증만 전한 것이 아니라 헬라파 유대인들과,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장터에서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토론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몇몇 이들은 바울의 그 변론을 반박할 수가 없으니까 죽이려고까지 한 것 아닙니까. 어떤 철학자들은 그런 바울을 일러 말쟁이”(사도 17:18)라고 폄하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은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그릇된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토론하여 진리를 증거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사도 6: 9-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유대인들과 논쟁을 했을 때 그들은 능히 당하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스데반의 주장에 반박할 수가 없자 화를 내어 죽여 버리고 말았죠.

 

이 두가지 사례를 보면 중요한 가르침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나 스데반은 적극적인 토론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토론에서 이긴 것은 단지 그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스데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혜와 성령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토론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덤비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서 지혜를 구하고, 성신의 인도를 통해 복음에 확신을 가질 때만이 상대방을 확신시키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에쉬튼 장로님의 권고처럼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대처했을 때 상대방은 이에 반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딤후 2:23)는 말씀처럼 어리석고 무식한변론을 할 때 다툼이 나는 것이지 지혜롭고 유식한변론은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최소한 생각의 전환 정도는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려할 것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지 지혜롭고 유식한 변론은 하나님의 종들이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교회를 반대하는 여러 논증이나 거짓 증언, 일부의 진실을 비틀어 왜곡시킨 이야기들로 회원들을 미혹하는 경우에 그저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몇몇 글들에 대해 게시중지만을 시키면 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몰몬들의 행복한 삶을 다루는 여러 글들을 부지런히 올려서 부정적인 이야기의 글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해야 할까요? 물론 이 모든 것들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대해 우리의 입장을 이성을 가지고 우정 있는 설득과 분명한 사실로써 설명하는 것이 있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부정적인 글을 다루고 있는 게시판에 들어가 그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설명하고 명확한 원리를 전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시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을 하기 위해선 우리가 부지런히 경전을 공부하고 복음원리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겠습니다. 게다가 기도로 영의 인도를 구하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재까지는 비교적 소극적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하면 이젠 보다 적극적으로 이런 일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