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들은 어떤 카페에서 “한 번 믿음으로 얻은 구원은 취소될 수 없는가?”를 주제로 토론한 내용입니다. 그곳에서 진행되는 토론을 보면 “오직 성경”만을 근거로 한다면서 교리를 펼치지만 정작 주장하는 바를 들어보면 성경과는 무관하게 괴변만을 늘어놓는 것 같았습니다.
1. 장로교회에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한 번 아들로서 입적이 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건 구원이 확정되어 있다는 주장을 하는가 봅니다. 그에 대해 제가 답변한 글입니다.
너무 이해할 수 없는 주장들입니다. 한 번 양자로 입적이 된 사람은 그가 무슨 일을 하건, 무슨 생각을 하건, 그 아버지를 어떻게 믿건 아들이라는 관계에 변함이 없어서 구원이 확정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만약 다른 종파로 가게 되어 행함의 중요성을 믿게 되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그 사람은 애초에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세를 입었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로마서 8:39)는 구절을 들어 그 어떤 일들도 우리의 구원을 방해할 수가 없다고 주장을 하셨으면서 그에 행함을 붙이거나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지 않을까 믿으면 애초에 양자가 된 것이 아니라니요.
그럼 어떤 사람이 양자로 입적이 된 것인지 알기 위해서 결국은 죽을 때까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확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가 됩니다. 저는 이것이 구원은 취소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지 차이점을 구분하기 힘듭니다. 그냥 용어의 차이가 아닌가요?
초기에 믿음을 지닌 자가 결국 나중에 다른 믿음을 갖게 되거나 그 믿음을 버리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이야기나, 나중에 보니 결국 그는 양자가 아니었다..는 말이나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말 장난 같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내가 남에게 전도한 후에 오히려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고전 9:27)
25,25절을 읽어 보면 알겠지만 바울은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우승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달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목표 없이 달리는 사람처럼 달리지 않는다고도 합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바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은 혹시나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썩지 않은 면류관을 위해 열심히 내달렸던 바울도 혹시나 자신이 버림을 받을까 두려워서 자신을 끊임없어 복종시킨다고 합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마태 10:22, 24:13, 마가 13:13) 목표를 향해 끊없이 달렸던 바울은 님의 말씀에 의하면 본래 양자로 입적되었던 자가 아닙니다. 분명 그는 버림을 받을까, 즉 자신의 구원이 취소될 수도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 8:38,39)
로마서 8:38,39에서 바울이 확신한 내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조건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 보이시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우리의 구원은 끊겨질 수가 없다는 말이 맞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다르게 생각해 보세요. 그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밖으로 나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우리의 구원이 확정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확신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의 구원은 분명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했쟎아요. 본인 스스로도 버림을 받을까, 즉 자신이 그리스도 밖으로 나갈 경우 구원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그 가능성을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히브리 10:26,27)
여기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알게 되었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그가 짐짓 죄를 범할 경우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히브리 6:4-6)
윗 구절도 잘 보세요.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한 바가 되고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본 자들”에 대해서 나오지요. 이런 자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그 선한 은혜와 능력을 알게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역시 타락할 수 있다고 알려주죠? 타락한 그들은 결국 새롭게 회개할 수도 없게 되는 상태임을 알려줍니다. 혹시 님은 이런 자들이 “예수님을 잘못 받아들인 자”나 “애초에 양자로 입적된 적이 없는 자”라고 해석하실 것은 아니지요? 빛과 하늘에서 오는 은사를 맛보며 성령의 참여하고 능력을 맛본 자들이라면 당연히 본인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고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타락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설마 이들이 타락해도 결국 구원은 정해진 것이라는 얼토당토한 소리를 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하나님의 자비는 무조건적인 것임이 분명합니다. 다만 그 자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물 경우에만 유효한 것이겠지요. 설마 예수를 영접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과정 자체를 “행함으로 얻으려는 구원”으로 보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 밖으로 나간 자들은 구원받을 수가 없겠지요. 이것은 성경 전체에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발견할 수 있는 사실 아닌가요?
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한 번 아들로 입양한 아들은 그 아들이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입양을 취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한 번 영접하여 아들이 된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건 간에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구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자주 “당신이라면 입양한 아들을 파양할 수 있는가?”라는 식의 논리로만 들이밉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논리는 믿지 않은 자들이나, 혹은 지옥 사상을 거부하는 안식일교회나 여호와의 증인들도 자주 사용합니다. “당신이 아버지라면, 혹은 사랑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면 아들이 아버지를 믿지 않았다고 불구덩이에 보내 영원토록 고문하겠는가?”
인간의 경우를 들어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려는 취지는 충분히 동감하고, 실제로 효과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을 애써 거부하거나 오히려 전혀 문맥과 맞지 않게 비비꼬고 왜곡하면서 인간의 예만을 계속해서 드는 것은 분명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그가 버림을 받을까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했고 그것은 생명의 면류관을 의미하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고전 9:27) 그런데 그가 한 말을 혹자들은 이렇게 비비꼽니다. 그것은 영생이 아니라 상급이라고요. 영생과 상급을 구분하는 조건이나 근거가 성경적으로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주시는 선물은 영생이 아닌가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 1:!2)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을 잘 참고 끝까지 신앙 안에서 견딜 때 그것을 옳다 인정하시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생명, 즉 영생의 면류관은 그것을 잘 참고 견디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실제 바울은 그것을 위해 끝까지 견디는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7)
잘 보세요.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라 하늘에서 주어지는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는 말을 하지요. 그냥 단 한 번의 믿음으로 인해, 아무런 개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끝까지 선한 싸움을 하면서 믿음을 지켰기에 구원이 주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요한계시록 3:11)
이 구절에서도 나오쟎아요. 우리가 가진 믿음을 굳게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면류관, 즉 영생(구원)을 잃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저는 신학을 전공한 적도 없기에 무슨무슨론이니 학설이니 하는 것에 대해 알지도 못하며 관심도 없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과 하등 무관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저 편견 없이 성경을 읽어 봐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경우에, 그것도 그 믿음을 끝까지 지키고 견딜 경우에만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명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한 번 구원 받으면 무슨 일을 하건 그냥 구원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무슨 구원과 상급이 다르다고 합니다. 그게 도대체 성경 어디에 나와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한 번 설명해 주세요.
3. 저보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저는 분명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으며 그 분 안에서 구원이 약속된 아들임을 믿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요?
“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6,7)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로마 8:15,16)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고 그에 대한 증거로 성령을 통해 제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믿으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에 더하여 성경에서 증거하는 것처럼, 이런 진리의 영을 통해 예수를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타락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그분의 길에서 벗어날 때 구원의 길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 이곳저곳에서 너무나도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렇게 믿었다고 하여 실제 양자로 입양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그에 대한 증거는 성경 어디에 있습니까? 제가 성경에서 약속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아들임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는데, 성경 어디에서 구원이 취소된다고 믿으면 실제 아들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는 말입니까?
만에 하나..개인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고, 아니 성경 어느 곳을 읽어도 용납할 수도 없지만, 한 번의 구원이 영원히 지속된다고 하면...굳이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서 봉사할 이유도 없고 예배를 드릴 필요도 없으며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할 이유도 없어집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굳이 영생 얻을 방법을 알려주는 성경(요한 5:39)을 연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 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했는데 이미 구원받았기에 믿음을 위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이유도 없지 않겠습니까? 구원이 개인의 노력이 철저하게 배재된 오로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고 하면, 왜 전도를 하고 왜 사람들이 진리를 알 수 있도록 기도하고 성도를 양육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저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란 사상은 성경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할 “다른 복음”이라고 믿습니다.
4. 성경에서 구원이 취소된다는 구절은 구원이 아니라 “상급”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하면 무슨 일을 하건 구원이 취소되진 않지만 하늘에서 받을 상급에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로 주어진 구원에 조건이 붙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고 합니다.
1. 일단 저는 구원과 상급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구원은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것이며 상급은 우리가 행한 것에 근거하여 받는 것이라는 말 같은데... 그럼 구원받고 하늘에 올라가서 우리가 받게 되는 영광이 여러 가지라는 말인가요? 즉 천국에서 어떤 사람은 상을 더 받고 또 어떤 사람은 상을 덜 받게 된다는 그러한 이야기?? 그에 대한 성경 구절은 어디에 있습니까? 칼럼을 읽어 보라고 하셔서 들어가 봤는데 성경적인 이야기는 없고 그저 개인의 주장만을 풀어 설명한 것에 다름이 없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천국에 올라가서 받게 되는 상급(?)의 차이점에 대해 언급하는 성구를 몇 가지만 제시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2. 예수의 이름으로 수많은 일들을 행했지만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았기에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태 7:23)는 말씀으로 그들을 버리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럼 이들도 상급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구원을 받지만 상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에게 “불법을 행하니 내게서 떠나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말인가요? 고전 9:27에서 바울이 말한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는 구절도 상급에 대한 이야기라 하셨습니다.
예수께 버림을 받을 것을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태 25장에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기서 염소를 구분하는 조건으로 단순히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과 관계없이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태 25:45)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6절)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즉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행위”로 인해 양과 염소가 구분되며 양은 영생으로 염소는 영벌에 처해진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상급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이지요?? 그럼 구원을 받지만 상을 받지 못하는 상태를 “영벌”이라고 부른다는 말인가요?
3.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5:10)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요한 5:29)
마지막 날 심판은 “행함”을 근거로 합니다. 이것도 상급에 대한 것이라면 아무리 구원을 받아도 행함이 그릇된 것이면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는 말인가요??
이런 식으로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다 보니 구원을 받지만 상급을 받지 못하는 일들을 “심판”“영벌” “버림받음”과 관련된 것들로 설명할 수밖에 없네요.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어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계속 이러한 표현들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가요? 그런 논리와 맥락을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니 정말 억지스럽다는 생각 밖에 안들구요 영생의 가치가 자꾸만 퇴락하는 것 같습니다.
4. 자비에 조건을 달면 자비의 특성을 망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속 이런 이야기로 구원과 상급을 구분하려는 논리를 펼치다 보니 부자연스러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학비가 없어서 고민하는 학생이 있었는데 “자비”로 그 학생에게 학비를 지원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정한 날에 어느 지역으로 오라고 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학생은 그냥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그 장소에 나가서 후원자에게 학비를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만약 학생이 이런 생각을 한다면 어떨까요?? “아니 자비를 베풀어 나에게 학비를 준다고 하면서 왜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나가라고 하는거야? 이건 조건이 붙었으니까 자비로운 행동이 아니야. 조건이 붙었으니 이건 자비로운 선물이 아니라 상급에 불과하네. 나가지 않아도 그 사람은 나에게 학비를 제공할 거야.”
누가 생각해도 바보같은 생각 아닌가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 오기만 하면 무상으로 학비를 제공하겠다는데 조건이 붙었다고 그것은 자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 학생과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을 저는 여기서 보고 있습니다. 그 장소에 나가지 않으면 학비는 받을 수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고 구원은 선물이 맞습니다. 다만 그 선물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도록 요구받는 일들이 있다는 거죠. 그러한 내용이 성경에 (부정할 수 없도록) 너무 가득하게 채워져 있어서 몇 구절만 넘겨도 찾을 수가 있는데 “조건이 붙으면 선물이 아니다”라는 이 단 하나의 명제로 모든 구절들을 부정하고 “구원과 상급”이란 이분법으로 성경에 대한 이해를 더욱 애매모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 4:1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 2: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로마 8:13)
5. 상급에 대한 글을 읽고 쓴 답변입니다.
일단 상급에 대한 칼럼을 읽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이렇더군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지만 우리가 지상에서 행한 행위에 따라 천국에서의 “급”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천국에도 여러 단계 혹은 여러 상급이 있어서 우리가 살면서 행한 것들에 따라 갖게 되는 영광도 다르다는 말입니다. 맞습니까?? 그래서 일반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십일조 내라, 봉사해라, 주일 성수해라, 맡은 직분에 충실하라...뭐 이렇게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이죠. 우리의 구원과는 무관하지만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가 받게 될 상급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하라는 말입니다. (제가 오해하고 있다면 죄송합니다. 제 이해의 한계일 뿐입니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알겠습니다. 제가 장로교회의 교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믿고 있었다니 참조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무슨 논쟁을 통해 누구 말이 맞는지 따지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믿음도 있구나, 성경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구나...정도로만 이해하겠습니다.
다만 아직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오직 믿음으로 인한 구원”이 취소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이라는 개념입니다. 물론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획득할 만한 자격은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믿음을 저버릴 경우,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벗어날 경우에 구원은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디모데전서 1:19)
구원으로 이르는 믿음이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이라고 한다면 누군가가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가지라는 권고를 할 수도 없는 것이며 또 어떤 이들처럼 믿음에 관해 파선하는 경우도 불가능하게 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사도 16:31)는 권고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짜피 구원과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일진대 복음을 전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떤 분께서 계속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지에 대해 물으시면서 전에 드린 대답이 이론적일 뿐이라고 하는데 성경 구절을 들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론적이라면 제 개인적인 체험이라도 이야기해야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요한계시록 3:20)
예수를 영접하는 과정은 우리의 개인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 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우리가 마음 문을 닫으면 그분은 우리에게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먼저 그분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고 그분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먹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한 개인을 구원하고자 하여도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마태 13:15)은 자들에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영생을 약속받은 자가 훗날 그 믿음을 저버리면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라고 하신 것 아닌가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자들은 나중에 예수를 더 이상 믿지 못해 그분을 부인해도 정죄함 받지 않고 영생이 확보된다는 말입니까?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태 10:32,33)
아무리 전에 예수를 시인했다 하더라도 훗날 그분을 부인하면 예수님도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부인한다는 말이 구원이 취소된다는 말 아닌가요? 이 역시 상급의 논리로 풀어해석하실 것입니까?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디모데전서 5:12)
아무리 한 때 예수 안에 들어와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만 훗날 그 믿음을 저버리면 정죄를 받기 마련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께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실 적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 2:13)고 하셨지요. 가롯 유다도 처음에는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믿음으로 인한 구원을 받았을테니 사도로 선택 받고 그분을 증거 했겠지요. 하지만 결국 훗날 예수를 부정하여 영원한 버림을 받았구요. (설마 이런 이야기에 유다는 애초에 양자로 입적된 자가 아니라거나 유다의 구원은 변함이 없지만 하늘에서의 상급에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는 식의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로 둘러 변명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계속 행함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율법주의자라고 하시는데....저는 복잡한 신학적인 이론 같은 것은 모르고 남들이 뭐라고 하던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된 것만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믿을 뿐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 2:17, 20,24)
저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경우 결국 행함이 없을 경우 죽은 것이며 헛된 것임을 믿습니다. 뭐 행함과 믿음의 기준을 몇 퍼센트로 나눠야 하느냐 당신은 100% 행하는 면에서 완벽하냐는 식의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 퍼센트는 오직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내게 맡겨진 달란트에 따라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정한 달란트를 주셨는데 행함이 가입되면 안된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아시지 않나요? (부디 이 달란트의 비유도 구원은 받았으나 상급의 이야기라는 식으로 얼버무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고 했는데 영광스러운 구원을 받은 자를 상급 받지 않았다고 어두운 데로 쫓고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하겠습니까?)
성경만을 가지고 판단해야 할 분들이 쓰시는 글들을 보면 대부분 개인적인 판단이 거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야고보서에 분명히 나와 있는 내용임에도 “행함”이란 말만 나오면 이런 식의 이야기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님의 믿음이란 개념이 거듭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님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지만 예수님을 모르고 있는 것이며 지금 교회에서 방황하는 종교 생활자일 뿐입니다.” “그 동일한 기준으로 묘약님에게 정직하게 적용해 보세요.이것은 철저히 행함 윤리 도덕구원론입니다.”.. “자신있습니까?”
그런 개인적인 단정보다는 무엇이 성경적인지 조목조목 알려주시면 됩니다. 목회를 하시는 분일테며 저보다 연배가 있으실테니 신학의 신자도 공부한 적 없는 저에게 성경만을 가지고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6.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어떤 분이 제대로 된 반증 하나 못하면서 비아냥 거리는 말들을 계속 올리기만 해서 다음 글을 마지막으로 토론을 그만두었습니다.
“자칭” 은혜라는 이름을 가지신 분께..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 4:6)
사용하시는 필명도 은혜이시면서 사도바울의 말을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는 권고의 말씀은 듣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리 본인의 의견과 맞지 않다고 해도, 설령 그것이 이단 사설의 말이라고 해도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은혜 가운데 전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님이 남기신 댓글들은 참으로 추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신앙인이라는 사람이 비속어를 남발하고 욕설을 사용하는 경우 상대하지 않는 편입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지요.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 6:45)
사람이 부지불식간에 내뱉는 말에는 그 사람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납니다. 만사에는 “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전도서 3:7) 실제 말꼬투리를 잡으려는 자에게 예수께서는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누가 23:9)라는 모범을 보여주신 적도 있습니다. 진심으로 알려는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며 비판하고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며 감정적인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자리에서는 그냥 침묵을 지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고전 2:9)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것들은 눈으로도 못보고 귀로 듣지 못하며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들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고 하셨는데 제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 안에 거하게 된 것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님은 그것 하나 설명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불신자에게 전할 수 있느냐면서 항변을 합니다. 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민을 위해 돌아하신 것들을 불신자들이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설명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고전 2:4)하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이라는 부분은 복잡한 신학적인 용어를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뭐가 논리적, 이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진행되는 것이구요. 그래서 저는 말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과 저 개인의 관계임을 설명했을 뿐입니다. 제가 성령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믿고 그것을 말한 들 그걸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왜 계속 이걸 말로 설명하라는 식으로 강요하시나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한, 성경 구절을 근거로 말씀드렸음에도 말입니다.
영생이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주어지는 것임을 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합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벗어날 때 그 영생은 취소되는 것이구요. 그에 대해 저는 이미 여러 성경 구절들을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님은.....제 주장을 반박하거나, 님의 주장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 어디에 그런 구절이 있는지, 그리고 제가 인용한 구절에 대한 해석 중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반박하는 내용도 없습니다. 그저 영생은 영원한 생명인데 그것이 취소되는 것이 말이 안되는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하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는 구절만 인용합니다. 제가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상태라면 불쌍히 여기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적해 주시고 설명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악담에 비속어를 쏟을 뿐입니다.;
저는 님께 할 말은 다 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앙인이라는 자가 자기의 의견이 다르다고 하여 비속어를 남발하는 분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님께 드릴 말씀은 이렇습니다. 잘 유념하시길 바라며 추후 저는 님의 댓글이나 글을 보지도 않을 것이며 답변을 드리지도 않을 것임을 명심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 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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